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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Sep 15. 2021

호구의 기쁨

무라카미 하루키 <어둠의 저편>

여행을 싫어하시는 설님께


안녕하세요, 설님.


아이고 2주가 이렇게 빨리 지나가 버리다니요. 처음에는 '2주에 한 통씩'이라는 텀이 좀 길지 않나 싶었는데요, 쓰고 받고 쓰고 받기를 반복하다 보니 2주라는 기간은 기다림의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만큼의, 딱 좋은 간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잊을 만할 때 도착한 편지에 제 이름이 처음으로 박혀 있을 때, 짜릿한 행복이 차오릅니다. 그러고 보면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지요. 그래서 답장은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하는 것이 좋습니다. 상대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리기 전에요.


문득 대학 시절, 군대에 간 남자친구의 편지를 기다리며 매일 집 앞 우편함을 뒤적이던 마음이 떠오르네요. 우편함 안에 흰 봉투가 들어 있으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지요. 그 편지가 아니었더라면 그 남자아이와 저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한 채 완벽한 타인으로 살아갔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애가 좀 더 자주 편지를 써주기를 바랐어요. 인간적으로 2주에 한 통 정도는 써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 애는 3주나, 한두 달에 한 통 정도의 편지만 썼지요. 저는 그 애를 좋아했다 미워했다 그리워했다 원망했다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관계는 오직 그 편지 속에 존재했던 것 같아요. 정작 그 애가 제대를 하고 더 이상 편지를 쓸 이유가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좋아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상의 연애를 현실의 연애로 가져오는 일을, 그 어린 나이의 저는 할 줄 몰랐거든요. 그것을 배우게 된 것은 결혼을 한 후, 그리고 10여년간의 고통스럽고 행복하고 또 고통스러운 긴 시간을 거치고 난 후입니다.


간혹 그런 생각을 해요. 만약 대학 시절의 그 남자친구와 오래 만나서 결혼을 하거나 그랬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저는 그 아이를 무척 좋아했고 어떤 면에서 우리는 잘 맞는 짝이었지만, 우리는 너무나 미숙했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의 저는 저 하나조차 감당 못하는 철부지였기 때문에 타인을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저는 그 애가 쓴 편지들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답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버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제 제 인생에서 그런 연애편지를 받는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텐데요. 아무튼, 연애편지건 뭐건 간에 편지를 쓰는 일은, 편지를 받는 일은 너무나 기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나이에도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설님, 여행을 싫어하시는 설님. 언젠가부터 여행을 싫어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실은 여행이라는 자리에 아보카도나 커피나 고수나 비행기 같은 것을 넣어도 좋을지 몰라요.(저는 커피는 좋아하고 아보카도와 고수와 비행기는 싫습니다.) 그런 것으로 은근히 타인을 깔아뭉개거나, 자격지심을 느끼는 멍청한 짓은 안 하고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굳이 여행을 좋아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답니까. 사실 집이 제일 좋지요. 여행 후에 집에 돌아올 때마다, ‘아, 집이 최고다’ 는 생각이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정말로 저는, 집에서 잘 살기 위해서 잠깐 나갔다 오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틈만 나면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데, 그 이유는 집이 싫어서가 아니라 집에 가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만 없으면 저도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 그런데 설님. 애석하게도 저는 만화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순해요. 글과 그림을 함께 읽는 게 피곤해서입니다. 글을 읽을 때는 글만, 그림을 볼 때는 그림만 보고 싶어요. 그런 이유로 어릴 때부터 만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만화는 정말 몇 편 안 되는데요,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만화를 꼽으라면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을 꼽겠습니다. 스티븐 킹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이 만화는 사실 내용 때문에 좋아하는 것으로(소년들! 모험! 스티븐 킹! 초자연적 현상! 세계를 구하자!), 만화가 아닌 소설이었다면 더 좋아했을지도 몰라요.


저는 어릴 때부터 소녀물보다는 소년물을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여자들의 이야기보다는 남자들의 이야기에 더 끌려요. 여자들의 이야기 중에서 좋아하는 것은 박완서나 앨리스 먼로의 이야기 정도인 것 같습니다. 매정할 정도로 날카롭고 공정한 시선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실 저는 여자고 남자고 구분하지 않고, 그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할 뿐이에요.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책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을 가지고 왔습니다. 설님, 이 책 읽어보셨어요? 이 책은 제가 정말 정말 세상에서 가장 가장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경장편입니다. 음, 저는 다른 사람들은 왜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지 몰라요. 사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알고 싶지도 않다’는 설님의 표현을 따라써보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안 써본 표현이에요.흐흐.)


