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설 May 05. 2022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정원가의 열두 달<카렐 차페크>

수희 님 안녕하세요.

장미의 계절이라는 5월이에요. 그러나 여기 경기도 북부는 장미가 활짝 피지는 않았어요. 여긴 대개 그렇답니다. 개나리도 진달래도 벚꽃도 느리게 느리게  찾아옵니다. 전국 팔도, 꽃이 핀 곳마다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뉴스를 보면서 혹은 너도 나도 SNS에 경쟁하듯 올리는 꽃 사진을 보면서 저의 긴 기다림이 시작되지요. 아니, 도대체  우리 동네는 언제 꽃구경을 할 수 있는 거지?

개나리가 하천변이나 골목길 담장에 서서 노란 손가락을 펼쳐 하이파이브를 청하면 올해도 꽃들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개나리의 노란색이 조금씩 바래는가 싶으면 어딘가 촌스러운 분홍색의 진달래가 피죠. 나는 올해도 절대 저걸 따서 진달래 전을 해 먹을 수 없을 거야. 꽃은 먹으라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같은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눈처럼 하얀 벚꽃이, 파스텔톤의 연분홍 벚꽃이 눈에 들어와요. 그 순간은 마치 꿈결 같아요. 바람에 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꽃잎이 얼굴 가까이로 하늘하늘 떨어지는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나 근사해서 신이 준 선물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지 싶어요. 그런 장면은  언제나 슬로 모션이지요.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인데도 제발 멈추라고 욕심을 내게 돼요. 벚꽃은 야속하게 연약합니다. 아름다운 것들은 왜 그렇게 짧게 머물다 가는 건지요. 그러나 다행히도 기다렸다는 듯 다음 꽃이 위로를 해줍니다. 땅에는 철쭉 공중에는 겹벚꽃이 황홀합니다. 이쯤 되면 지난 한 달가량을 꽃에 취해 있었다는 걸 자각하게 되더군요. 도무지 집에 있고 싶지가 않아요. 사람들은 다 같은 마음으로 어디론가 떠나고 취하는 계절이 봄인 것 같아요.


수희님 우리 동네엔 이팝나무 꽃이 한창입니다. 이 나무는 동아시아 쪽에 주로 사는 모양이에요. 영어로는 프린지 트리 (Fringe Tree)로 불린다는데 저는 영어 이름보다 이팝나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꽃송이가 사발에 소복이 담긴 이밥처럼 보인다고 이 밥 나무라고 지었고 후대에 이팝나무로 바뀌었다는 유래가 있대요. 사물의 이름을 짓는 사람들의 관찰력과 창의력이 참 기발하지요. 이름을 짓는다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이름으로 불러주는 건 참 좋은 일인 것 같아요.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요.

뜬금없지만 새우깡과 짱구와 양파링 같은 과자 이름이 생각나요,(과자를 끊은 지 오래돼서 그런가) 그 이름들은 정말 잘 지어진 이름 같아요. 입속에 넣고 씹는 순간 깡! 하고 부서지는 과자, 세상에 모든 앞짱구  뒤 짱구가 먹어야 할 것 같은 과자, 생양파를 잘라 튀겨 먹고 싶지만 그 과정이 번거로워서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나마 만족을 주는 과자, 새우깡과 짱구와 양파링 같은 과자의 이름은 맛으로 각인돼서 인지 머릿속에 자동 입력이 되는 것 같아요. 새우깡과 짱구와 양파링처럼 사람들의 이름도 자동으로 입력되면 참 좋을 텐데....  왜 기억하기 어려울까요? 그리고 왜 쉽게 잊을까요? 마음이 없어서 일까요. 아니면 기억할 것들이 너무 많아진 세상에 살아서 일까요. 이름이란 건 기억해야만 불러줄 수 있는 거잖아요. 오래 기억을 한다는 건 상대를 향한 관심이자 마음을 주었다는 표시이기도 해요. 그렇게 기억했던 이름을 꺼내어 가만히 불러주면 상대는 조용한 환대를 느끼게 되죠.

