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수희 Apr 27. 2022

추앙과 응원  

책 <붕대감기> /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설님, 안녕하세요.


지난 주말 동안 저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평소에는 가족이나 함께 일하는 친구 말고는 거의 사람 볼 일이 없는 생활인 저에게는 특별한 일이에요. 주말 동안 저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침 10시 반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낮 12시까지 사람들과 함께 있었으니 (잠자는 시간을 포함해서) 24시간 가까이 가족이 아닌, 늘 만나는 사람이 아닌, 대부분 낯선 사람들과 함께한 것이에요. 그러고 나니 마음이 벅차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마음 위에 얹어진 거품이(맥주의 거품 같은 거예요)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 좀 기다려 보려고 합니다.


주말에 저는 일산의 한 서점에서 글쓰기 수업이랄까, 워크숍이랄까 그런 것을 했어요. 그런 일은 용돈을 버는 일 정도 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저에게 의미 있는 것은 다른 세계를 만난다는 것이에요. 제가 속한 이 좁디 좁은 세계를 한번 벗어나보는 것. 물론 저를 기다려주는, 환대해주는 장소에 속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이 아주머니를 환대해주는 곳이 있다니, 그런 곳에 달려가는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수업이 끝나고 충동적으로 근처에 있는 편집자의 집에 가서 영화를 보고 잠까지 자고 아침까지 얻어먹고 왔습니다.(이렇게 충동적인 스케줄, 느무 좋아요!) 정말 신기한 일이지요? 편집자와 이런 관계가 되다니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뭐랄까, 어쩌면 거래처 직원의 집에서 잠을 자고 온 것과 비슷한 일일 거예요.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만나왔고, 함께 두 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는 벽이 존재하지요. 저자와 편집자라는 벽 말이에요. 그 벽을 일부러 허물어뜨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미적지근한 것을 잘 못 견디는 저로서는 그 벽이 가끔 서운할 때도 있었습니다. 설님도 아시겠지만 편집자는 정말이지 저자에게는 묘한 존재이잖아요.


원고를 쓸 때 저는, 초고는 저 자신을 위해 쓰더라도 퇴고는 편집자를 위해서 합니다. 일단 편집자에게 오케이를 받기 전까지는 그렇게 해요. 편집자가 괜찮다, 좋다고 말해주면 그제야 안도하고 독자를 생각하는 편이지요. 편집자는 제게 그런 사람입니다. 내 이야기를 처음으로 전달하는 사람. 꼭 받아들여지고 싶어지는 사람. 그리고 책을 만드는 내내 그는 제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소중히 여겨줍니다. 물론 그렇게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만, 대개는 소중히 여겨줍니다.


우리는 마치 아이를 키우는 부모처럼 한 팀이 됩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의지하고 그 사람은 제 책을 들고 세상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부가 아닌 것은, 저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에요. 그 사람의 몸뿐 아니라 마음마저도 말이에요. 그런 점에 대다수의 저자들이 혼란을 느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상처를 받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심지어 수치스럽기까지 한 이야기를 용기를 쥐어짜내 전했는데, 그 이야기를 가져간 사람들이 일견 냉담해보이기까지 한다는 사실에 말이에요.


아무튼, 이 편집자와 저는 이제 함께 책을 만들지 않아도 종종 만나 수다를 떨고, 혼자 사는 그의 집에 가서 놀기도 하고, 이번처럼 잠까지 자고 오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집은 쾌적하고 편안합니다. 30대가 된 후부터 혼자 사는 사람의 집에 가게 될 일은 흔치 않았는데요, 아주 오랜만에 혼자 사는 사람의 집에 가게 되니 그 고요함이, 차분함이, 단정함이 제게는 거의 충격적일 정도였습니다.


