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수희 Oct 20. 2022

거룩하고 하찮은 집안일

박혜윤, <도시인의 월든>

안녕하세요, 설님.  


오늘도 다람쥐처럼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동인천의 한수희입니다. 친구의 전세 사기 사건이 말끔하게 해결된 후(얼마나 다행인지요) 약간 넋이 빠진 듯 지내다가, 요즘은 다시 모든 걸 잊고 평소처럼 일하고 놀고 먹고 자며 살고 있습니다.


가끔 인스타그램으로 설님의 집 사진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요, '우와 저 집은 어쩜 저렇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지?'. 흐흐. 만약 설님이 지금의 삶에 안착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몰랐더라면, 마음이 비뚤어진 저도 어쩌면 오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설님이 얼마 전에 쓰신 적이 있는, 편하게 산다는둥 어쩌고 했던 댓글처럼 말이에요.(저는 제 책을 읽은 사람이 ‘궁상스럽고 별나서 견딜 수가 없다’는 식으로 쓴 리뷰를 본 적도 있어요. 대체 그런 말을 왜 공들여 쓰는 거지?!) 아마도 설님은 집안일을 그리 싫어하시지 않는 것이겠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집안일이 그렇게 싫지 않아요. 쓸고 닦고 빨래하고 널고 개는 일들을, 요리를 하고 치우는 일들을 별로 힘들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렴요.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더 힘든 일들이 많잖아요. 집안일의 가장 큰 장점은, 내가 집안일을 하는 주체인 동시에 이 집안일을 관리 감독하는 주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집안일을 할 뿐 가사도우미는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니 누구에게 평가받을 일도, 지적당할 일도, 감점을 당할 일도 없습니다. 그냥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내 속도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아, 어쩌면 그래서 너무 오랫동안 집안일만 해온 사람들은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지도 몰라요. 너무 주체적이니까요.


아무튼 저는 저녁 6시가 땡 하면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보통 제시간에 퇴근을 하면 10분도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하지요. 집에 오자마자 제가 하는 일은 손을 씻고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서는 일입니다. 아, 그 전에 먼저 '배철수의 음악 캠프'를 큰 소리로 틉니다. 그러는 이유는 그게 일종의 퇴근 의식이기도 하면서, 윗집 아이들 뛰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예요.


보통 저는 회사에서 2~3시간 정도 서서 일을 하곤 해요. 바쁠 때는 5시간, 6시간씩 서서 일할 때도 있지요. 그러니 집에 올 때는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종아리가 당길 때가 태반입니다. 그럼에도 배달음식은 시키지 않는다, 외식은 가급적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철칙입니다. 딱히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배달음식을 굳이 먹고 싶지 않고, 외식을 하기에는 냉장고 속에 먹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그렇게 오랫동안 녹초가 되도록 일하고 와서도 1시간씩 부엌에 서서 요리를 하고 있는 저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하루 종일 회사에서 나름대로 긴장했던 제 몸과 마음은 조금씩 가정의 시간에 적응해 갑니다. 맥박도 조금 느려지는 것 같고, 호흡도 더 천천히 쉬게 되지요.


그리고 또 하루 종일 얼굴 볼 일이 없는 아이들에게 저녁밥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주고 싶어요. 제가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살 때의 기억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 그 시간들이거든요. 날은 어둑어둑해져가고, TV에서는 만화 시리즈가 시작되고, 그 소리는 왠지 조금 어색하고 구슬프게 울리는 것 같고, 부엌에서는 엄마가 저녁을 짓는 냄새가 풍겨오는 그 따뜻하고 기묘한 시간들 말이에요.


하지만 무엇보다 제가 이렇게 열심히 저녁을 짓는 이유는, 요리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말 없이 혼자 집중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저는 정말 좋아요. 가끔은 아이들에게 재료 손질하는 거라도 좀 시켜야 하나? 싶을 때도 있는데 그러다가도 고개를 젓게 되지요. 아니, 안 될 소리. 이렇게 좋은 시간에 저 놈들이 끼어들게 둘 수 없지. 요리할 때만이라도 혼자서 조용히 골몰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동인천으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 저는 거의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집에서 글을 쓰고, 집에서 밥을 먹고, 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집에서 빵을 구워 먹었지요. 친구들을 불러 집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로 이사온 후부터는 거의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일단은 동네가 너무 재미있기도 하고, 갈 곳이 너무 많았으며, 가계 상황이 전보다 나아지기도 했거든요. 거의 매일 커피를 사마시고 외식을 하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자꾸 밖으로 나돌았던 이유는 이 큰 집에, 이 너른 아파트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쓸데없이 큰 집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 보면 골치가 아프고 집이 싫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소파에 앉아 저의 진짜 집을 꿈꾸는 겁니다. 작은 부엌과 작은 거실과 작은 침실과 작은 작업실이 있는 작은 집을 말이에요.


