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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Apr 06. 2022

아주 어른스러운 여행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수희 님 안녕하세요.


나는 지금 양양에 있는 호텔 침대에 누워 이 편지를 씁니다. 우와! 이렇게 글을 시작하니 꽤 근사한 작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필력이 생겨 원고 청탁이 밀려오는데 그걸 다 감당할 수 없어서 허우적 대다가 강원도로 일시 잠적해버린 작가가 된 것 같아요. 현생에서도 다음 생에서도 실현 불가능한 일을 짧은 순간 꿈꿔 봅니다. 크크

그러나 조금 씁쓸하네요. 그럼 조금 더 현실적인 꿈을 꾸어 볼까요?


눈이 떠질 때 눈을 뜬다. 굳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날 필요가 없다. 배가 고프면 밖으로 나가 발길이 닿는 식당으로 가 음식을 입으로 넣고 더우면 시원한 풀에 몸을 담그고 추우면 모닥불을 찾아간다. 거기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가끔은 햇빛을 쐬러 산책을 나간다. 가던 길에 있는 편의점 사장과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고 편의점 앞에 내놓은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가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간식을 꺼내 먹인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 들어와 한 달 동안 머물기로 한 집에서 냄비밥을 해서 이른 저녁을 먹고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미리 사둔 하와이안 브랜딩 원두를 갈아 커피를 끓여 마신다. 이곳에 온 이후로 시계를 본 적이 없다. 머리맡에 펼쳐 놓은 책의 글씨가 보이지 않게 되면 아....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가는구나 하고 눈을 감으면 그만이다.


이것이 내가 요즘 생각하는 텅 비어 있는 듯 하지만 꽉 찬 여행입니다. 아직은 낯선 도시에서 한 달 살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지만 언젠가는 꼭 이룰 나의 작은 꿈입니다.





어제는 수희 님의 책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를 발견한 설악산책에 가는 길에 우연히 속초 한옥마을이라는 곳을 지나치게 되었어요. 기와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길래 볼만한 곳이겠구나 하고 골목 안쪽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서 동네 구경을 했어요. 생각보다 작은 동네였고 관광객이 볼만한 건 별로 없었어요. 너울집 이라는 마당이 예쁜 한옥 카페가 있긴 했는데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저의 흥미를 끄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요. 그건 바로 신기하고 이상한 모양의 집이었어요 어쩌면 남들은 질색을 할 집일 수도 있는데 나는 괴팍한 데가 있는지 그런 게 좋아요. 어떤 기와집이었는데요. 그 집이 재미있던 이유는 대문이 양옥 스타일이라는 거예요. 어떤 대문이냐 하면요. 일산 정발산동인가요? 그쪽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담장과 대문이었어요. 조금은 공을 들여 지은 집의 대문. 철제로 된 유럽풍의 대문이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될까요? 바로크 양식에 가까운. 아무튼 기와집과 양옥 대문의 기이한 부조화를 보는 순간 어쩐지 너무나 귀여운 거예요. 이렇게 만들어 놓고 집주인의 표정은 어땠을지. 마음에 들어 좋아했을지 아니면 정말 망했다고 생각했을지. 그런 생각에 자꾸 비실비실 웃음이 났어요. 또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집은 어떤 시대가 뭉터기로 생략되어 있었어요. 조선 시대와 21세기가 공존하는 건축 양식이라고 할까요? 혁신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걸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그 기와집은 조화롭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주인이 자신의 집을 아끼는 마음이 흘러넘쳐 보였어요. 기와지붕과 유럽풍의 철제 대문을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고 마음이 행복해지더라고요.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그 집은 마치 내 모습 같기도 해서 오래오래 바라보았답니다.




양양 여행의 첫째 날에는 동그란책 이라는 귀여운 이름의 책방을 다녀왔어요. 바닷가 바로 앞 하얀 단층 건물의 아름다운 책방을 보자마자 탄성이 나왔어요. 오 마이 갓! 이렇게 예쁜 책방이 있다니!




