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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Oct 15. 2021

삶을 향해, 언제나 삶을 향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에이미와 이저벨>

설님, 답장이 늦었습니다. 연이은 연휴로 회사일이 밀릴 대로 밀린데다, 개인적인 일정이 겹쳐 눈 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일만 하는 매일의 연속이었습니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주말엔 절대 일하지 않으니까요.)


어제도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와서 밥하고(밥하는 건 일종의 취미생활입니다. 하지만 저보다 밥을 잘하는 사람이 집에 있었다면 지금처럼 열심히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나마 우리 집에서는 내가 제일 나으니 그냥 합니다) 빨래 돌리고 글쓰기 클래스의 줌 수업을 하고 이제 씻고 누워야지 하는데, 딸내미가 엄마 나 영어 공부 도와줘, 해서 에이구 에이구 하며 도와주고 나서는 씻고 기절.


얼마 전에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동생 부부가 놀러왔어요. 걔들이 아이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응 그래그래 낳지 말고 너희끼리 편하고 재미있게 살다가 나중에 유산이 코딱지만큼이라도 있으면 조카들에게 좀 물려주고 그러렴, 하고 말해줬습니다. 아이가 없는 외삼촌과 외숙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이라니 정말 낭만적이잖아요. 왠지 안 받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받으면 나이쓰! 하고 외칠 것 같은 인생의 보너스 느낌일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꾸역꾸역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요. 요즘 집에서 짬짬이 <아이야 천천히 오렴>이라는 룽잉타이의 책을 읽고 있는데요, 하루는 그녀의 집에 예전부터 멋졌던 미혼의 친구가 찾아와 어린 아이들을 키우느라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하루 종일 절절매는 룽잉타이를 불쌍한 듯 바라봅니다. 아이가 있어서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친구에게 지친 룽잉타이는 이렇게 말해요. 그렇기는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마루야마 겐지 할아버지가 들으면 곡괭이라도 휘두를 것 같지만요.) 남에게는 딱히 권하고 싶지 않지만 저에게는 좋은 일이었다고요. 아니, 좋다 싫다 나쁘다로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요. 그리고 인생에는 좋다 싫다 나쁘다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복잡미묘한 것들을, 그 모순들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소개해주신 <과자와 맥주>는 제목부터 정말 마음에 드네요. 저도 서머셋 모옴을 좋아합니다. 딱히 문학소녀가 아니던 시절에도 <달과 6펜스>는 무언가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읽었지요. 그보다는 못했지만 <면도날>도 재미있었고요. <과자와 맥주>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설님. 이 책 아직 안 읽어보셨다고 하셨지요? 이번 에 이야기할 책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에이미와 이저벨>입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책은 <올리브 키터리지>가 가장 유명하지요. 저도 그 책을 정말 좋아합니다만, 그보다 앞서 쓴 <에이미와 이저벨>을 조금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공부하듯이 이 책을 잠깐 다시 펼쳤다가 놓지 못하고 이틀 동안 다시 몰입해서 읽다가 결국 끝까지 다 읽어버렸고, 마지막 단락에서는 역시나 울컥해서 울어버렸습니다.


에이미와 이저벨은 모녀관계입니다. 미혼모인 이저벨은 연고도 없는 작은 도시로 흘러들어와 공장에서 비서로 일하며 홀로 딸 에이미를 키웠습니다. 딸은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고, 여름방학 동안 엄마의 공장에서 단순 사무직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이미의 탐스러운 금발 머리는 꼴사납게 싹둑 잘려 있지요.


이저벨은 한마디로 꽉 막힌 여자입니다. 두려움이 많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늘 기도를 하고, 읽는 책이라곤 <리더스 다이제스트>뿐이지요. 그리고 유부남인 공장장을 짝사랑합니다. 에이미는, 똑똑한 에이미는 그런 엄마를 역겨워합니다. 아니 그러면서도 에이미는 가슴 아플 정도로 엄마를 사랑합니다. 그것은 이저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에이미를 두려워하면서도 이 세상 누구보다 에이미를 사랑하지요.


