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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Sep 07. 2021

명작 만화 비빔툰

시시한 일상이 가르쳐 주는 것








수희님


안녕하세요. 지금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무겁게 가라앉은 월요일 오후입니다. 오늘 같은 날씨야말로 방구석에 틀어박혀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꿈꾸기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는 언제부턴가 비행기를 타는 일보다 티브이로 세계 테마 기행을 보는 게 훨씬 좋아졌어요. 그래서인지 지난번 수희님의 책 편지를 받고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 여행책이네?? 어떡하지.." 싶었거든요,

이쯤에서 대뜸 낯간지러운 고백을 하자면, 저는 여행과 관련된 책이라고는 수희님이 쓴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과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을 읽었을 뿐이에요. 그  책을 읽기 전에는 여행과 문학을 한데 섞어 놓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가 관심 밖의 일이기도 했고요. 먹고살기도 힘들고 사는 게 팍팍해 죽겠는데 팔자 좋게 무슨 여행 타령이냐고 여행을 가자는 친구들에게 대놓고 신경질을 부렸죠. 그때 진상을 부려서인지 지금은 함께 여행을 가자는 친구가 없어요. 그런데 그런 친구가 없어진 게 섭섭하기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커요. 어지간히 움직이기 싫은 가 봐요. 너처럼 살다가는 폐인 되기 십상이라며,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일단 짐부터 꾸리라고 닦달을 하면 마지못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멀리는 못 가고 가까운 야외로 나가서 체크무늬 돗자리를 깔고 김밥이라도 먹을까? "




여행을 피크닉으로 바꾸는 저의 방식에 이골이 난 친구들은 아우~ 지겨워! 하면서도 순순히 받아 줍니다. 주차가 편하고 돗자리를 깔기 좋으며 적당히 그늘지고 캔맥주를 마시고 얼굴이 벌게지더라도 남의 눈치가 보이지 않고 한없이 늘어져 있어도 불편하지 않을 곳을 물색하느라 갑자기 바빠집니다. 저는 아니고 친구들이요. 아마 두 군데 정도로 장소가 좁혀질 때쯤 일 거예요. 어디선가 느닷없이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그 모습이 불길하고 심상치 않아서 부랴부랴 일기예보를 찾아봅니다. 물론 친구들이 아니고 제가요. 그럼 대부분 강수 확률 70% 아니면 80% 로 적혀 있곤 했어요. 모처럼 먹은 마음은 늘 그렇게 접히고 말지만 제 입꼬리는 살짝 올라갑니다. 배시시. 매우 안타까운 감정을 실어서 날씨 소식을 전하면 친구들은 이미 어디론가 흩어지고 없습니다.





왜 그렇게 여행을 싫어하냐고요? 저도 그 이유를 생각해 봤어요.(가까스로 찾은 이유가 너무 하찮아서 말하기 좀 그렇지만) 아마도  여행을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이 귀찮은 게 아닌가 싶어요. 게다가 여행지를 돌아다니며 얻는 즐거움보다 피곤함이 더 큽니다. 사람들은 떠나기 전의 준비 과정이 여행의 백미라고들 하는데 저는 그 과정을 누군가가 완벽히 준비해주면 좋겠어요. 그러면 마지못해 따라갈까 말까 하는데요. 정작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남이 고생해서 찾아준 숙소와 일정 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 말은 못 하고 찜찜한 기분으로 자고 먹고 돌아다니다 보면 언제나 후회가 뒤따라 옵니다. 저는 여행을 하면서 항상 생각합니다. 나라는 인간이 나조차도 이렇게 피곤한데  내버릴 수도 없는 짐덩이 같은 인간과 함께 여행을 온 이들은 얼마나 피곤할까 싶은 거죠. 그러면 다시는 여행 같은 건 오지 말자 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럼 혼자 가면 된다고요? 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나 혼자 여행은 여행의 고수들이나 하는 짓이거든요, 게다가 그러기엔 또 겁이 많아요. 어쨌거나 저의 여행 패턴은 조바심과 게으름 사이를 오락가락하거나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그게 못나 보이고 부끄럽습니다,










