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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Sep 29. 2021

칭찬을 좋아하는 한수희

우치다 타츠루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설님께


설님. 안녕하세요.


설님의 편지 꼭꼭 씹듯이 잘 읽었습니다. 저는 원래 뭘 하든 초반에는 긴장이나 흥분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아니, 사람이 다 그런가요? 아무튼 이 편지를 처음 쓰기 시작할 때도 너무 긴장하고, 아니 긴장보다는, 흥분을 해버려서 이 서신 교환의 목적을 살짝 잊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에서야 듭니다. 설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곱씹고 그것에 대해 마치 대화를 하듯이 자연스럽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대신, 그저 제 이야기만 줄창 해버렸다는 말씀이지요.


저는 이제야 살짝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설님의 편지를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습니다. 그 안에서 설님이 저에게 절실하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찾아보려 노력해 보았어요. 음, 저는 머리가 나쁘고 뭐든 오래 걸리는 타입이라 그게 뭔지 당장은 말씀드리지 못하겠지만 편지를 써나가면서 차차 밝혀보기로 하겠습니다.


설님이 좋아하시는 마루야마 겐지의 책은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몇 권 읽어보았습니다. 제가 처음 읽은 책은 아마도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였던 것 같아요. 제목부터 무시무시한 이 책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구절은, 한적한 시골에서 살려면 강도에 대비해서 무기를 준비해 둬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냥 칼 같은 걸로도 안 되고 긴 막대의 끝에 칼을 매달아서 창처럼 만들면 강도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공격을 할 수 있어 좋다는, 뭐 그런 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해서 아 진짜 이 영감탱이 웃기다, 며 낄낄거리다가 내가 시골에 가서 살면 꼭 긴 막대 끝에 칼을 매달아서 문 옆에 놔둬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마루야마 겐지 할아버지의 말씀이 구구절절 옳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아이를 낳아봤자 좋을 일이 없는 세상이라는 말에 동의하고요,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거나,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같은 말도 죄다 약해 빠진 인간의 사후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압니다.(제가 잘하는 짓…….) 아이가 있어도 어리석은 사람들이 수도 없고, 아이가 없어도 어른스러운 사람들도 많습니다. 만약 이런 문제를 이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면 저는 당연히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큰일이건 이성적으로 선택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큰일은 무조건, 감정적으로 선택합니다. 인생의 행로를 결정하거나, 이사를 결정하거나, 결혼을 결정하거나, 내가 낳은 아이의 운명 같은 큰일은 제가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운명이 우리를 어떤 곳으로 내동댕이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그러므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는 최대한 합리적인 노력을 기울이되,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은 그저 넋을 놓고 지냅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요. 아니, 실은 머리가 나빠서 큰 일에 대해서는 상상하는 걸 잘 못해서일지도 몰라요. 아무튼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못하겠는 것이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진정 자립한 인간으로 살아가라.’ 이 말에 백배공감합니다. 저는 제 인생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두 번은, 못하겠네요. 정말이지 못하겠어요.


요즘은 ‘할머니’가 유행이지요. 여기도 저기도 할머니입니다. 할머니 좋지요. 그러나 저는 ‘멋진 할머니’ 라는 것은 왠지 좀 오글거려서요, 멋진 자신에게 도취된 것 같다고나 할까요. 음, 저는 왜 이렇게 삐딱할까요. 우리 엄마는 젊은데다 키도 크고 날씬했어요. 게다가 1980년대에도 티셔츠에 꼭 끼는 청바지를 입고 다녀서(거의 모든 아주머니들이 몸뻬바지를 입던 시절...) 학교에 가면 애들이 다들 “우와, 니네 엄마 진짜 멋있다” 고 했었는데요, 정작 저는 집에서 마구 저를 윽박지르던 엄마가 전화만 오면 고상한 목소리로 “여보세요~?”라고 할 때마다 소름이 끼치곤 했어요.


저는 엄마를 정말 사랑했지만 동시에 정말 미워했었어요. 아마 그때부터였던 게 아닐까 싶어요. 겉모습에 속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 된 것은요. 부단히 노력할 일이 전혀 아닙니다만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네요. 아무튼, 이제는 여자들에게도 자기만의 역사가, 이야기가 필요해서 할머니를 불러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뭐 할머니도 좋지만, 그보다는 멋진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상류층보다 중산층이 많은 것이 더 건강한 사회 구조인 것처럼요. 50대인데도 30대 같은 연예인들 말고, 그냥 꼬장꼬장하고 유머러스한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제가 바로 아주머니네요. 좀 더 막 살아야겠어요. 꼬장꼬장하고 유머러스하게.


설님. 지난번 편지에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호구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작가로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가장 좋아한다면 아저씨로서는 우치다 타츠루라는 사람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거 너무 일본 사람만 좋아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뭐 어쩔 수가 없네요.