그의 집은 깨끗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저를 위해 요리를 해주고 커피를 내려 줍니다. 저는 소파에 뻔뻔스럽게 퍼질러 앉아,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는 저를 위해 갈아 입을 잠옷이며 수건이며 화장품까지 준비해 줍니다. 그런데 그런 배려조차 전혀 불편하지 않아서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게 마치 아버지가 된 기분 같다고 했습니다. 그 옛날의 아버지들 말이에요. 저는 아버지들이 그 포지션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건 정말 편한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밤 늦게까지 영화를 보고, 아침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그가 만들어준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했어요. 낯가림이 심하고 내향적인 두 사람이 만나기만 하면 말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정말 신기한 일이지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억지로 외향성을 쥐어짜느라 목과 어깨가 뻣뻣해지지 않는다는 것 역시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가 있습니다.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친구는 (고맙게도) 저의 독자이고, 제가 하는 수업에도 몇 번 참여했으며, 종종 그의 집에서 함께 만나 놉니다. 이번에도 함께 영화를 보면서 수다를 떨었는데요, 편집자와 친구의 관계를 보면서 아, 이런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부러운 일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설님. 저는 오늘 친구에 대해 이야기해볼 작정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윤이형의 <붕대 감기>라는 소설의 문장들을 빌려올 생각입니다. 단지 빌려오기만 하려 해요. 이 책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거든요. 물론 좋은 책이었고, 무척 좋은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작가를 알고 있어서, 제 개인적인 편견이랄까, 선입견이랄까, 그런 것을 이 책을 읽는 내내 떨쳐버리기 힘들었습니다.


아, 그것은 나쁜 편견과 선입견은 아니에요. 우리는 한때 한 공간에서 일했지만 저에게 이 작가는 뭐랄까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고,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조금은 선망하는 눈길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서는 마음이 너무나 슬펐습니다. 제가 아는 그 사람과 겹쳐져서 더 슬펐습니다.


세연은 예전부터 그랬다. 진경을 만나 즐겁게 수다를 떨고 돌아와서는 바로 그날 블로그에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멋지고, 지적이고, 재능 있고, 알고 지내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마디로 진경보다 몇 배는 훌륭한 친구들 이야기를- 열성적으로 적어 올려서 진경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곤 했다. 처음에 진경은 너무나 놀랐기에, 세연이 자신에게 무슨 이유론가 마음이 상해서 밀어내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관찰해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세연은 단지 자신이 진경을 아주 많은 순간에 몹시 외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전혀 모를 뿐이었다. 악의가 아니라면, 놀랄 만큼의 둔감함이었다. 이 모든 과정이 진경에게는 이국에서 건너온 이상한 전통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등을 바라봅니다.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등을 바라봅니다. 절대 돌아서서 마주보지 않습니다. 진경은 이 춤이 정말 싫었다. 하지만 진경이 알기로, 친구라는 듣기 좋은 이름을 한 이 춤을 가끔씩, 조금이라도 추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윤이형이라는 필명의 작가는, 저에게는 이슬 선배입니다. 이슬 선배는 작고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선배는 저와 함께 일할 때 편집기자였는데요, 저희가 원고를 쓰면 이슬 선배가 그 원고를 고쳐주고 제목을 짓고 발문이라는 것을 뽑아주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회식 자리에서 이슬 선배가 예의 그 조용하고 수줍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주었어요. “매번 수희씨의 옥고를 읽게 되어 좋습니다.” 뒤의 말은 좋다였는지 기쁘다였는지 고맙다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 뇌리에는 그 ‘수희씨의 옥고’가 그대로 박혀 버렸습니다.


그리고 칭찬을 좋아하는 수희는 ‘수희씨의 옥고’를 평생 동안 모아온 칭찬 상자에 잘 넣어 두었습니다. 수희는 용기가 모자랄 때마다 상자를 열어 그 말을 꺼내어 다시 자신에게 들려줍니다. ‘수희씨의 옥고.’ 그래서 저는 어디에선가 이슬 선배의 책을 볼 때마다 ‘수희씨의 옥고’를 생각합니다. ‘수희씨의 옥고’ ‘수희씨의 옥고’ ‘수희씨의 옥고’. 이슬 선배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주 징그러울 것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제가 이슬 선배, 아니 윤이형 작가의 책을 객관적으로 보기 힘든 거랍니다.