동그란책 책방





나는 여행을 가서 책을 읽는 게 즐거워요. 집에서는 도무지 읽히지 않던 책을 내가 묵는 숙소의 침대 머리맡에 두고 아무 데나 펼쳐 읽어요. 오 분이나 십 분쯤 읽다가 아무 때고 덮어버릴 수 있는 게 여행 중의 책 읽기인 것 같아요. 책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잠에 빠져들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고요. 책 읽기가 숙제가 아니라 쾌락이라는 걸 알려주는 게 나에게는 바로 여행인 것이죠. 그래서 내 여행 가방에는 꼭 한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그리스인 조르바에게 한 대 얻어맞게 돼요.




"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놓고 불이나 놓아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나는 조르바에게 뒤통수를 맞은 듯 얼떨떨했고 그다음부터는 여행가방 속에 책을 넣지 않게 되었어요. 여행 중에라도 과감히 책을 버리자. 책 대신에 자연과 삶과 낯선 거리와 낯선 사람들 속에서 더 많은 걸 읽어내자.라고 마음먹었지만 나란 인간은 어쩔 수 없는지 책을 가져가는 대신 현지에서 책을 사는 사람이 되었어요. 이번 여행에도 어김없이 책을 한 권 샀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입니다.





이번 여행에 산 책





여행에서 돌아와 늦은 밤에 이어서 씁니다.



수희 님 사실 나는 여행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어요. 다른 사람들이 일을 하고 돈을 벌 때 남들보다 더 많이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자식을 먹이고 입히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남들이 여행을 다닐 때는 일을 많이 하느라 녹초가 된 몸뚱이를 회복시키느라 바빴어요. 일을 하면서 쌓인 피로와 머릿속에 억지로 집어넣은 업무와 관련된 지식들을 여행을 통해 비워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여행 따위는 할 시간이 없다고만 생각했고 시간이 남고 돈이 남으면 최후에 할 일로 남겨두고 살았어요.

떠날 계기가 생겨야 길을 나서는 사람이었죠. 일에 미쳐있는 내가 안타까워서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호텔을 예약해버린 친구 덕에, 공짜 콘도 이용권이 생겨서, 먼저 여행을 가있던 친구의 초대를 받아서 못 이기는 척, 애인이 유학을 가서, 대부분 그런 시답잖은 이유가 나의 발길을 잡아끌었으니 여행의 즐거움을 알리가 없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시도 때도 없이 책을 읽으면서도 여행에 관한 책만은 읽지 않았어요. 스페인과 프랑스와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을 여행하는   책을   사람의 삶일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같아요. 어쩌면 그들도 오랜 시간을 기다리다 작정하고 떠났을 여행일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왜 비뚤어진 시선으로만 바라봤는지, 아마 다른 사람의 여행담을 책으로 읽으면서 내 처지를 확인해서였을 거예요. 그러면서 여행책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생각이 굳어진 거겠죠.




수희님 이 책 아시죠?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교토라서 특별한 바람 같은 이야기들)]이요. 네, 바로 수희 님이 쓰신 여행 에세이입니다. 오글거리는 거 싫어하는 줄 아는데 어쩌겠어요. 내가 여행을 가기 전이면 언제나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한 꼭지는 읽게 되는 책인걸요. 나는 작가 님의 책은 다 읽었고 작가 님의 팬이지만 이 책만큼 한수희 작가가 가깝게 느껴진 책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이 사람이 좋은 이유가 분명한 책. 작가에게 반한 책. 게다가 부제가 바람 같은 이야기잖아요. 여행과 교토와 바람 같은 이야기라니. 더 놀라운 건 뭔지 아세요? 이 편지의 수신인이 수희 님이라는 사실. 우하하하.








여행책을 읽지 않던 나도 한수희 작가가 쓴 교토 이야기라면... 하고 기대를 안고 읽었던 기억이 나요. 프롤로그부터 빠져 들었죠. 교토를 여행하는 작가 님을 미행하는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나는 도쿄에는 가봤지만 교토에는 못 가봤어요. 이 책을 읽고 한동안은 교토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죠. 언젠가는 이노다 커피 본점도 수희님이 깨끗하다고 칭찬한 피스 호스텔도 교토 대학교도 꼭 가보려고 합니다. 제가 수희님의 교토 이야기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한수희스럽기 때문이에요. 한수희스러움이란 어떤 거냐고요? 그건 210페이지도 218페이지에도 적혀 있어요.