우리 나라에도 재미있는 아저씨들이 몇 명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보릿고개와 새마을운동과 민주화운동을 거친 아저씨들은 제 눈에는 조금 근엄하거든요. 저는 근엄하기보다는 헐렁헐렁한 아저씨들이 더 좋습니다. 일본의 아저씨 세대는 아무래도 호시절에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라, 나사가 하나쯤 빠진 듯 헐렁헐렁한 느낌이 있지요. 한국에서는 그런 아저씨들을 별로 본 적이 없이 없는 것 같아서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설님. 아마 이 책은 안 읽어보셨겠지요? 우치다 타츠루의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는 어른이 되는 일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저는 우치다 선생님의 책을 거의 모두 다 가지고 있는데다(번역된 저서의 수만 해도 엄청납니다) 읽다 보면 ‘응? 이건 지난번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아니, 이건 지난번에도 한 얘긴데?’ 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속은 기분 따위는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남몰래 설레어 하며 ‘아, 역시 나는 우치다 선생님의 찐팬이야’ 하고 즐거워 하고 있거든요.


오늘 저는 이 책을 훑어보다가 <상찬과 아량>이라는 글에 마음이 멈췄습니다. 아, 정말 너무 좋아요, 우치다 선생님!


잠을 잘 잔다.
어제는 오전 10시에 일어나서 멍하게 있다 합기도 시간이 되어서 점심때부터 4시까지 수련하거나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더니 이미 6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메일을 확인하고 답장을 쓰자 이미 7시. 허겁지겁 목욕을 하고 맥주를 마시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던 중 눈꺼풀이 무거워져 침대로 파고든 것이 10시 반. 결국 원고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책 한 쪽도 읽지 못한 채 귀중한 휴일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떴더니 오전 10시.
10시 취침 10시 기상으로는 하루가 12시간밖에 없다. 이래서야 학자라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다.
그 증거로 일불철학회에서 <프랑스 철학 사상 연구>를 보내줘서 그 책을 읽는데, 어려운 내용이 잔뜩 쓰여 있어서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단, 변명을 하자면 나의 이해력이 저조한 데는 거기에 쓰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내 인생이 극적으로 유쾌해진다거나 하는 일을 기대할 수 없는 탓도 있다.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기>


그렇지요? 우치다 타츠루는 마루야마 겐지와 같은 듯 다른 사람입니다. 꼬장꼬장, 제멋대로라는 점에서는 같고요, 하지만 슬렁슬렁, 헐렁헐렁하다는 점에서는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우치다 선생님은 마치 술에 절어 비틀거리는 딸기코 주정뱅이 노인처럼 보이나 알고 보면 취권의 달인인 무림의 고수처럼, 슬렁슬렁 헐렁헐렁 농담 따먹기나 하는 듯하면서 어렵고 깊고 중요한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우치다 선생님의 스승은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입니다.(저도 잘 모릅니다...) 우치다 선생님은 제자가 스승의 방대하고 깊은 사상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그저 그 지성 앞에서 납작 엎드린 채 배우고 또 배우는 것이야말로 제자가 할 일이라고 이야기해요. 저도 우치다 선생님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무엇을 알려주는지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치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늘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언제나 즐겁고 기쁜 마음입니다. 그것이 제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같은 글에 또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 옮겨 옵니다. 서평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문득 마음에 와 닿네요. 이렇게 선생님의 책들에는 오랜만에 들춰봐도 여지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평을 쓸 때는 ‘그 책이 지닌 가장 풍성한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나의 방침이다. ‘가장 풍성한 가능성’에 관한 논의는 쓰는 나도 유쾌하며, 무엇보다 그 서평을 읽을 저자가 ‘알아주는 독자가 있어서 기쁘다’며 거듭 기운을 낸다. 결과적으로 앞으로 더욱 풍성한 지적 생산물을 누릴 수 있게 되어 이득을 보는 것은 우리 독자들이다. 저자가 ‘이 무슨 어리석은 서평인가’ 하고 맥이 탁 풀려서 지적 생산에 대한 의욕을 잃음으로써 우리가 얻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 듯한데 헐뜯기는 간단하고 칭찬하기는 어렵다.
헐뜯을 때 우리는 아무리 주관적인 논거로 자기 의견을 전개해도 전혀 상관없다. 애초에 상대를 설득할 마음 따윈 없기 때문이다. 비판받은 상대가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어. 어디에 주목한 거야”라며 거세게 화를 내도, 처음부터 ‘상대를 격노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에’ 쓴 글이므로 이미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험담할 때는 대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필요치 않다. 하지만 칭찬할 때는 대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라고 적어도 필자에게 인정받는 것)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쨌거나 칭찬하는’ 자세를 취한다. 내 경험상 ‘잘 몰라도 칭찬함’으로써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확실히 깊어지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지만 이해하고 싶은 대상’에 대해서는 ‘어쨌거나 칭찬하는’ 자세를 비평의 기본으로 삼는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준 분은 교육철학의 석학인 S토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어리석은 우치다가 햇병아리였던 시절, 나의 역서에 대해 ‘절찬의 편지’를 보내주신 분이다. 그 정중한 글귀와 한문이 섞인 찬사는 젊은 연구자에 대해서는 거의 이례적인 것이어서 나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뒤 일로 인한 괴로움에 부닥칠 때마다 S토 선생님의 편지를 꺼내어 “우치다 선생의 천마가 하늘을 달리는 듯한 달의의 명문을 접하고……” 등의 부분을 핥듯이 되풀이해서 읽었다. 30대, 40대의 내 일을 지탱해준 것은 새로운 논문을 보내드릴 때마다 꼬박꼬박 답장으로 도착하는 S토 선생님의 ‘칭찬의 말’ 이었다.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기>