아무튼 편집자와 저는 아침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시며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편집자가 자신의 친구들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서로 불행 배틀을 하면서 내가 더 불행해, 아니야 내가 더 불행해, 하다가 실없는 농담에 배꼽을 잡고 웃는 그런 사이 말이에요.


저에게도 친구들이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도 있고, 그냥 가까운 친구도 있고,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늘 생각하는 친구도 있지요. 이렇게 일을 하며 만나게 된 친구도 있어요. 저는 가까운 친구들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그 중에는 제 삶을 너무나 잘 살아가는 친구도 있고요, 쟤는 저러다 어떻게 되려나 싶은 친구도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어쩐지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게 되는 친구도 있어요.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 어떤 친구들은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그들은 불행을 꽁꽁 숨겨두고 감춥니다. 부끄러운 빨랫감처럼 말이에요. 왜일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만나왔는데 그 애들은 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할까? 가끔 그들은 오래 묵힌 빨래의 구린내가 나는 집에 향기 탈취제를 잔뜩 뿌린 것처럼, 일종의 허세 같은 것으로 불행을 덮으려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오랜 시절을 만나왔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허세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고, 그래서 만날 때마다 마음이 갑갑해지곤 했습니다.


자신이 예전에 가졌던 얼굴을, 외로움을, 단단하지 못한 마음을, 세연이 혼자 오랫동안 노력해 극복했다고 생각해온 것들을, 여전히 갖고 있는 진경을 보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잊고 싶고 외면하고 싶었다. 그곳을 떠올리게 하는 진경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다른 무엇도 아닌 미움이라는 사실을, 세연은 잘 알았다.
진경은 거울일 뿐이었다. 진경을 보며 진경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을, 27년 전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 붕대를 들고 서 있던, 단지 완전히 성숙하지 못했고,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서 엉거주춤 서 있던 어린 자신을, 세연은 한없이 미워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도,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게.


생각해보면 저도 제 친구들에게 저의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애들은 저의 작은 성취에 대해 일부러 모른체하거나, 어색한 축하를 건넵니다. 저는 그 분위기가 너무나 불편해서 제 작디 작은 성취의 이면에 있는 어려움들, 불안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 머릿속은 언제나 일 생각뿐이고, 그래서 나는 어디에 가서 이 고민을 토로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함부로 재단당하지 않고, 평가당하지 않고, 제 고민과 불안과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함께 느껴줄 친구들은 저에게 없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저뿐만 아니라, 그 친구들에게도 이 관계가 그렇게 안전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 친구들 역시 자신의 불안과 아픔과 상처를 토로했을 때 쉽게 무시당하거나 재단당하거나 평가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날카로운 것이 아닐까.


허세로 자신의 처지를 덮으려는 친구를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나 역시 그 친구의 상처를 후벼팠던 것이 아닐까. 언제나 그 친구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아니, 분명히 그랬습니다. 공감보다 먼저 그 애를 한심해 했어요. 순간 순간 그런 제 마음은 그 친구에게도 보였을 겁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깨닫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완전히 인식하게 된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네요) 몸서리치게 저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아니, 저 자신에게 혐오감마저 들었습니다. 친구의 허세는 일종의 방어막이었던 것입니다. 저의 뾰족한 창을 막기 위한 허술한 방어막.


하지만 그건 피곤한 일이잖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 말이야.
글쎄, 왜 그럴까. 나도 날 모르겠어. 너는 가끔 사람들의 눈앞에서 문을 꽝꽝 소리 나게 닫아 버리잖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사람들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말이야. 그럴 때마다 말하고 싶었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좀 기다려 줄 순 없는 거니?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 다 잘못된 거야? 너는 그 사람들처럼, 나처럼 될까 봐 두려운 거지. 왜 걱정하는 거니, 너는 자유롭고, 우리처럼 되지 않을 텐데. 너는 너의 삶을 잘 살 거고 나는 너의 삶을 응원할 거고 우린 그저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인데. ……참 이상해.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관계가 끝났을 텐데, 이상하게 세연이 너한테는 모질게 대하지 못하겠더라. 이해하고 싶었어. 너의 그 단호함을. 너의 편협함까지도.