<언니들의 여행법>은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었습니다. 책 속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훑어보다가 괜히 읽었다는 생각이 점점 짙어졌습니다. 그야말로 낭패였어요. 대만에 가려면 왕복 항공료가 얼마인지 검색을 해보았을 정도입니다, 저는 보기보다 먹는 것에 관심이 없어요. 남들은 무지 잘 먹게 생겼다는데 천만에요. 사실은 빵 쪼가리 외엔 당기는 음식도 별로 없어요. 한우의 마블링을 보고 침을 삼키는 사람들을 이해 못하고요. 오히려 배부르고 나른한 상태가 되면 몹시 피로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말이죠. 책에 소개된 다양한 샤오츠는 저를 감동시키지 못했지만 저의 눈길을 끄는 장소는 있었습니다. 바로 숲 속의 베이터우 도서관입니다. 아름다운 도서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졌어요.




"저긴 죽기 전에 가야만 해.."



얼마 전 제 인생에서 여간해서는 일어나기 힘든 대사건이 일어났어요, 제 책 <오늘도 나는 너의 눈치를 살핀다>가 번역되어 대만의 어느 서점에 꽂혀 있게 되었거든요. 어느 서점에 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어서 여러 군데를 돌아다녀야겠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죠. 그러나 그 이유 하나만으로 대만에 가기에는 좀 멋쩍었는데 이 참에 베이터우 도서관까지 들렀다오면 꽤 만족스러운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입니다. 여행 앞에서는 항상 변덕이 죽 끓듯 하니까요. 아무튼 < 언니들의 여행법>에서 귀엽고 오종종한 대만을 발견해서 좋았습니다.






베이터우 도서관


관광지 문창 원구 서점











수희님 저는 요즘 에세이를 쓰는데요. 써놓은 글을 읽으니까 역시나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이처럼 하찮은 글을 누가 읽어줄까 싶고 심지어는 내가 여행을 하지 않아서, 여행지에서의 체험과 경험이 없어서  남에게 보여주기 곤란한 글만 쓰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말하길 여행 전의 시간과 돌아온 시간이 다르고 떠나기 전의 나와 돌아온 후의 내가 다르다는데 내 글이 문학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가? 붙박이처럼 한 곳에 머무는 이 몹쓸 버릇을 어떻게 뜯어고쳐야 하나, 뭐, 이런 생각을 이틀 정도 했어요.

그리고 또 몇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무슨 글을 이렇게 잘나게 쓰셨을까 싶은 책들이었어요. 하나같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 어른의 글이라고 할까요.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우향우 자세로  한쪽만 바라보고 있더군요. 페미니즘, 빈부격차, 부동산 같은 거요, 네, 압니다, 현재로서 그것들은 매우 중대한 사안이고 마음 깊이 새겨 넣어야 한다는 것을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이야기들은 내 창작 욕구를 꺾어버리고 맙니다. 조금은 심각하고 현실적인 주제로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아도 이 모양입니다. 억지로 써봤자 이상한 글이 완성됩니다. 재미 대가리가 없어서 북북 찢고 싶은 글이요.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요. 그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 다른 훌륭한 작가들이 잘 써주고 있으니까요. 나는 그저 그들의 신념과 의지가 오랫동안 변치 않기만 바라면 되니까요 그리고는 단호히 뒤돌아 앉아 적당히 미지근하고 시지도 달지도 짜지도 않은 이야기를 쓰기로 합니다. 부담도 없고 조금은 하찮고 시시콜콜한 이야기,  양은 냄비에 끓인 맵고 뜨거운 라면을 먹다 문득, 머리가 큰 자식이 독립을 한다며 짐을 꾸려 집을 나가는 뒷모습을 볼 때 문득문득 생각이 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시시한 일상과 사람들의 시시한 일상이 교차하는 순간을 쓰고 싶습니다. 홍성우 작가의 만화 비빔툰은 그런 면에서 명작입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로리타를 읽을 시간에 비빔툰을 읽어야 합니다. 내가 만화를 그릴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2021.9.6

김설



ps: 홍성우 작가의 또 하나의 걸작 야야툰을 아직 읽지 못했네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대단하다고 하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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