이를테면 말이에요, 저는 정말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골방에서 키워온 그 사랑과 친밀감과 집착에 가까운 감정을, 수많은 타인과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이 우주에서 그 사람을 좋아하는 유일한 사람이고 싶어요. 오만하지요. 그렇지만 누구에게 해를 끼치는 오만함도 아니니까 그냥 이렇게 살려고요.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라디오헤드의 콘서트는 그런 마음 때문에 안 가겠지만, 스티비 원더의 콘서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마도 라디오헤드의 음악들에는 내면의 깊은 곳에서 이어지는 어둡고 따뜻한 친밀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고, 스티비 원더의 음악은 온 지구와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즐기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무라카미 하루키씨에게도 저는 그런 마음을 느낍니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 이어지는 어둡고 따뜻한 친밀감. 그런 마음 때문에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아무런 동질감도, 연대감도, 심지어 반가움마저도 느끼지 않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쓴 책도 읽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만의 무라카미 하루키씨가 있듯이, 저에게도 저만의 무라카미 하루키씨가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각자의 통로를 통해 자기만의 우물 속 깊은 곳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씨를 만납니다.


이 책 <어둠의 저편>은 도쿄의 하룻밤에 관한 이야기예요. 데니스라는 24시간 영업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밤새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는 젊은 여자가 있습니다.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까 싶은 이 여자의 이름은 마리입니다. 마리에게 한 청년이 다가옵니다. 청년은 트롬본을 부는 다카하시로, 다카하시는 마리의 언니 에리를 압니다. 진지한 아웃사이더인 마리와 화려한 미녀에 인사이더인 에리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자매이지요. 그리고 넉살 좋은 다카하시는 마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다가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마리는 다카하시의 소개로 레스토랑까지 찾아온 러브호텔 지배인 카오루라는 여자를 따라가서, 손님에게 잔인하게 얻어맞고 옷이며 소지품을 모두 빼앗긴 채 겁에 질린 중국인 매춘부를 도와주게 되지요. 여기에 중국인 매춘부에게 폭력을 가한 남자 시라가와의 이야기가 겹칩니다. 또, 2달째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 마리의 언니 에리의 이야기도 등장하지요.


이렇게 쓰니 복잡할 것 같지만, 우리의 무라카미 하루키씨는 뛰어난 작가입니다. 뛰어난 작가는 제가 좋아하는 박학다식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씨에 의하면, 설명을 잘합니다. 학창시절의 설명을 잘했던 선생님들을 떠올려 보시면 될 겁니다. 설명을 잘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천천히, 차근차근, 쉬운 말로 시작해서 어려운 곳까지 함께 걸어갑니다. 그 결과 듣는 사람이 이전까지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었던 높이와 깊이의 장소로 그를 데리고 가지요.


이 책 <어둠의 저편>에는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어요. 너무나 좋아하는 포인트가 많아서 대체 어디를 골라야 할지 모를 정도예요. 저는 우선 이 이야기 속의 사람들이 좋습니다. 고집스러우면서도 올곧은 소녀가 좋습니다. 건들거리지만 착한 청년이 좋습니다. 거칠어 보이지만 굳센 러브호텔의 여지배인이 좋고요.


무엇보다 저는 이 책의 대화들이 까무러칠 정도로 좋습니다. 가볍고도 심오하고,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이 대화들에는 무언가를 가르치려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담겨 있어요. 그런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저는 이 책을 다섯 번은 읽은 것 같은데요, 마리와 다카하시, 그리고 마리와 카오루, 마리와 러브호텔 종업원 고무기와 고오로기의 대화를 읽을 때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그 대화는 뭐 이런 식이지요.


“하지만 그런 골치 아픈 일은, 평상시에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라고 다카하시가 말한다. “일일이 생각해 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오늘에서 내일로, 극히 평범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야.”
“많이 걷고, 천천히 물을 마시면 좋다는, 그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라고 다카하시는 말한다. “천천히 걷고 물을 많이 마신다는 거야.”


그리고 또 이 이야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씨의 이야기가 늘 그렇듯이 다층적입니다. 우선 하드보일드가 있습니다. 어둠과 폭력과 피와 비밀 같은 것들. 동시에 매력적인 인물들이 나누는 기분 좋은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또 세계의 깊숙한 곳에 있는 초현실의 세계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 세 개의 세계가 얽히고 설키는 동시에  등장인물들은 세 개의 세계를 넘나들지요.


그러니까 저는 살아가는 것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세계에는 분명히 어둠이 존재합니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디디면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제게도 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단단해 보였던 땅이 아래로 쑥 꺼지며 내 삶을 집어삼킬 것 같은 공포감 때문에 잠을 못 이룰 때도 많지요. 사는 건 정말 어렵습니다. 그리고 두렵기도 해요.


"마리 짱. 우리가 서 있는 땅이란 건, 탄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소한 일 하나에도 ‘꽝’하고 저 밑창까지 꺼져버리거든. 그리고 한 번 꺼지고 나면, 그걸로 끝장이야. 두 번 다시 본래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지. 그 후엔 꺼져버린 땅 밑의 어두컴컴한 세계에서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럼에도 우리는 건전하고 재미있고 다정하고 심오한 표면의 세계가 지닌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언젠가 거대한 싱크홀에 홀랑 빠져버린다고 해도, 그 안에서 깊은 상흔을 입어 불구가 된다고 해도, 그 전까지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고 가벼운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며 마음의 근육을 단단히 다져놓고 싶어요. 어찌 됐든 죽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싱크홀에서 기어나와야 하니까 말이에요. 그런 것들을 저는 이 이야기에서 발견합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단순히 밝은가, 어두운가 하는 것으로 쉽게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 어둠과 밝음 사이에는 그늘이라는 중간지대가 있잖아. 그 그늘의 단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건전한 지성이야. 그리고 건전한 지성을 획득하려면, 그 나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어? 나는 마리가 성격적으로 별로 어둡지 않다고 생각해.”