여행이란 게 무엇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오늘은 그런 생각을 한다. 여행에 관한 그 수많은 정의 중에서 여행은 어쩌면 자신만의 이상향을 찾아가는 여정에 가까운 게 아닐까 하고. 눈에 달라붙지 않은 풍경들과 귀에 익지 않은 소리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것들을 더 쉽게 찾아내는 건 아닐까 하고. 중요한 것들은 보통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알고 보면 무척 단순한 것들이니까. 너무 단순해서 잊어버리거나 또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니까. p210
내가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대개 낯선 곳에서 무책임한 시간을 보내며 그저 즐기는 일만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일상에 끝없는 책임과 무거운 의무를 잠시라도 벗어던지고 싶기 때문이다. 또 소비주의 사회에서 나는 쓰기 위해 계속해서 벌어대야 하는데, 돈 버는 일의 고통을 잊고 아주 잠시 동안 쓰는 것에만 몰두하는 방종을 나 자신에게 허락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p218



한수희스러운 여행책은 책으로만 여행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느낌이 들어요. 안 그런 척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여행을 부러워했던 나로서는 그 점이 좋았던 것 같아요. 작가님이 책을 쓰면서 그 지점을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요. 누군가에게 박탈감을 줄 정도로 여행을 찬미하지 않아요. 그저 교토의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먹고 마시고 버스를 타거나 목욕탕에 가는, 여행을 여행이 아닌 대수롭지 않은 일상으로 만들어 버리죠. 그래서 한수희스러운 여행에 불청객으로라도 따라붙고 싶게 만드는 책이에요.



창문 밖에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있어요. 밖에 나가지 않으면 봄바람이 불어서 나뭇잎이 흔들리는지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건지 알 수 없듯이 인생도 비슷한 것 같아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야말로 창문 안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막막한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믿었던 것들이 나를 속이고 나도 어쩔 도리가 없어 상대를 속이며 그런 와중 가장 비참한 순간은 내가 놓은 덫에 내가 걸려 넘어질 때였죠. 괜찮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사실은 그렇지 않고 도려내는 것만이 내가 살 길인데 도려내는 것이 두려워 결국 굳은 살을 만든 일들을 떠올리며 이틀 전 여행 가방을 꾸렸어요.

여행을 가면 다른 사람이 되는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어요. 여행지에 도착하면 누구보다 너그럽고 여유가 넘치고 다정하고 친절한 남자가 되는 남편은 그런 면에서 좋은 여행 파트너예요. 한껏 다정해질 그에게 꼭 할 말이 있었고 그 말을 비워내는 게 이번 여행 동안 해야 할 일이었어요. 깨닫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비움을 위한 여행인 것이죠. 여행에서 얻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양양과 속초와 고성을 하릴없이 떠돌고 먹고 마셨어요. 교토에서의 수희 님처럼요. 밤이 되면 남편에게 그동안 하지 못한 말을 털어놓고 내 마음을 비웠어요.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여행이란 참 좋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쨌거나 우리는 그전과는 약간, 미세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걸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알게 되었어요. 남편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렴 어때요. 지금부터 나는 예전보다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볼까 해요. 이번 여행은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았다고 생각해요.


수희 님 나는 곧 동인천으로 일석이조 여행을 가려고요. 수희 님이 지난 편지에서 말했던 병원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제 얼굴도 레이저로 지져 없앨 잡티가 엄청나게 많다고 말씀드렸죠? 오른쪽 눈 아래 새로운 게 생겼는데 꼭 눈곱처럼 보여서 몹시 난감해요. 수희 님만 괜찮다면.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은 얼굴도 상관없다면 병원에 갔다가 수희 님의 단골 맥주집에 가요.




2022. 4.6

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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