그렇게 2년이 넘게 집 밖으로 나돌다 보니 점점 더 집에 정이 가지 않게 되었어요.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밖으로 나돌며 집을 방치하다 보니 점점 더 이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 공간이 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저걸 좀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언젠가는 하겠지, 하다 보니 2년이 넘게 저희 집의 인테리어 공사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수준이에요. 게다가 내가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태도, 그 태도야말로 제가 지금껏 겪어온 대부분의 문제들의 원인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요즘은 일부러라도 집에 있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하고 있어요. 커피는 꼭 밖에서 사마셨는데, 좋아하는 카페의 원두를 사와서 집에서 내려 마시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어요.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제빵 책도 실로 오랜만에 다시 들춰 보았고요. 언제나 마음에 걸렸던 장소들은 미루지 않고 하나씩 헤집으며 치워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집이 제 마음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전히 집에 있으면 나가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집순이로서의 마음을 다지기 위해 집에 관한, 정리에 관한 책을 읽기도 해요. 그런 류의 책들은 보통 밀리의 서재에서 부담 없이 읽습니다. 저, 심지어 곤도 마리에의 <정리의 힘>이라는 책마저 읽었어요. 잔뜩 비웃어 줄 테다! 하고 빌렸는데 흠? 으음? 어라? 어머나! 흑흑 의 순으로 나가게 되는 책이랄까요. 그리하여 저는 곤도 마리에가 권한 대로 옷 정리부터 시작해 봤습니다.


옷을 버릴 때는 딴 건 생각하지 말고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라는 이 언니의 이야기대로 해봤습니다. 책을 읽을 때는 미쳤나? 싶었는데 막상 옷을 만져보니 설레는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이 있는 걸 확실히 느끼고 ‘뭐야, 소름!’ 하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아깝지만 버리기로 결심한 옷에 대고 ‘그동안 고마웠어’ 라며 주절대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는 더 소름이 끼치더군요.


그 다음으로 읽은 책은 <저장장애> 이라는 책이에요. 하하. 우습지요. 저는 한 권의 미심쩍은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전혀 반대되는 책을 읽곤 한답니다. 병적인 저장강박에 대한 정신의학서였는데요, 이 책도 재미있었어요.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들을 모으고 그것으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왠지 이해할 것도 같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읽은 책은 <도미니크 로로의 심플한 정리법>이라는 책이었어요. 오래 전에 <심플하게 산다> 라는 공전의 히트작을 읽고 난 후 아주 오랜만인데, 뭐 그냥 그랬습니다. 뭐랄까요, 실제로 만나면 굉장히 싫어지는 타입의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굳이 이런 걸 왜 쓰고 있지...)


오늘은 요즘 읽고 있는 박혜윤의 책 <도시인의 월든>의 글을 보며 이 구절에 밑줄을 긋습니다.


집안일에 매진하는 건 내게 있어서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이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말한 지혜, 즉 죽음을 기억하고 매 순간 충실하게 사는 일을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내일 죽을 것처럼 살 수 있는가? 그러다가 오래오래 살면 어떡하나? 그런데 드디어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며 오늘 이 땅에 발을 꼭 딛는 법을 알아냈다. 나 자신도, 이 세상도, 별것 아닌 나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도 하찮다. 그걸 똑바로 응시하는 일은 바로 집안일을 하는 것이다.
항상 최선을 다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당장 큰돈이 걸린 일이나 중요한 시험이 코앞에 있어도 무심하고 무덤덤하게 내가 쓴 컵 하나를 냉큼 씻는 것. 열심히 씻는다. 그뿐이다. 인생은 그 정도로 하찮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확실하고도 위대한 일은 컵 하나를 바로 씻는 일, 혹은 그게 정 싫으면 컵 하나로 커피도 마시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물도 마시는 일이다.

- <도시인의 월든>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본격적으로 시키기 시작한 것은, 이 집으로 이사를 오고 난 후부터였습니다. 그 전에도 아이들은 제 방 청소를 하고 신발 정리를 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때는 집이 손바닥만큼 작아서 딱히 일이라고 하기도 뭣한 수준이었어요.(아, 작은 집으로 가고 싶다…) 이 집으로 이사를 오고 청소를 한번 하면 허리가 휠 것 같아지면서, 그리고 아이들이 사춘기 청소년이 되어 제 방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되면서, 저 애들이 우리의 예상 혹은 기대와는 달리 공부에 취미도, 재능도 없는 아이들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저 애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저 금수 같은 것들을 어떻게 사람 만들어야 하나, 하는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고민했지만 더더욱 절실히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라요. 우리의 예상과 기대대로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었더라면, 우리는 그런 면들에 대해서 덜 고민했을 것이고, 역시 인생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풀리는 것이었어!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오만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적과 인생은 사실 크게 상관이 없지요.(물론 성적과 소득 수준, 생활 수준 같은 것에는 아마 관계가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숫자료 표기할 수 있는 지표들 말이에요. 하지만 소득 수준이나 생활 수준이 높다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잖아요. 문제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못하고, 공부에 딱히 관심도 없어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이 시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성공과 실패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사는가? 따위의 답도 없는 문제에 대해서 저는 박터지게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종종 마음이 흔들리다 못해 쑥대밭이 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저 애들은 내가 대신 걱정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비바람을 맞아야 할 존재는 제가 아니라 저들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인 우리는 저 애들이 앞날을 너무 걱정하느라 마음이 상하지나 않을까, 조급해지지나 않을까, 조급한 마음에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나 않을까,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때 헤어나오기 힘들어하지 않을까, 잘 지켜보고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면 되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이 튼튼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한 기초는 자신이 사는 공간을 그럭저럭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사는 공간이야말로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이 쉬고 힘을 얻어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기반 같은 것이니까요. 그 기반을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물론 결벽증 환자처럼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다만 부엌과 화장실만큼은 스스로 청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에게 2개의 화장실 청소를 하나씩 맡기기 시작했어요. 처음부터 잘하리라 기대했던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것이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잔소리하지 않기로, 잘했다고 칭찬하고 격려해주기로 다짐했습니다. 조금 부족한 면이 있을 때는  부분만 제가 따로 청소하면 됩니다. 아직 우리에게서 독립하려면 수년의 시간이 남아 있는  아이들이 매주 일요일마다 화장실 청소를 하다 보면 뭐라도 배우지 않겠어요? 최소한 이렇게 저렇게 하면 청소가  힘들다는 정도는 배우겠지요. 그리고 자신이 쓰는 공간에 대한 책임감도 느낄 것이고요.


