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설 Sep 23. 2021

나를 두드리는 겐지 상

나는 길들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수희님

눈 깜짝할 사이에 추석 연휴가 사라졌네요. 분명히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지난 며칠 동안 저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 팔은 길게 뻗고 한 팔은 니은 자 형태를 하고 하늘로 날아가는 아톰의 모습을 자주 떠올렸습니다. 정확하게는 불이 뿜어져 나오는 아톰의 발을 생각했다고 해야겠네요. 제 발에 성냥의 대가리를 갖다 대고 그으면 불이 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나이가 들고 가장 먼저 피곤해지는 신체 부위가 발입니다. 15시간을 잔 뒤 아침에 일어났더니 뜨겁던 발은 완전히 식었지만 이젠 엉덩이에 불이 붙었습니다. 수희님께 책 편지를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리하여 대뜸 고백합니다. 이 편지는 글쓰기의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해 알려준 어떤 작가에 관해 써놓은 글의 일부를 가져와 슬쩍 끼워 놓았다는 사실을요. 이럴 때는 골방 같은데 쌓아둔 빛바랜 글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약간의 가공과 편집을 거쳐 편지를 완성해 보려는 얕은 술수입니다.









기꺼이 하루키의 호구가 되었다는 수희 님의 편지를 읽고 저는 자연스럽게 마루야겐지를 떠올렸습니다. 시시콜콜한 내용의 글을 읽는 일이 즐겁고 그런 글을 쓰는 것이  인생 최종 목표지만 좋아하는 작가는 시시콜콜한 글로 한정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다양합니다. 문체가 좋아서, 내용이 흥미로워서, 배울 점이 많아서, 더러운 소재여서, 매번 나를 놀라게  줘서, 마음의  곳을 메워줘서, 나를 울려서, 고통을 떠올리게 해서, 나를 웃게 해서,

작가를 좋아하는 수많은 이유 중 저를 가장 매혹하는 건 바로 이겁니다.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보이지 않을 것들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어서, 저에게 마루야마 겐지는 바로 그런 작가입니다. 물속에 가라앉은 것들을 수면 위로 퍼올리는 사람. 수희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이유로 저는 마루야마의 겐지의 호구가 된 것이지요.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표적이 될 만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용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의 선호로 먹고사는 사람인 작가의 경우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니까요. 브런치에 글 몇 편을 올리면서도 이런저런 눈치를 보느라 바쁜 저로서는 마루야마 겐지의 용기가 대단해 보일 밖에요. 사람들의 이목은 끌면서 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는 쪽으로 제 마음이 흘러갑니다. 악성 댓글이 달리고 내 글이 실린 공간이 시끌벅적해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나와 내 글이 망가지는 게 겁이 나서 과할 정도의 자체 검열을 하게 됩니다. 이런 내용을 써도 될까?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닐까.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의 용기 없음과 지질함이 미치도록 싫어집니다. 반면에 마루야마 겐지는 대책 없이 솔직한 자신의 글로 욕을 먹을게 분명한 걸 알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을 만드는 게 다름 아닌 자신의 책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으로는 하기 힘든 일입니다. 사회가 정하는 규범 안에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공공의 적이 된 사람을 우리는 적지 않게 보았잖아요?