그녀는 엄마를 사랑했다. 그들을 연결하는 검은 선을 타고 맹렬한 사랑의 공이 빛을 번쩍이며 엄마에게 날아갔지만, 엄마는 이제 자리로 돌아가 타자기에 종이를 끼우고 있었다. 그 순간 에이미는 희한하게 생긴 엄마의 기다란 목과 거기 들러붙은 젖은 머리카락이 끔찍이 싫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싫은 느낌은 오히려 애달픈 사랑을 키우는 것 같았고 검은 선은 그 무게로 바르르 떨렸다.


그런데 에이미의 머리가 쥐에게 파먹힌 듯 잘린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얌전하고 외로운 모범생이던 에이미는 수학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매일 수업이 끝나면 교실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그러다가 수학 선생님이 차로 에이미를 집까지 데려다주기 시작했고, 결국 차 안에서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해버렸고, 급기야 그 광경을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장장에게 들켜버린 것이었습니다.


짝사랑하는 공장장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이저벨은 눈이 뒤집혀 가위를 들고 딸의 머리를 잘라버립니다. 그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습니다. 그럼에도 에이미와 이저벨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지금껏 이 세상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기에 그들은 너무나 강렬하게 묶여 있고, 서로를 너무나 연민합니다.


하지만 에이미는 겨울 햇빛을 받으며 도넛을 즐기는 이 순간이, 유리창에 뿌연 김이 서리고 공기중에 커피 냄새가 떠도는 이 순간이 마냥 행복했다. 엄마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갈매기가 날아가는 모양처럼 엄마의 양미간에 항상 자리잡고 있던 주름도 지금은 펴져 있었고, 에이미가 도넛을 하나 더 먹고 싶다고 하자 허락도 해주었다.
“우유도 좀 마셔.” 이자벨이 잔소리를 했다. “도넛 두 개는 지방이 너무 많잖아.”
그들은 말없이 먹으면서 커피숍 안을 둘러보았고 커다란 유리창으로 메인 스트리트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에이미가 리오 커피숍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 오면 자신도 평범한 아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평범하게 느껴졌다. 토요일 오후에 놀러 나온 엄마와 딸처럼. 에이미는 시어스 카탈로그에 나오는 여자아이가 된 것 같았다.
(중략)
그들이 A&P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무렵에는 그 기분이 벌써 희미해지고 있었고 그 순간도 사라져버렸다. 에이미는 그 순간이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우유로 가득한 뱃속에서 도넛 두 개가 불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에이미는 마음이 무거워지고, 마음속 물살이 방향을 바꾸는 익숙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리를 건너는데 햇빛이 한낮의 발랄한 노란색에서 이른 저녁의 황금색으로 변하는 듯 보였다. 금빛 햇살이 그윽하고 애잔하게 강둑에 부딪히면서 에이미의 가슴속에 숨겨진 갈망을, 기쁨을 갈구하는 그 열망을 끌어내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이저벨의 기분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늘 그랬는데 단순히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니다. 맙소사, 이런 기분을 알 것이다. A&P로 차를 몰 때는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었을 때처럼 차분하고 기분이 좋지만, 다시 주차장을 가로지를 때는 끌어안고 있던 식료품 봉지 냄새에 봄 향기가 뒤섞여 가슴속의 욕망을 긁어댄다. 그래서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기분이 완전히 싱숭생숭해지는 것이다. 솔직히 지쳤다. 하느님이 곁에 있다는 희망을 느끼는, 그래서 가슴이 벅차 뭔가 터져나올 것 같고 뭔가 확장되는 느낌에 휩싸이는 그 모든 순간에도 불구하고, 분노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순간들 또한 이저벨은 경험했다.
이를테면 에이미의 더러운 빨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저벨은 화가 치밀었는데, 그 순간 이 아이를 키우는 단순한 일이 그녀가 방금 하려던 일보다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이저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로 힘들었던 시절은 이제 다 지나가지 않았나? 왜 그녀는 양육이라는 줄타기에서 때때로 헛발을 짚는 것 같을까?


