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희님
안녕하세요.
뉴스를 읽지도 보지도 못하는 날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벌렁거리는 이틀을 보냈습니다.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믿기지 않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생겨버리고 말았네요. 이렇게 멍한 시간을 보낼 바에 편지라도 쓰자는 마음에 노트북을 펼쳤습니다. 답장이 좀 많이 늦었습니다. 딱히 이거다 하는 이유를 정확히 모르겠는데 어느 날부터 책과 멀어졌다는 것이 편지가 늦어진 또 하나의 변명입니다.
작가님
책은 내게 오염된 마음과 바닥을 치는 자신감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해주는 도구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나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쓰레기 같은 말에서 도망치게 해주는 것도 책이고 천지개벽 같은 아주 엄청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비교적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도 책이었는데 최근에는 이상하게 책으로부터 위로와 평온함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 달 이런저런 소동과 자극이 내 인생을 휘저었습니다. 그렇게 요란스러운 일상이 흘러가는 동안 중요한 것들,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리라 다짐했던 작고 소중한 것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잊혀 버렸습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거창하게 말하자면 초심 같은 겁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고민할 가치가 없다고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면 된다는 걸 모르지 않는데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겠다는 건 아니고요) 그냥 가볍게 살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삶의 갈피를 잡기가 힘들어지더군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심지어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는 엉망진창인 날들. 그러나 엉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아요. 책이 세상에 나와서 그럭저럭 팔리고 있다는 사실에 취한 것 같기도 하고 독자들의 작은 격려와 호응이 태산같이 크게 느껴진 것도 같아요.
책 두 권이 세상에 막 나왔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조용히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좋고 가만가만 주름이 늘어가는 얼굴도 좋았지요. 내가 나를 좋아하게 된 것, 내가 하는 일과 내가 하는 선택에 스스로를 응원하는 마음이 생긴 것도 기뻤지요. 그런 것들이 그토록 바라던 마음의 여유. 그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자질구레한 사건사고가 일어나도 크게 흔들림이 없었고 간혹 당신이 뭔데? 뭐 하는 사람인데? 하고 내 가치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도 일일이 대응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는데 그게 얼마나 섣부른 생각이었는지 요즘은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불과 2년 전입니다. 좀 극단적인 생각이긴 했지만 실제로 그땐 그랬어요. 굶주리지 않을 정도의 먹을거리 햇빛과 추위를 견딜 옷, 비와 바람을 막아줄 지붕만 있어도 된다고. 그 외의 것을 채우자고 아등바등 살지 말자고 다짐도 했었어요. 50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느림과 텅 빔의 삶을 좀 추구해 보자고 마음먹었어요. 당시에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지금 보니 참으로 야심 찬 계획이었고 커다란 착각이었네요. 남들은 자꾸 앞질러 가는데 나만 혼자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에 억눌리다 그걸 이겨보겠다고 이런저런 불필요한 노력과 궁리를 했던 것 같아요. 그러는 동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뿐 아니라 소중하게 여기던 일상조차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아요.
수희 님, 나는 조금 모자란 인간이라 그런지 이렇다 할 마음을 먹으면 어딘가에 선포를 해야만 실천이 가능한가 봅니다. 정 선포할 곳이 없으면 자신에게 떠들어 대거나 빈 공책에라도 휘갈겨 써야 직성이 풀려요.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 새롭게 먹은 마음을 씁니다. 당분간 아무 계획 없이 살아보고 싶습니다. 계획 없이 살아 보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계획표를 쓰듯 이곳에 쓰고 있는 아이러니를 어쩌면 좋을까요. 하하하. 아무튼 그렇게 살아보려 합니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씻고 먹고 마시고 자는 일 외에 어떤 기대도 없이 심심하게, 심심해서 미칠 것 같을 때까지 심심하게 지내렵니다. 어쩔 수 없이 처리해야 할 일들만 빼고는 의무적으로 하는 일에서도 멀어지려 합니다. 그렇게 남는 시간이 셍기면 침묵에 귀를 기울이고 고요라는 사치를 누리고 싶습니다. 소박한 생활을 즐기고 마음을 겸허하게 가다듬으려 합니다. 지난 시간들이 대개 그렇듯 지나고 보면 자잘한 순간들일뿐이고 그저 지난날이 되겠지만 이렇게 보내는 시간으로 말미암아 모호해진 삶의 윤곽이 또렷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찮은 다짐으로 대신함을 이해해 주세요.
2022. 11.1
김설 드림
PS :우리의 편지 교환과 지난번의 작당 모의는 예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