동시에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간절한 메시지가 제 마음을 울립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씨는 언제나 역사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써왔지요. 그러나 그는 그것을 무지막지하고 계몽적인 방식으로 전면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는 열심히 터널을 통과한 사람들만이 찾아낼 수 있는 작은 열쇠 같은 것을 숨겨둡니다. 찾을 테면 한번 찾아보세요. 문을 열고 열지 않고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의 느낌으로 말이에요.


제가 느끼기에는 이렇습니다. 그는 일본인으로서 자신이 중국, 중국을 비롯한 주변의 국가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의 아버지가 참전군인이었고,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고, 평생 집안 한구석에 만든 불단에 대고 그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을 그는 여러 번 밝혔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자신은 평생 중국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도요.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일본인의 마음 속에 숨은 악의 씨앗, 그리고 우리 인간 존재의 마음 속에 숨은 악의 씨앗에 대해서 그는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고 발현될 날들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아마 자기 안에도 그것이 숨어 있다는 사실에 그는 오싹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그는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끈질기게 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이 작가를 존경해 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지, 몇 차례 재판소를 다니며 재판을 방청하는 동안에, 거기서 심판을 받고 있는 사건과, 그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일에, 이상하게도 흥미를 갖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점점 남의 일처럼 생각되지 않게 됐거든. 정말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 ‘거기서 옳고 그른 것을 심판받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하고는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나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하고, 나와는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사는 세계와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사이에는, 아주 확실한 높은 벽이 있다.’ 처음 얼마 동안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중략)

그런데 재판소에 다니면서, 관계자의 증언을 듣고, 검사의 논고나 변호사의 변론을 들으며, 범죄자의 진술을 듣는 동안에, 아무래도 자신을 가질 수가 없게 됐어. 다시 말해서, 뭔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거든. 그들과 나라고 하는 두 세계를 갈라놓고 있는 벽이란 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벽이 있다 해도, 종이를 겹겹이 붙여 만든, 허술한 ‘하리포데’라고나 할까, 그런 얇은 벽인지도 모른다. 몸을 슬쩍 기대는 순간 뚫려나가서, 벽의 반대편으로 쓰러져버릴지 모를 그런 벽이라고 할까. 우리 자신의 내부에 ‘저쪽 세계’가 이미 몰래 숨어 들어와 있는데도,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말이지.”

(중략)

“예를 들면 그렇지, 문어 같은 거야. 깊은 해저에 사는 거대한 문어. 우람한 생명력을 가지고, 여러 개의 긴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어두운 바다 속 어딘가를 향해 헤쳐나가는. 나는 재판을 방청하면서, 그런 생물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놈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해. 국가라는 형태를 취할 때도 있고, 법률이라는 형태를 취할 때도 있지. 더욱 복잡하고 성가신 형태를 취할 때도 있어. 잘라내도 잘라내도 계속 다리가 생겨나는 거야. 아무도 그놈을 죽이지 못해. 너무도 강하고, 너무도 깊은 곳에 살고 있으니까.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어. 그때 내가 느낀 건 일종의 엄청난 공포야. 아무리 멀리 도망친다 해도, 그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 같은 것. 그놈은 말이야, 내가 나이고, 네가 너라는 것 따위는, 눈곱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아. 그놈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이름을 상실하고, 얼굴을 상실하고 마는 거지. ‘사건 번호 제 몇 호 피고인’이라는 단지 하나의 번호가 되어버리는 거야.”


저는 이 작가가 언제나 ‘인간이라는 것은 어떠한 존재인가’ 를 밝히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쓰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그리고 몇 번을 이야기했듯이, 제가 좋아하는 작가와 동시대에 살아 숨쉬며,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일은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아무쪼록 우리의 무라카미 하루키씨가 오래 오래 살아서, 계속해서 재미있고 심오한 이야기를 써주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나 또, 이 작가의 책들은 언제 다시 읽어도 새롭기 때문에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기도 해요. 아무튼 저처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이 이토록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또 기쁠 따름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작 티셔츠 이야기로 가득 찬 시시껄렁한 책을 사는 데에도 기꺼이 지갑을 여는 것입니다.


이렇게 호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도 기쁜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팬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도망칠 수 없다”라고, 다카하시는 그 초승달을 올려다보며 소리 내어 말해 본다.
그 말의 수수께끼 같은 울림은, 하나의 은유로서 그의 내부에 머물게 된다. 도망칠 수 없다. 너는 잊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않는다, 라고 전화를 걸어왔던 남자는 말했다. 그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그 메시지는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한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휴대전화는 그 편의점 선반 위에서 몸체를 조용히 숨기고 있다가, 다카하시가 그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하고 다카하시는 생각한다. 우리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그들은 대체 무엇을 잊지 않겠다는 것인가?



2021년 9월 15일

수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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