<에이미와 이저벨>을 읽을 때마다 저는 저의 엄마를 떠올립니다. 에이미의 마음, 엄마를 너무나 강렬히 원하면서도 실제의 엄마에 진저리를 치고마는 그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합니다. 동시에 저에게도 딸이 있습니다. 이저벨의 점점 자라는 딸에 대한 사랑과 죄책감을 거리감과 두려움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공장에서의 뜨겁고 괴로운 여름날이 흘러갑니다. 이저벨은 여전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어색해하고 에이미는 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공장의 여자들은, 이 활기차고 넉넉한 여자들은 이저벨과 에이미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안습니다. 결국 이저벨은 어쩌다가 곤경에 처한 동료를 자기 집 거실에서 재우게 되는데요, 이것은 이저벨의 인생에서는 처음 일어나는 일입니다. 에이미와 이저벨의 삶과 관계가 조금씩,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도 바로 이때부터이지요.


책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제각기 삶에 대한 두려움, 내가 잘못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독극물 같은 기운을 내뿜던 여름은 지나가고 구원처럼 가을과 겨울은 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상처를 주고 운명은 여러 가지 수류탄을 던져대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웃고 울고 싸우고 위로하고 아프고 죽어가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말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다. 이저벨은 함께 달리는 이 순간을, 노란 잎들을, 가을의 황금빛을 기억할 것이다. 에이버리 클라크가 어항의 책상에 앉은 채 심장마비로 죽고 나서 한참 뒤, 바버라 롤리가 지역 드러그스토어에서 십사 달러어치의 화장품을 훔치다 붙잡히고 한참 뒤, 월리 브라운이 도티에게 돌아오고 여러 해가 지난 뒤 어느 시점에 이저벨이 그 친절한 약사와 결혼했을 때, 그녀는 에이미와 함께 달리던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녀에게 그날은 끝없이 이어지던 에이미의 외로운 유년기와 무더운 날이 이어지던 지독한 여름이 비로소 끝난 날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끝이 없을 것 같던 그 모든 것이 그제야 끝나고, 앞으로 다가올 날들의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이따금 정적에 잠기면, 이저벨은 가슴속에서 오직 “에이미”만 외쳐 부를 것이다. “에이미, 에이미.” 그것이 그녀의 가슴이 부르는 소리, 그녀의 기도이기에. “에이미.” 그녀는 생각할 것이다. “에이미.” 이날의 쌀쌀한 황금빛 대기를 추억하면서.


아, 이 이야기를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장편소설의 매력을 딱히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는데요(<안나 카레니나> 미워…) 이 소설을 여러번 다시 읽으면서 만약 이 이야기가 이렇게 길지 않았더라면 내가 마지막 단락에서 매번 울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더 긴 이야기를 쓰는 것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어쩌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언젠가 톨스토이가 안톤 체홉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고 해요. 체홉의 연극들은 지나치게 정적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전망이 결여되어 있다고요.(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심부름>에 나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물었지요. “등장인물들이 자네를 어디로 데려다 주는가?” “소파에서 창고로 갔다가, 다시 소파로 돌아올 뿐이잖은가?”


그에 대한 체홉의 (다른 누군가에게 말한) 답은 이렇습니다.

“나에게는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세계관이 결여되어 있다네. 그런 것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바뀌기 마련이지. 따라서 나는 내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결혼하며 태어나고 죽어가며 또한 말하는가 하는 데 대한 묘사만으로 나 자신의 작업을 한정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네.”


제 마음이 힘들 때, 저에게 이야기가 필요할 때, 이야기 속으로 숨고 싶을 때, 그럴 때 저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야기를 읽고 싶습니다. 때때로, 아니 생각보다 자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삶을 향해, 언제나 삶을 향해’ 라는 말처럼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이야기,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하고 있는 가을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계속 나아갈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 나아간다. 수천 년 동안 그래왔다. 누군가 친절을 보이면 그것을 받아들여 최대한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어둠의 골짜기는 혼자 간직하고 나아가며,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언젠가 견딜 만해진다는 것을 안다.



10월 15일

지하철과 ktx에서 수희 드림



추신.

오해 정정. 아저씨들이 한심한 것은 새마을운동이나 민주화투쟁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근엄함과 지루함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에요. 아저씨들은 언제 어느 때이건 타고나길 한심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아저씨들은 한심하지만 아줌마들 중에도 한심한 사람은 그에 필적할 정도로 많으며 인간은 원래 한심한 존재이고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한심하다, 고 저는 생각하며 삽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쩐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귀여운 존재처럼 보이고, 이내 저는 남에게 쏘려던 화살을 슬며시 거둔 뒤 방구석에 처박혀 ‘겸손하게 살자’ 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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