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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Oct 05. 2021

없으면 아쉬운 것

서머싯 몸의 과자와 맥주




수희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저는 노트북의 화면을 백지로 만들어 놓고

"너는 어떤 편지를 쓰려고 해?"

"너는 왜 쓰려고 해?" 하고 묻습니다. 첫 문장을 쓰기 전에 의식처럼 곱씹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잘 쓸까 라는 익숙한 질문은 내려놓고 내가 왜 글을 쓰려는 지만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하면 편지의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다듬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인사를 건넵니다.


수희 ! 누구나 그럴 거예요.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긴장이나 흥분을 많이 하는  당연한  아닐까요? 흥분을 해버려서 서신 교환의 목적을 잊어버린  같다는 말씀과 살짝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는 말씀에 어이쿠 ~하면서 심장이 (쿵이 아닙니다) 내려앉았습니다. 서신 교환이라는 우리 둘만의 행위에 저는 여전히 흥분 상태인 것만 같거든요.  아니겠어요?


이 편지 교환은 그저 수희님에 대한 사랑과 동경만으로 시작한 일이에요. 나의 한계를 알지 못한 채 하고 싶은 마음이 흘러넘쳐 시작했으나 수희님이 능숙해지도록 나 혼자 여전히 서툴고 쩔쩔매는 상태인 겁니다. 남들 앞에 선보여야 할 때면 늘 자신감이 없지만 결과물이 어떻든 그만둘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해요. 써놓은 편지가 마음에 들지 않고 더 나아져야 한다는 강박에 갇히면 어느 순간 서신 교환도 노동으로 느껴질지도 몰라요.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저도 수희님처럼 흥분을 가라앉혀야 할 텐데...  편지의 맨 끝에 날짜를 적을 때면 내가 쓴 편지를 못 믿겠어서 조금 무섭습니다.


서신 교환의 상대는 서로가 서로를 선택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내가 영향을 줄 거라는 전제 자체가 큰 착각인 줄 알거든요. 또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아니까요. 그래서 저는 점점 더 겸손해집니다. 책이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요? 내가 수희 님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있는 힘을 쥐어짜 쓴 나의 책이 있었기 때문에 수희 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린 책으로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책 편지를 쓰게 된 것이 아닐까요?

나로서는 이미 읽은 책이라서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남은 놀라게 만드는 책을 소개하고 싶다거나 이런 책은 도대체 어디서 발견한 건지, 발견했다는 사실  그 자체로도 놀라게 만들고 싶다. 나는 웃지 않으면서 이 편지를 읽는 사람은 웃게 만들고 싶다. 그런 소망에서 시작된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며칠 전 수희 님의 답장을 받은 저에게 "설 쌤은 참 좋으시겠다. "라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앞으로 저는 그 댓글을 읽었던 날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나은 편지를 쓰기 위해 나의 마음과 몸상태를 최고로 끌어올려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많이 오버스럽지요? 그만큼 즐거움을 주는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크고 브런치에 공개하기로 한 이상 사람들에게도 숨어 있어서 조금 안타까운 책, 다시 읽고 싶어지는 재미있는 책을 발굴해 보여주고 싶어요.




수희 님


우치다 타츠루의 책은 저도 몇 권 읽었습니다.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어떤 글이 살아남는가><곤란한 성숙><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를 읽었는데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는 읽어보지 못했어요. 사실 우치다 타츠루의 책을 처음 읽게 된 것도 수희 님의 블로그의 글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저는 그때 책을 읽고 수희 님이 우치다 타츠루 아저씨에게 느낀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조금 어렵다 싶었거든요.

안타깝게도 저는 헐렁헐렁한 사람들의 매력을 알아보는 눈이 없어요. 처음부터 없었는지 살아가면서 서서히 없어졌는지 모르겠어요. 아저씨들에게 약간의 귀여움이 있는 걸 아는데 그것보다는 다른 모습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를테면 저를 조금씩 돌게 만든다는 거예요. 소위 빡친다고 하죠. 아저씨들은 아줌마들의 사랑과 헌신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삶을 복합적으로, 여러 각도로 들여다보며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도무지 모른다는 점도 속이 터집니다. 그래서인지 아저씨들은 어떤 확신에 차 있는 것 같아요. 그 이유가 정말 새마을 운동 때문일까요? 민주화 운동을 거쳐서 일까요?  뭐 그런가 보죠. 앞으로 우치다 타츠루의 책은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거나 바라보고 있으면 속에서 천불이 나는 아저씨 말고 간혹은 귀엽고 어쩌다 깊은 이야기도 할 줄 아는 아저씨가 많이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런 아저씨를 책에서 말고 실제로도 만나 보고 싶네요. 저는 53년을 사는 동안 딱 한 명을 만나봤어요. 운이 좋았죠.(아련)


다나베 세이코의 책 <남아있는 날들의 일기>에는 그녀의 남편이 등장하는데요. 저는 그녀의 남편이 하나님이 대해 한 농담이 꽤 인상적이었어요. 그 사람이 제가 좋아하는 부류의 아저씨가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해 봅니다. 남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 속에는 빠지지 않고 유머가 있는 아저씨.