우리 사이에는 이미 그런 관계의 사슬이 단단하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공감의 대화라기보다는 자기 표현의 대화에 가깝습니다. 어딘가에서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누가 “나는 이런 것이 좋아” 라고 했을 때 “나는 그거 싫은데?” 라고 답하는 사람이라고 쓴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이입니다. 스무 살에 언제나 그렇게 말하는 친구를 보고 놀라는 동시에 긴 바늘에 찔린 것처럼 마음이 아팠는데(그때만 해도 순진했었지요…), 그러면서도 그 당당함이 부럽기도 했어요. 저는 그의 화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이렇게 희미한 내가, 아무 것도 아닌 내가 더 명확하고 근사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윤곽을 뚜렷하게 만들어나가야 했던 20대의 철부지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른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뾰족한 내가 둥글어진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왜 친구들의 걱정을 멈추지 못할까요? 제 인생도 구만리인데, 제 오지랖을 어쩌면 좋지요?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제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하면서 타인을 향한 손가락질을 그만둘 수 있을까요? 어쩌면 저는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만큼,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왜 나왔는지 알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도 그 일이 너무 괴로웠던 거겠죠!


설님. 이 글을 쓰고 났는데 마침 보고 있는 드라마에서 그런 대사가 나오더라고요.


“내가 싼 똥 누가 치워주는 게 늬들은 고맙냐?”


그 말을 한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매일 소처럼 일을 하고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방에 홀로 처박혀 술만 마십니다. 그에게 흥미를 느낀 이웃의 청년들이 그의 집에 갔다가 방 하나에 가득 쌓인 소주병들을 봅니다. 청년들은 오로지 선의로, 그 병을 치우기 시작하지요. 남자는 집에 돌아왔다가 그 꼴을 보고 화가 솟구칩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리치는 거예요. 내가 싼 똥 누가 치워주는 게 늬들은 고맙냐?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저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남자도 자기의 삶이 부끄럽습니다. 충분히 부끄럽습니다. 이건 잘못됐다고, 나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나는 망가져 버린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압니다. 그런데도 꼼짝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꼼짝도 못하고 대낮부터 방에 홀로 앉아 소주만 마실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마신 소주병을 하나하나 빈 방 안에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쩌면 저 역시 제 친구들에게, 묻지도 않고 소주병들을 치우는 그 오지라퍼들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남자에게 자신을 추앙해 달라고 한 외로운 여자가 있어요. 그 여자는 추앙이 뭐냐는 남자의 질문에 그건 전적으로 응원해주는 것, 이라고 답하지요. 그 여자는 왜 그런 남자와 엮이려 하느냐는 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잘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보내 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 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어, 우리.”  


젊은 여성들은 세연보다 훨씬 정치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친분 관계만큼이나 입장과 노선, 공유할 수 있는 목표가 중요한 것 같았다. 그 입장과 노선, 목표에 따라 인간관계가 새로운 방식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방식에 놀라움을 품고 무조건적으로 칭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수록 세연의 마음속에는 진경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왜 너일까? 세연은 곰곰이 생각했다. 왜 내가 그토록 좋아했고, 내가 아플 때 집으로 찾아와주겠다고 말해준 유일한 사람인 네가, 나는 이토록 대하기 어렵게 느껴질까? 네 안에 내가 들어 있지 않다면, 그 숱한 사람들과 내가 멀어졌듯 우리가 멀어져 마땅한 관계였다면, 나는 왜 네가 이렇게 자주 떠오를까?
세연은 진경과는 이제 더 이상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회색 노트에 둘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 넣고, 여기에 번갈아서 일기를 쓰자, 말하던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진경은 세연과 무언가 공유할 만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했을까? 그들 사이에 공통점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진경은 모두의 사랑을 받는 아이였고, 세연은 고립된 문제아였다. 그 아이는 단지 세연이 간절히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너그러움을 베풀었고, 곁에 있어준 것이었다.