수희님 저는 오늘 수희 님이 절대 읽어보셨을 리 없는 책, 마루야마 겐지의 <나는 길들지 않는다>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저는 잠시 수희 님이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제가 좋아하는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공통점을 찾는데 몰두했습니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공통된 세계 안에서 타인과는 다른 모습을 파악하고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말을 찾아 글로 옮기는 사람들이라는 작가로서 뻔한 공통점 말고도 하루키와 겐지는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하고 특별한 이야기를 써나갑니다. 누가 읽어도 하루키의 글, 누가 봐도 마루야마 겐지가 쓴 글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고유의 소중한 자산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공통점으로는 자진해서 고립과 단절을 추구한 작가들이라는 것입니다. 특정한 누군가, 문단의 선배나 인맥보다는 불특정 다수인 독자와의 사이에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를 구축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의미 있는 공통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루야마 겐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서술한 내용입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래서 어쩌라고? 니 똥 굵다! 싶기도 할 거예요. 어느 모로 보나 옳은 사회적 규율에는 순순히 따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묵살하거나 거절하기를 서슴지 않고 일본의 역사나 문화나 습관 그 밖에 잡다한 불문율에 얌전히 따르는 법이 없으며 일본인 특유의 고분고분함 하고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일본 문학계에서 왕따를 당하는 이야기와 심지어 휴일이나 공휴일도 자신이 정해서 쉬고 딱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 없으면 투표에 나서지도 낳는다는 것. 일생 중에 딱 한 번 투표를 한 적이 있는데 투표를 하고 나서 사람 보는 눈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는 더욱 투표에 관심이 없어졌다는 이야기. 읽다 보면 여러모로 재미있는 사람이네?  하지만 역시 잘난 척 대마왕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마루야마 겐지는 자식을 낳을 만큼 이 세상이 좋은지 의심하는 마음이 젊을 때부터 있었다고 해요. 나는 이 부분에서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자식을 낳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는 헛소리를 들으면 내가 자식을 낳아 기르며 했던 마음고생이 떠오르거든요. 아이를 낳지 말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싶지만 그런 오지랖을 떨었다가는 대한민국에서 추방당하는 처지가 될 것 같아서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저는 결국 마루야마 겐지 같은 용기가 없었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으며 추진력과 결단력까지 겸비한 남자와 결혼을 하지 못한 탓에 결국 딸아이 하나를 낳았습니다.


인간이 인간인 한 아무리 시대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달하고 의식이 변한다 해도 태어나기를 잘했다. 낳아준 부모에게 감사하고 싶다고 할만한 세상은 오지 않는다. 순간적으로는 몰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세상이 변하는 일은 어지간히 축복받은 이상론자와 낙천가의 뇌 속이 아니고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달랐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도 반대인 경우가 많았지만 저는 마루야마 겐지처럼 속시원히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을 때마다 오히려 나는 남몰래 죄의식을 키워왔습니다. 전부 다 내가 잘못 성장한 탓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천편일률적으로 그렇게 배웠고 학교에서도 도덕이라는 것은 무조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잖아요. 갈팡질팡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삶이었어요. 남들의 손가락질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고 눈앞의 펼쳐진 길이 고난의 길인 줄 알면서 기꺼이 그 길을 나서고 가장 먼저 깃발을 꽂을 용기가 없는 나에게 마루야마 겐지는 믿을만한 선구자로 보였습니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격스럽더군요.










< 나는 길들지 않는다>를 읽으면 마루야마 겐지는 꽤 냉혈한 인간으로 느껴집니다. 저는 그때마다 그에게 가까이 가서 더 세심히 들여다봤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얼마나 자신만의 확실한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어요. 저도 마루야마 겐지가 지닌 단단한 기준을 갖고 싶지만 그건 과욕에 가까운 바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뒤죽박죽 섞여있는 모순 투성이인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갈 운명이라면 살아가기 위한 분명한 의미를 찾아야 하고 삶에 끝없이 도전해야 한다고,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못하겠는 것이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진정 자립한 인간으로 살아가라고요. 마루야마 겐지의 책은 그렇게 늘 질문하고 저를 다그치고 나무랍니다. 언제까지 고분고분하게 살 거냐고요. 잠들어 있는 너의 능력은 돌아보지 않고 언제까지 평화로운 교류만 하면서 안온함만을 추구할 거냐고.

저는 대부분 항복합니다. 인생을 완전히 다른 기류로 바꾸기에는 나이가 들었다는 핑계로 계속 이렇게 살겠다고요. 죽을 때가 되면 아. 이번 생은 망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망해버린 이번 생과는 조금 다른 괜찮은 인간으로 살겠다고 아쉬운 소리도 해봅니다, 나이가 들면 그렇게 조용히 회한에 젖은 채 세상과 이별을 하려고 했더니 마루야마 겐지가 그런 내 계획을 무섭게 꾸짖습니다. 너에게 주어진 삶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이대로 죽어갈 목숨이 아니라고요.