설님. 저는 요즘 칭찬의 말을 마음에 새기기로 마음을 좀 바꿨습니다. 저는 원래 부정적이고 비관적입니다. 그래서 첫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 기대치도 못하게 사랑을 받았을 때, 사실은 그 칭찬의 말들을 흘려 들었던 것 같아요. ‘그냥 뭐,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인가 보지.’ 라고 생각했었어요.


저는 언제나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자존감이 낮은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지요. 그것은 타고난 것이기도 하고, 아주 어릴 때부터 저에게 과한 것을 요구했던 엄마 때문이기도 해요. 엄마는 요즘도 제게 그렇게 말합니다. “미안해. 엄마가 몰랐어.” 내년이면 마흔다섯이 되는 딸은 웃고 맙니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자존감이 낮으니 사랑과 관심과 칭찬을 갈구하면서도 그것들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실은 아무도 저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칭찬을 들어도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휘둘리지 않으려고, 평정심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 우뚝 서야 하지, 남들에게 의존해서는 도무지 답이 없다고 믿었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마루야마 겐지와 비슷한 사람이네요.


그런데 얼마 전에 <숲속의 자본주의자>라는 책을 읽고(앗, 오늘은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 책인데 왜 갑자기.....)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즈음 이런 저런 고민이 정말 많았고 자신감도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설님의 글쓰지 않는 상태의 괴로움 같은 것을 저도 느끼고 있었어요.


물론 설님이 그러하시듯이, 저 역시 글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책이 나오지 않고 책을 많이 썼지만 딱히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비슷한 분야의 작가들이 설님의 말씀대로 도약하는 것을 볼 때, 제 마음도 쓰렸습니다. 이런 상태를 어떻게 견뎌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요.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제가 쓴 책들에 자신이 없다는 점이었어요. 화려한 문장을 쓰는 작가들, 상을 받고 온갖 곳에서 다 칭찬을 받고 어쩐지 진짜 작가란 저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상해 보이는 이미지를 가진 작가들을 볼 때마다 제 책을 다 불태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부터 제 책을 읽지 않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숲속의 자본주의자>라는 책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 기대에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혼자만의 힘으로 우뚝 서는 일은 종교인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평범한 인간인 우리는 타인의 칭찬을 원동력 삼아 살아가야 한다. 대신 그 타인은 내가 신뢰하는, 나에게 소중한 타인들이어야 한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구절을 읽고 나니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저는 별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저를 칭찬해주고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의 진심을 의심했지요. 이럴 수가. 저는 얼마나 오만한 머저리인가요.


그 후로 저는 마음껏, 칭찬이라는 디저트를 흡입하고 있습니다. 제 단점은 제가 가장 잘 알지요. 단점들과 싸우며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때는 그 다디단 디저트를 하나씩 까먹으며 마음을 달래고 당을 쭉 올려줍니다. 제 책도 다시 읽어봤습니다. 지난밤 술에 취해 거리에서 난동을 부린 제 모습을 CCTV로 확인하는 심정으로요.  음, 다행히 나쁘지 않았습니다.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좋아하는 타입의 글이어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요즘 저는 제가 신뢰하는 이들의 귀하디 귀한 칭찬들을 우치다 선생님처럼 꺼내어 읽으며, ‘그래! 수희야! 할 수 있어! 해보는 거야!’ 하고 내적으로 외쳐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명랑만화의 주인공, 아니 주인공의 동네에 있는 이상한 아주머니의 역할로 살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설님. 저는 남 못지 않게 비관적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저는 비관적이기 때문에 즐겁게 살기 위해 더 노력합니다. 지구에서의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보란 듯이 신 나게 사는 것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매일 매순간 즐겁고 신 날 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저는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지옥 같을 때는 ‘오늘 점심엔 뭘 먹을까?’ 하고 궁리하고, 식후에는 맛있는 디저트를 먹고, 검색창에 ‘한수희’라는 단어를 검색하며 칭찬의 말을 기다립니다. 누가 좋지 않은 평을 쓴 것을 보면 순간적으로 긴 바늘로 가슴을 콕 하고 찔린 것처럼 괴롭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고, 절 욕하는 사람(아니 저라는 사람을 욕할 정도로 한가하고 부지런한 사람)은 유재석의 안티팬보다 적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착한 회사 동료들과 함께 아이고 죽겠네, 어쩌네 하면서 일을 하고, 단순작업을 할 때는 <갯마을 차차차>를 보면서 낄낄대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느긋하게 산책을 합니다. 이렇게 무의미하고 대수롭지 않은 하루하루를 가능한 한 오래 보내는 것, 그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정말로 충분합니다.


9월 29일

어리석은 수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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