"하나님은 빈정대는 걸 좋아하고 속이 시커먼 데다가 어떻게 하면 인간이 곤경에 빠질까 궁리만 한다고, 덫을 치고 사람이 그곳에 빠지면 박장대소하며 좋아해"










수희님

이 책 읽어보셨어요? 서머싯 몸의 과자와 맥주라는 소설 말입니다.

보통 책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시선이 달라졌다거나 사유의 폭이 넓어졌다는 둥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죠. 책을 통해 배우는 건 대체로 귀중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뿐이고 특별히 인격이 훌륭해진 것도 아니잖아요?  과자와 맥주도 그런 소설이에요. 이 소설은 그냥 웃깁니다. 계속 낄낄낄낄 대면서 책장을 넘기게 돼요. 제목처럼 과자와 맥주를 함께 먹는 기분이에요.

나를 감싸는 분위기가 가볍고 어쩐지 조금 느슨한 기분이 들고 한 잔의 맥주로 약간 몽롱해진 상태에서 속에 담아둔 진실을 씹던 껌을 뱉듯 툭 내뱉는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그 진심이 너무나 진심이라서 놀라게 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과자와 맥주에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여자 로지가 있습니다. 꽤 유명한 작가의 젊은 부인이에요. 사람들은 출신이 천박하다고 그녀를 무시해요. 로지는 거리낌 없는 사람이라서 무시를 당해도 상처 받지 않아요. 남자관계가 복잡한데 동시에 삼다리를 걸쳐도 죄책감이라는 게 없죠. 재미있는 건 로지 같은 사람들은 대체로 쾌활하고 부지런하다는 거예요. 남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을 정해놓지 않아요. 무슨 일을 하든 이득과 손해를 먼저 계산하지 않고요. 수많은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불륜이 그다지 부끄럽지 않고 남자들이 주는 비싼 선물도 마다하는 법이 없고 언제나 놀랍도록 태평하고요. 뒤가 구린 건 도무지 없는 여자예요. 뻔뻔하고 천하태평한 천성을 지닌 여자인 거죠, 없어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없으면 어쩐지 조금 허전하고 인생의 재미가 10%쯤 빠진 것 같은 과자와 맥주 같은 여자가 바로 로지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저는 몹시도 로지가 부럽더군요, 툭하면 허무 같은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 쓸데없이 진지하고 참지 말아야 할 때 잘 참아서 가끔 미련하다는 말을 듣고 이상한 지점에서는 낙천적이라서 지인들을 걱정시키고 가망도 없는 일에 목숨 걸 듯 달려들기도 하는 나 같은 사람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구나 싶어요. 로지에 비하면 인생의 참맛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인 거죠.


저는 천성은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받아들이고 적당히 조화를 꾀하면서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남의 천성을 발견하고도 마찬가지예요. "저건 어쩔 수 없어.""절대 바뀌지 않아."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참견으로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을 타고난 성격을 지적하거나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고치려고 하는 건 시간을 길바닥에 버리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나조차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일 지 알 수가 없잖아요, 아침에 생각한 일이 저녁이면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바뀌어 있어서 스스로가 놀라울 지경이거든요. 타인의 천성을 발견하는 순간은 보통 이런 때입니다. 그 사람의 성격과 나의 성격이 정면으로 부딪혔을 때. 그때야말로 내가 나를 가장 잘 알게 되는 순간인 겁니다. 나도 모르는 나의 천성을 발견하는 순간이고 더러운 성질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해요. 나는 가장 멀고도 가까운 사람에게서 천성이라는 것의 순짐무구함과 확실성과 끈질김을 보곤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 중에 30년을 동안 이기지 못하는 술에 덤비는 사람이 었어요. 지금껏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요즘도 가끔 과음한 날 새벽이면 화장실과 베란다를 구분하지 못하고 만행을 저지른다고 합니다. 자신이 고주망태가 되면 얼마니 끔찍하고 예의 없는 인간이 되는지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여주면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고 후회의 빛이 역력하지만 그때뿐이라고 해요. 그 사람과 결혼한 여자는 결혼 이후로 줄곧 주량을 조금만 줄여서 맨 정신으로 들어오는 날이 많아지기를 바랐지만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술 앞에서는 실크 리본이 스르르 풀리듯 이성의 끈이 풀어지고 마는 거죠. 술에 대한 욕구가 그를 무능하고 한심한 사람으로 만드는 건데 그 천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게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이고 하루아침에 그가 바뀐다면 그날부터 그는 그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뭐 어쩌겠어요.

어떤 사람이 치명적인 실수를 할 때 나는 그 모습을 통해 나를 발견합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나로 보일 때도 있어요. 그래서 이것 하나만 생각합니다. 얕보지 말자. 내가 누군가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같은 건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리자 하고요. 그리고는 단순히 외칩니다. 아... 천하태평하게 살고 싶다!!



2021.10.5


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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