주말에 편집자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저 드라마 속의 그 남자를 보고 나서 저는 나름대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껏 저는 제 걱정이 정당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제 방식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친구가 살아가는 방식을 못마땅해하고, 자기도 제대로 못 사는 주제에 자기 잣대로 남의 인생을 판결 내리는 제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끓어올랐지만, 도저히 그 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멈추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저 자신을 미워했습니다. 미워하지 않기 위해 저는 제가 정당하다고 주문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문제를 제공한 사람 중에는 나의 역할도 상당할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드라마 속의 남자를 보면서, 치를 떠는 남자를 보면서, 그 남자에 저 자신을 대입했고, 또 제 친구들을 대입해 보았습니다. 마음이, 들끓던 마음이 한순간에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응원. 그래요, 설님. 응원입니다. 친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응원입니다. 그 응원은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겁니다. 저는 이제부터 응원해 줄 겁니다. 제가 받고 싶은 응원을 친구들에게 해줄 겁니다. 그래야 할 거예요. 되든 안 되든 그렇게 해볼 겁니다. 해보려고 노력할 겁니다. 어려울 때만 친구 아니고, 못날 때도 친구가 되어줄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친구로 남을 거예요. 제일 먼저 등을 돌리는 사람이 되지 않을 거예요.


언젠가 제가 그런 일을 당했던 적이 있어서 알아요. 저는 제가 가장 못나고 가장 바닥에 있을 때, 저를 보던 제 친구의 눈빛을, 도덕적 자만심으로 가득찬 혐오스러운 눈빛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저를 만나지 말라고 했다는 그 애의 말들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잊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애를 여전히 만납니다. 그 일로 그 애를 탓하지 않습니다. 제 몸에 묻은 똥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족한 것처럼 그 애도 부족했던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렸던 거라고, 못났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친구들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좋든 싫든 20년이 넘는 세월을 만나온 친구들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어떤 이유에서건, 서로의 곁에 있어주기로 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 친구들을 아마 저는 이 생애에 다시는 얻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저는 그 관계에서 완벽함을 기대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고 관계도 완벽하지 못합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안전을, 다른 관계에서 얻는 게 낫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먼저 안전한 사람이 되어주려 해보겠습니다. 어렵지만 그렇게 해보려 하겠습니다.


친구의 고민에 입을 다물겠습니다. 자동차 대시보드 위에 올려진 강아지 인형처럼 고개만 끄덕여보겠습니다. 친구가 허세를 부려도, 헛소리를 해도 헛! 하며 그냥 애매한 표정으로 웃어보겠습니다. 뭔 말을 해도 “그렇구나.” “그랬구나” 드립을 펼쳐 보겠습니다. 친구가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져도 행운을 빌며 손을 흔들어 주겠습니다. 먼 훗날, 아니 그리 멀지도 않을 훗날 비참해질 그 애들의 모습이 떠오르면 더 비참해질 제 모습을 상상하며 혀를 깨물겠습니다. 제 친구들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보겠습니다.


아, 그런데 말이에요, 설님. 그 드라마 속의 알코올 중독자 남자는 결국 자기가 싼 똥을 자기가 치우기로 합니다. 그는 소주병들을 그러모아 고물상에 가서 팝니다. 그리고 그걸 판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서는, 소주병을 치워주려던 그 오지라퍼들에게 사과의 의미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던집니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면 그 오지라퍼들이 아니었더라면, 그 오지라퍼들이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그 남자가 그렇게 일어나서 그 소주병들을, 자기가 싼 똥들을 치울 수 있었을까요? 과연 어땠을까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2022년 4월 27일

번뇌로운 수희 드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