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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Sep 01. 2021

작고 우아하고 감동적인 샤오츠

<언니들의 여행법 2> (타이난·타이중·르웨탄·타이베이·이란)



설님.


안녕하세요, 설님. 첫 편지를 쓴 지 벌써 2주가 되었네요. 우리의 편지는 각자 2주일에 한 통씩 쓰는 편지이지요. 그 2주는 짧기도 하고 길기도 했습니다. 나름 바쁘게 지냈지만 그렇다고 딱히 크게 바쁜 것도 아니고, 뭐 그냥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2주였어요. 따지고 보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아침의 2시간 남짓입니다. 그마저도 억지로 억지로 낸 시간이지요. 나름 비즈니스 우먼으로(이렇게 쓰니까 왠지 멋진 일을 하고 있는 사람 같지만 사실 장사꾼입니다.) 저녁까지 죽도록 일을 하고요, 저녁이 되면 집에 가서 밥을 차려먹고 뻗어야 합니다. 저는 저녁에는 절대로 일을 하지 않는데요, 저녁에까지 일을 하면 그나마 아이들과 함께할 몇 시간조차 없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에요.


아니, 이렇게 말하면 제가 애들을 엄청 사랑하고 애들을 위해 희생하는 엄마 같은데, 사실은 매일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입니다. 게다가 애들이랑 같이 있다고 해도 그냥 저녁이나 차려 먹고 같이 널부러져 테레비를 보거나 잔소리를 하는 것뿐입니다. 그 애들의 인생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시간 역시 소중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인간관계라는 것은, 아니 더 한국적인 표현으로 정이라는 것은, 각 잡고 앉아서 “우리 대화라는 것을 좀 해보자” 한다고 절로 솟아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하릴 없이 같이 테레비나 보면서, 발길 닿는 대로 함께 산책이나 하면서, 설거지하는 등 뒤에서 귤이나 까면서, 냉장고 앞에서 어깨를 부딪치면서, 화장실 물 또 안 내렸느냐고 욕하면서, 그러면서 간밤에 내린 눈처럼 조용히 쌓이는 것이 정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무엇보다 저는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사랑과 안정감을 주고 싶습니다. 아니, 최소한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아들의 밥을 차려준 뒤 딸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 오느라 글을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돌아오니 벌써 11시. 출근을 해야 할 시간입니다. 억울해 죽겠습니다. 저는 요즘 한 남자의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아니, 사실은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는 중이지요. 첫 번째 아내와 불가피한 이유로 헤어지고 두 번째 아내와 새로운 가정을 꾸린 남자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 속에 푹 빠져 있고 싶은데, 제게는 그럴 시간이 없어요.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이렇게 하루에 채 10분도 글을 쓸 시간을 못 내는 저를, 작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저를 작가라고 부를 때 저는 그걸 그냥 대리님, 부장님, 팀장님, 사장님 정도의 호칭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어요. 자신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작가’ 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 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생각해 보니 저는 한 번도 제 입으로 “저는 작가입니다” 라고 말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잘하는 짓인지 잘못하는 짓인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저는 이 모양 이 꼴로 살다가 죽을 거예요. 그런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그나저나 작가는 누구일까요. 작가는 소설가일까요. 등단을 해야 작가일까요. 책을 내면 다 작가일까요. 글 쓰면 다 작가지, 작가가 뭐 별 거냐 싶기도 하고요, 이렇게 작가, 작가, 하니까 작가라는 것이 왠지 술자리에 끝까지 남아 지리멸렬한 소리만 늘어놓아서 그냥 막 500cc 맥주잔으로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은, 재수도 없고 재미도 없는 대학 선배 같습니다.(몇몇 얼굴들이 떠오르네요….)


설님은 남자만 보면 때려눕히고 싶다고 하셨지요.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인간들을 볼 때마다 맥주잔으로 머리통을 후려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그런 짓을 자주 하면 안 되니까, 참고 또 참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출근 전 잠깐이라도 앉아 있자고 들른 카페의 창 너머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땡땡이를 치고 싶은 마음을 참습니다.(저는 사장이니까요…) 하루에 다섯 번 정도 남편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은 욕구를 참습니다. 저녁이면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도시로 떠나 깨끗한 호텔 방에 처박히고 싶은 욕구를 참습니다.