그럼 이제 와서 어쩌라고요? 하고 묻게 됩니다. 하지만 마루야마 겐지는 딱 거기까지, 자신이 해줄 말은 여기까지라고 냉정하게 못 박아 버립니다. 그리고 저를 다시 어지럽게 흔듭니다. 평온하고 무사함만을 추구하고 도전이라는 것을 무모함이라는 관념 안에 가두고 얌전히 삶과 사회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잘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로 저를 헷갈리게 만듭니다. 아... 진짜... 답이 없습니다. 결국 어떤 생각으로 삶을 꾸려갈지 선택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는 겁니다. 마침내 책을 덮을때 쯤이면 커다란 질문 하나가 눈앞에 떠오릅니다. 반들반들하게 길들여진 사람으로 살 것인가. 끝까지 삶에 반기를 들고 도전하는 삶을 살다가 죽을 것인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천재가 있답니다. 잠깐의 노력으로 큰 성과를 내는 그야말로 타고난 천재와 그저 성실한 천재. 글 쓰는 사람 중에도 천재는 존재하겠죠? 잠깐 쓴 글로 베스트셀러를 내는 천재는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저로서는 도무지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라 부럽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습니다. 저는 타고난 천재도 아니고 성실하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재미있는 글을 쓰겠다는 꿈을 품고 삽니다.

수희님 저는 요즘 무척 글을 쓰고 싶습니다.(이 문장에 당황하시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요)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당장은 쓸 수 없는 상태입니다. 나는 쓰는 사람이다 라는 태도만 유지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좋은 타이밍이 오면 글을 쓸 수 있도록 늘 시동을 켜놓고는 있습니다. 시동을 켜 놓고 있는 것이 바로 마루야마 겐지가 말한 도전이 아닐까 생각하면서요. 하지만 평소에는 그저 시시콜콜한 글을 즐겁게 끄적이며 꽤 괜찮은 글을 쓰는 작가 코스프레로 지금의 기분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다 보니 유유자적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 시간 동안 남들이 도약하고 성공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야 하거든요. 자꾸만 나만 뒤쳐지는 기분이 듭니다. 그럴 때 실망한 나머지 스스로 무대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생각을 하며 저를 믿어주려고 합니다. 언젠가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웃음이 빵빵 터지는 글을 쓸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거죠. 그러면서 이런 생각들을 합니다.

나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계속 돌아보는 거예요. 어쩌다 50이 넘어서 책을 낸 건 지, 어쩌다 초저녁 잠이 많아진 건지? 어쩌다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은 늙은 여자가 된 건지, 어쩌다 글이란 걸 쓰게 된 건지. 계속해서 읽고 생각하고 읽고 씁니다. 쉽게 멈출 수가 없어요.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 걸 아니까요.



2021.9.23


김설




ps: 편지의 마지막엔 마루야마 겐지의 말을 붙여 놓았습니다. 읽을수록 참 멋진 할아버지가 아닌가 싶네요.




절박한 벼랑 끝에서 타인의 소설을 놓고 이렇다 저렇다 할 처지가 아님에도 젊은 신인의 작품을 폄하하지 않으면 관록을 드러내지 못하는 소설가. 시간이 지나도 자신의 출세작을 물로 희석한 작품밖에 쓰지 못하고 문학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세상을 향해 일류 문화인인 양 어필하는 소설가.

지금은 그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을 부정할 수 없는 노벨상에 기사회생의 희망을 거는 소설가.

나는 과거에 이런 소설가를 몇 명이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학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 만큼 한심한 예술이 아닙니다. 그들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 강경함을 품은 문학의 광맥을 조금이라도 파헤치고 싶은 일념으로 그들과는 정반대의 자세로 내 소설을 써왔습니다.

소설가가 소설 집필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 최소한의 상식이 이상적이거나 금욕적으로 보인다면 당신이 진짜 노리는 것은 소설이 아닌 것에 있으므로 펜을 들기 전에 이렇게 자문하십시오. 정말 소설을 쓰고 싶은가. 하고. 나는 청빈함과 고고함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독선과 자승자박의 길을 달려 자멸로 향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후세에 남을 환경을 만들려는 것도 고루한 정신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점차 야심이 번들거리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기존의 문학에 염증을 느껴 떠난 독자를 다시 불러 모으고 질이 안 좋다며 소설에 등을 돌린 독자를 이끌어 오고 싶은 그런 야망이 내 안에서 뭉게뭉게 고개를 쳐들고 있습니다.


마루야마 겐지





















































매거진의 이전글 호구의 기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