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수희 Apr 16. 2022

변명의 특권

안녕하세요, 설님.


토요일입니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 나왔습니다. 아주 맛있는 플랫 화이트를 마시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혼자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저들이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제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절실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한시도 그 애들과 떨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순간순간 식은땀이 나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공황장애였던 것 같아요. 그러면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잠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고 했지요. 한겨울, 책과 노트가 든 가방을 매고 어두운 길을 걸어내려가 카페까지 가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추운 날이었는데도 저는 행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해방이다!


유치원 때인가, 눈치가 빠른 큰 아이가 제 생일날 만들어준 카드에는 예쁘게 꾸민 커다란 제 모습이 가운데에 있고, 가장자리에 작게 자기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글이 써있었습니다. ‘엄마, 우리 때문에 너무 힘들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와요.’


그 글은 제 가슴을 후벼팠고, 여전히 저는 그 글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제가 정말로 되고 싶지 않은 엄마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저는 여전히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지도요. 이미 늦어버렸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저는 억지로라도 저에게 말해줍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말이에요.


그런 사람인 제가 글을 쓰고 책을 써왔습니다. 저는 남들보다 나을 게 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남들보다 못한 구석이 더 많지요. 제가 작가가 된 이유는 그저 운이 좀 더 좋았고, 끈질겼으며, 글을 쓰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가 쓴 글귀를 옮겨 적은 것을 볼 때 마음이 쓰립니다. 저는 그 글귀를 쓴 사람처럼 훌륭하지도, 근사하지도, 올바르지도 못합니다. 작가인 한수희와 인간 한수희는 어느 정도의 교집합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입니다.


설님이 제 책을 꾸준히 읽어주셨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기쁜 일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작가가, 내가 쓴 글을 좋아해주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행운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역시 인생은 살아볼만한 거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와 동시에 설님이 옮겨 적어주신 구절들을 읽으니 역시나 부끄러움에 몸이 움츠러듭니다. 저 글귀를 쓴 작가인 한수희는 얼마나 차분한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고상하고, 우아하고, 고고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런 사람은 자기 인생도 정말이지 똑부러지게 잘 살 것 같습니다. 남의 인생에 대해서도 넘치는 관용을 베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어쩌면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쓴 글들은 일종의 변명에 불과합니다. 그런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적어도 내 인생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서만큼은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함부로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라도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 변명할 수 있는 만큼, 그 사람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변명해주자고 생각합니다.


요즘 저는 책을 띄엄 띄엄 읽습니다. 산 책, 빌린 책, 받은 책들이 집안 곳곳에 잔뜩 쌓여 있습니다. 이걸 좀 읽다가 덮어두고 저걸 읽다가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읽은 책이 없습니다. 아아 어쩌지, 하고 생각합니다. 채 다 읽지도 못한 책에 대해 쓸 수는 없습니다. 초반까지는 좋았던 책이 뒤로 갈수록 산으로 가는 경우도 태반이고, 처음에는 집어던지고 싶었던 책을 마지막에 가서야 사랑하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이번엔 또 무슨 책에 대해 써야 할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늦게야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두 작가가 서로에게 보낸 서간집 한 권을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랑 비슷하네, 하고 훑어보았어요. 요즘은 이런 책들이 워낙 많이 나오니 특별할 것도 없지만 말이에요. 오오, 잘 쓰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뭔가 세련된 느낌이 폴폴 풍겼습니다. 갑자기 우리의 편지에는 먼지와 쉰내가 폴폴 풍기는 게 아닐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젊고 단호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올발랐습니다.


어느 정도 읽다가 책을 내려놓았습니다. 좋은 책이었습니다.  권의 책이 하나의 세계라면, 저와는 다른 생각과 마음을 가진 어떤 세계를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올바름이 어쩐지 미묘하게 맞지 않는 셔츠처럼 버거웠습니다.


못난 놈들끼리 우리 다 이렇게 못났잖아? 하며 서로 위로하고 울고 웃으며 시궁창 안에서 허우적대기만 하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온갖 현상에 대한 사고가 일제히 올바름으로 귀결되는 것도 좀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책이다. 하지만, 정말로 말하고 싶은 건 뭐지? 당신의 세계는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어떻게 해야 당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초대장을 받을 수 있는 거지?


저는 걱정이 되어 우리가 쓴 편지들을 주욱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생각보다 편지가 많아서, 게다가 길기도 길어서(제가 엄청 길고 장황한 편지들을 자주 썼더군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아직 이 편지들과 거리를 둘 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책으로, 질감이 있는 종이 위에, 정돈된 서체로 올려진 글자들로 가득한, 그런 형태로 읽지 못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제가 워드 프로그램으로 쓴 ‘원고’와 책으로 만들어진 ‘글’은 왜 이렇게 달라 보이는지 거의 충격적일 정도입니다.)


뭐가 뭔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 편지들을 쓸 수 있어 행복…까지는 아니지만, 좋고 또 좋습니다. 딱히 올바르지도 않고, 크게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넋두리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변명일 가능성이 높고, 구질구질하게 쉰내가 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의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보다 크고 넓은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일을 오래 오래 계속하면서 어떤 식으로 늙어갈지 지켜보고 싶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책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않았군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뭐 하나 끝까지 읽은 책이 없기 때문에 오늘은 책 이야기를 대충 건너뛰겠습니다. 요즘 저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먹을 수 있는 여자>와 김자혜의 <부엌의 탄생> 이진민의 <아이라는 숲> 김영민의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코맥 매카시의 <신의 아이> 김보영의 <다섯 번째 감각> 사치 코울의 <어차피 우린 다 죽고 이딴 거 다 의미 없겠지만> 노라 에프론의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이 있다> 김누리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등등의 책을 여기 저기 쌓아놓고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대단히 산만하지요?)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두 개의 구절들을 옮겨 적는 것으로 이 편지를 마무리할게요.


우리 사회가 이처럼 자기착취 사회가 된 것도 68혁명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68혁명 당시 가장 유명한 구호 중 하나는 바로 ‘정치 투쟁의 최전선은 내 안에 있다’라는 거였습니다. ‘정치 투쟁의 최전선’은 나를 억압하는 외적인 질서 즉 정치권력 혹은 사회구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들이 ‘내 안’에 있다니, 이건 무슨 뜻일까요? 누구든 나를 억압하거나 노예로 만드는 대상은 ‘밖’에, 나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어떤 대상을 받아들이는 감수성, 심지어 내가 품고 있는 욕망, 내 꿈에서 나타나는 무의식까지 과연 그게 ‘나’의 것일까요? 아니면 나를 노예로 부리는 자의 것일까요? 이 구호가 던지는 물음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나의 사유, 감정, 감수성, 욕망, 무의식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노예로 만드는 자의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거기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이건 정말로 무서운 인식입니다. 68세대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정체성의 정치’에 이릅니다. 즉 ‘나를 이해하는 것이 세계를 이해는 것이다’라는 인식을 갖게 된 거지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중에서


<다섯 번째 감각> 중에서



2022년 4월 16일

영원히 마음 아플 날에, 수희로부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