그렇게 참기 위해서, 책임감으로 어깨가 짓눌리다 못해 등이 굽을 지경인 저는 제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할 일들을 부지런히 합니다. 그 일들 중에는 이런 책을 읽는 일도 있어요.


설님, 이 책 읽어보셨어요? 이 책 <언니들의 여행법 2> 라는 책은 몇 년 전에 속초에 여행을 갔다가 동아서점에서 사온 책이에요. 네 명의 여자들 함께 쓴 여행기인데요, 1편은 일본 여행기이고 2편은 타이완 여행기입니다. 언니들은 서로 나이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미혼자도 있고 기혼자도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각자 알아서 잘 살다가 몇 년에 한 번씩 의기투합해 꽤 긴 여행을 함께 떠납니다.

 




그 즈음 저는 어디에선가 타이완의 찻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카페가 아니라 찻집 말이에요. 차와 샤오츠(작은 반찬 또는 요리, 식사)를 파는 고풍스러운 찻집에서 밤새 차에 물을 더하며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다는 나이든 타이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 눈에 그 풍경이 고스란히 그려졌습니다. 아아, 우아하다! 저는 정말이지, 우아한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저도 꼭 그렇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밤 늦게까지 문을 여는 찻집에 앉아서 향긋한 차를 홀짝거리며 그 우아한 사람들 속에 섞이고 싶어졌습니다. 그 중에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 룽잉타이나 쟝쉰 같은 이들이, 어쩌면 죽은 영화감독 에드워드 양이나 아직 살아 있는 허우샤오시엔 같은 이들도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곳에 있으면 팍팍했던 마음도 노곤하게 풀어질 것만 같고, 마음을 두텁게 덮은 수많은 미움도 옅어질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저 역시 우아해질 것만 같습니다. 아아, 왜 우아한 사람들은 언제나 비행기를 타고 가야만 닿을 수 있는 먼 곳에만 있는 걸까요?


타이난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샤오츠를 먹는 취미가 있습니다. 보수적인 성향의 그들은 큰 야망 없이 단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며, 맛있는 샤오츠를 먹는 여유가 있지요.


이 책을 읽은 바로 그 해의 가을에 저는 기어이 타이완으로 떠났습니다. 남들이 다 가는 타이베이와 그 주변의 유명한 관광지에는 관심도 없었어요. 타이베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책에서 극찬한 타이완 남부의 오래되고 작은 도시 타이난으로 곧장 내려가서 느긋하게 산책을 하며 보냈습니다. 노점에서 파는 버블티도 당연히 마셨고요(우롱 버블티가 아주 맛있었습니다), 오래된 과일 가게에서 망고빙수도 먹었고요, 도시 이곳저곳에 널린 미술관에도 갔습니다.





타이베이로 돌아와서는 나무로 지은 멋진 도서관에도 갔고, 오래된 골목의 근사하고 고풍스러운 찻집에서 우아한 아주머니 점원의 도움으로 맛있는 차도 마셨습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시골에 있는 위스키 양조장에도 다녀왔습니다. 아마 이 책이 아니었다면 제 여행은 좀 다른 식이었을 거예요. 좋은 가이드가 있으면 여행이 더 즐겁고 알차지는 것처럼 장소의 매력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더군요. 모든 것을 더 찬찬히, 세심히 둘러보게 되기도 했지요.


타이완은 제게 아주 따뜻한 나라였습니다. 아마도 11월의 타이완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았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낮에는 반팔을 입고 저녁이면 셔츠를 덧입는 정도의 환상적인 날씨였거든요. 사람들은 느긋하고 친절했습니다. 거리는 아기자기하게 귀여운 느낌이었지만 적당히 허술해서 마음이 편했고요. 어쩐지 비인간적이고 얄미운 면을 덜어낸 오래된 일본 도시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 라는 글자는 양으로 따지면 작고 적다는 뜻이다. 형식적으로는 간단하고 단순함을, 동작으로 따지면 재빠르다는 의미다.  가격 면에서는 부담 없이 저렴하고, 분위기 면에서는 친절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대만 샤오츠의 아름다움,  독특하게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매력은 바로   글자 속에 모두 들어 있다.