예상과는 달리, 아이들은 화장실 청소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좀 툴툴거렸는데 1년쯤 지난 요즘은 알아서 잘 합니다. 제가 더 손볼 구석도 없습니다. 작은 아이의 경우는 아기 때부터 걸레질을 그렇게 좋아하더니(식당 가면 물수건으로 식당 테이블이며 바닥에 창틀까지 닦던 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면 기분이 개운하다고까지 합니다.


화장실 청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재활용품을 수거일에 내놓는 것도 이 애들에게 시키고 있어요. 처음에는 니가 해라 내가 해라 싸우더니 요즘은 첫째가 분리를 해놓으면 둘째가 나가서 버리고, 둘째가 분리를 하면 첫째가 나가서 버리는 식으로 분담까지 하더군요. 아, 또 빨래 널기와 개기도 시킵니다. 너는 것은 둘째가, 개는 것은 첫째가 하는데요, 처음에는 그냥 빨래를 거는 수준에 가깝더니 요즘은 각잡아서 딱딱 잘 널어요. TV를 보면서 빨래를 개는 첫째의 손놀림은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들 정도로 예술적이고요.


공부는 못해도 저는 이 애들의 미래가 밝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요. 세상 모든 사람들의 밝은 미래에 대한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저는 제 나름의 기준으로 이 애들의 미래가 밝을 거라고 생각해요. 잘 나가고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되어도 물론 기쁘겠지만, 그보다도 저는 이 애들이 자기 삶을 잘 꾸려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자신에게 해가 되고, 무엇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지 자신만의 기준으로 신중히 판단할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꿋꿋이 지켜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요. 그렇게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앞의 생을 탐험해나갈 수 있도록 저는 한 걸음 물러서줘야겠지요. 뒤에서 이 아이들을 지켜보기만 해야겠지요. 그리고 제 부모의 삶이 튼튼해야, 이 아이들도 걱정 없이 부딪치고 나뒹굴고 깨질 수 있겠지요. 그리고 저는 걱정도, 기대도 접어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성인이 된 내 아이들과 시시덕거릴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그런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든,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 사는 건 문제의 연속이다. 내 아이들도 자라면서 나름의 어려움을 겪는다. 하고 싶은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있고 갖고 싶은 것을 늘 가지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아이는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문제는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것뿐이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이런저런 시도도 해보고, 그런 시도는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면 기분이 나쁜 건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여기에 ‘하찮음’이라는 한 겹의 보호막이 생기면 다르다. 싫은 일도 기쁜 일도 다 지나간다는 걸 아이들에게 아무리 말로 해봤자 소용이 없다. 하지만 가사를 놀이 삼아 매일 멈추지 않고 진지하게 하면, 저절로 뭐든 하찮게 여기게 된다.
나는 이것이 땅바닥에 두 발을 꼭 딛고 서는 태도라는 걸 아이들을 가르치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무리 훨훨 난다 해도, 다시 두 발로 땅을 딛고 서는 기쁨을 잊지 않는 것이다.

-<도시인의 월든>


오늘 아침에 좋아하는 분이,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여러 모로 응원과 도움을 주신 분이, 큰 치료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읽었습니다. 마음이 내내 어수선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데는, 나 자신의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수많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도움의 손길이 있어서일 거예요.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인간은 역시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으며,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요.


그 분이 잘 치료받고 다시 건강해지시길 바라며, 어떤 시련이 와도 그것에서 또 많은 것들을 배우고 얻을 사람이라는 믿음을 다집니다. 지금 그 분이 읽고 있는 듯한 김연수의 소설집의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의 한 구절이 저 대신 그 분께 용기를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 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이토록 평범한 미래>


다시 만날 날까지 건강하세요, 설님.


10월 20일

하찮은 수희로부터



매거진의 이전글 어쩔 수 없었음에 대한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