' 아. 이 사람이 나를 기억해 주는구나.' '내 이름을 잊지 않았구나.' 하면서요. 그러고는 자신이 잃어버린 오래된 이름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겠지요. 내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 이 사람처럼 나도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따뜻하게 불러 줘야지... 하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고요.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표현하다 보면 언젠가는 꽃밭처럼 환한 세상이 올 것 같아요.




수희 님도 식물과 자연을 좋아하시죠. 저도 식물을 좋아해요. 한때는 정원을 갖는  꿈이었는데 지금은  능력으로는 무리라는 생각에 포기했어요.  평의 땅도 없는 나는 작은 베란다에 정원을 만들었죠. 옴짝달싹도 하기 힘든 손바닥만  공간에 몬스테라와 안시리움과 올리브 나무를 가져다 놓았어요. 커다란 몸을 비틀어 최대한 작게 만든 다음 화분과 화분 사이에 간신히 서서 물을 주고요.   정도 공간도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은 창에   있는 난간을 사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발코니를 기어이 만들고는 미니 다육이 화분을  너개  올려 두어야 직성이 풀리겠지요. 그리고는 매일  식물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말을 겁니다. 관심이 있고 사랑하니까요. 몬스테라야. 사랑초야. 코로키아야. 루즈베고니아야. 부디 오래오래  살자..... 아픈 데는 없는지 유심히 살피고  끝이 마르지는 않는지, 새싹이 나왔는지, 목이 마르지는 않는지. 관심 있게 지켜봅니다.  관심이 있고 사랑하는 만큼  이름을 자주 불러주게 되는 거죠,  식물은 사랑을 쏟은 만큼 자랍니다. 반질반질, 향기도 뿜뿜. 점점 무성 해지는 베란다 정원을 보면서 착각을 하기 시작하죠. '...  어쩌면 전원생활에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몰라....' 죽는 식물도 살리는 금손이  날도 머지않았어. 하면서.

그렇게 시시때때로 몬스테라야~ 베고니아야 ~하고 부르다가 문득 지금은 멀어진 친구가 생각났어요. 그 친구의 이름을 매일 다정하게 불러 주었다면 어땠을까. 자스민아~ 하고 열 번 부를 때 그중 세 번 만이라도 남편~~ 하고 불러주었다면 자스민 꽃 향기보다  더 달큰한 향기를 뿜는 남자가 되었을까. 나는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일까요. 야! 이 인간! 으이그! 이 화상!  뭐 이런 식으로 만 부르고 있었던 건 아닌지. 나는 아무래도 식물 이름을 불러주는 만큼도 누군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수희 님

나는 식물을 알아가면서 나라는 사람을 확실하게  알게 됐어요. 식물을 좋아하지만 벌레가 무서운 사람이고 식물을 돌볼 때는 어쩔 수 없이 만져야 하는 흙에서 지렁이를 발견하면 조금 전까지 애지중지 하던 식물을 내던지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사람이에요. 식물을 내 공간으로 들이는 순간 식물에게 무언으로 노예계약을 하는 사람이고요. 어쩌다 식물이 죽으면 빈 화분을 쳐다보고 몇  날 며칠을 속이 상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최근에는 작은 결심을 했답니다. 지금 있는 것들만 잘 키우자. 만에 하나 얘네들이 죽으면 그다음에는 식물을 집으로 들이지 말고 차라리 남이 키운 식물을 보러 다니자고요. 계절마다 산으로 들로 찾아다니자고요, 그리고 몬스테라와 베고니아의 이름을 부르던 시간에 소중한 사람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불러보려 합니다.


수희 님의 바쁜 일상도 올리브 나무처럼 기름지고 단단하길 바랍니다.


2022.5.5

김설



이 편지는 카렐 차페크라는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책 『정원가의  열두 달』 을 읽고 썼어요. 재미있는 삽화가 그려져 있는 책인데요. 기분전환이 확실히 되었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추앙과 응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