아무튼 타이완에는 꼭 다시 가고 싶습니다. 실은 몇 년 전부터 계획한 일이 있는데요, 타이완에서 2달 동안 방을 빌려 머물며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요. 제 목표는 소박합니다. 음식점에 들어가서 메뉴판을 읽고 먹고 싶은 것을 제 입으로 주문해보고 싶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낯선 도시에 머물며 장도 보고 밥도 해먹고 산책도 하고 싶습니다. 쓰다가 질릴 정도로 이야기를 열심히 써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습니다. 매일 해야 할 일이 천지인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다가도, 가당치 않을 건 또 뭔가 싶기도 합니다. 인생은 한 번 뿐이잖아요. 도가니는 점점 닳아가고 있습니다. 자다가 죽는 것이 꿈입니다.(일종의 자동완성 라임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전에 여행기를 두 편 쓴 적이 있네요. 여행기를 쓰고 나서 세상에는 여행기라면 질색, 이라거나 남이 여행한 이야기를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어요. 그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남이 여행한 이야기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아니 왜 남이 여행한 이야기가 재미가 없을까? 아직도 저는 그 사람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나는 발에 흙 한 톨 안 묻히고 남들이 개고생한 이야기를 편하게 읽을 수 있는데 이거야말로 개이득 아닌가? 싶습니다.


신기한 것은 신기한 대로 남겨두고, 저는 <언니들의 여행법 2>를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습니다. 금세 행복해졌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좋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좋은 것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좋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글이 정말로 좋기란 쉽지 않지요. 그런 글은 잘못 쓰면 두루뭉술하고 젠체하며 하품이 나오는 글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면 좋은 것을 이야기하는 좋은 글이란 대체 어떤 글일까요?


이 책의 글들은 대체로, 제가 좋아하는 타입의 글은 아닙니다. 문장은 다소 투박하고 감탄사나 부사는 지나치게 많은 감이 있습니다. 쓰고 있는 대상과의 거리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밀당 없이 남자에 푹 빠져버린 철부지 아가씨 같은 책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저는 꽤 까다로운 사람이지만, 때로는 좋은 것들을 발견하는 좋은 눈,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네 명의 여자들의 좋은 한때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여전히 재미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아는 중년 여자들의 이야기.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이 책이 좋은 이유는 그것이네요. 이 여자들의 눈이 자신의 내부만이 아닌 외부를 향해 크게 열려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으면서 내면과의 팽팽한 끈을 놓지 않는 건강한 균형감각. 그런 것이 어쩌면 좋은 것을 이야기할 때의 올바른 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면 좋겠는데.”
“어른들을 위한 곳이랄까? 취향 맞는 사람끼리 기분 좋게 한잔하면서 놀 수 있는 곳 말이야.”
“어른들의 놀이터가 진짜 필요해. 진지하고 재미있게 놀고 싶거든.”
“한풀이하듯 부어라 마셔라 시끄럽게 노는 거 말고.”






얼마 전에 틈만 나면 여행 노래를 부르는 친구에게 “너는 왜 여행을 그렇게 가고 싶어 하니? 너한테 여행은 대체 무슨 의미야?” 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친구는 “그냥 뭐 리프레시?” 하고 답하더군요. 저는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더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 말고는 없어?” 하고 묻자 친구는 조금 부끄러운 듯 “허영도 있겠지”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행을 꼭 무슨 목적을 가지고 갈 이유는 없지요. 어디어디 몇박몇일 여행, 할 때 주르르륵 나오는 일정표 같은 것들을 저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 타입입니다. 여행을 가서 제가 하는 일도 그냥 빈둥대면서 동네를 기웃대다가 카페나 술집 같은 데 앉아 죽치고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리프레시나 허영이 굳이 필요할 만큼 제 인생이 팍팍한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저는 매일 매일 그럭저럭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운이 좋은 인생이지요.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고, 크게 아픈 데도 없으며, 감당 못할 불운도 아직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는 언제나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납니다.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다녀오는 것뿐이지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 우아하지 못한 장소를 떠날 수 없음을 저는 잘 압니다. 나라는 사람 역시 이 우아하지 못한 장소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나 역시 우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아한 것들을, 재미있는 것들을, 감동적인 것들을, 아름다운 것들을, 그런 작은 것들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가져오고 싶습니다. 그것들로 제가 속한 이 장소를 그런 곳으로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변치 않고 지켜오고 있는 꿈입니다.


제 친구는 아마도 이런 저를 느끼하거나 재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뭐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요.


2021년 9월 1일

수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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