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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Nov 10. 2022

모교방문은 괴롭다

우치다 타츠루<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설님.


얼마 전에 저는 존경하는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의 서울 강연에 다녀왔습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제가 이 연재에서도 여러 번 소개한 일본의 작가이자 사상가입니다.(너무 자주 소개하는 것 같은데 내 마음 속 원픽이라 어쩔 수 없어…) 저는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인데다 의심도 많아서, 웬만해서는 누굴 좋아하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 분의 책을 읽어오면서 ‘아 이 사람을 나의 선생님이라고 해도 되겠다!’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기다려왔던, 내 마음의 스승님 말이에요.


그런 분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한 달 전부터 어찌할 바를 몰랐고, 가기 전날까지도 ‘아 가기 싫다’ ‘만나고 싶지 않다’ 며 괴로워 했습니다. 설님, 이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정말로,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봐서 뭐합니까. 내 것이 될 것도 아닌데.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인간으로서의 거리감만 느낄 뿐일 텐데. 심지어 저는 그를 만나기 위해 그 자리에 앉은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일 뿐이겠지요. 그런 건 정말 견딜 수 없어! 차라리 골방에서 가상의 그와 단둘이서 대화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내 방에서, 그들의 책을 읽고 또 읽을 때, 그들의 음악을 듣고 또 들을 때, 그들의 영화를 보고 또 볼 때, 그들은 나와는 아무런 거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닮고 싶고, 그 사람이 쓰는 글이라면, 그 사람이 부르는 노래라면, 그 사람이 만드는 영화라면 99% 정도는 신뢰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지요. 현실과는 관계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20년 가까이 좋아하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우치다 타츠루도, 라디오헤드도, 코엔 형제도, 마스다 미리도 직접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사노 요코나 박완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입니다. 그 분들이 살아계셨다면 저는 ‘이러다가 잘못해서 그 사람들을 만나버릴지도 몰라’ 하고 초조해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날 저는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의 책들 중에서 딱 한 권을 골라서(<곤란한 성숙>을 골랐습니다) 사인을 받기 위해 퇴근 후 지하철을 1시간 30분이나 타고서 서울의 동쪽에 있는 제 모교로 향했습니다. 선생님의 강연이 제가 다녔던 대학의, 제가 속했던 학과가 있던 단과대학 건물의 바로 옆 건물에서 열릴 예정이었거든요. 아아, 왜 하필 여기인가, 하고 저는 생각했지요.


제 남편은 군대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못합니다. 더불어 <미생>이라는 종합상사가 나오는 드라마도 처음에는 싫어했지요.(하지만 제가 매일 무한반복 재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옆에서 보다가 재미있다고 하더군요.) 군대에서의 경험이 너무 끔찍해서, 상사에서 일할 때의 힘든 기억들 때문에 그런 것들을 피하는 남편의 마음을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유난스럽다 싶었지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깨달았습니다. 아아, 남편의 군대와 회사 생활은 나의 대학 시절과 비슷한 것이겠구나. 저는 요즘도 간혹 2호선 지하철을 타고 왕십리와 행당동 인근을 지날 때마다, 산 위로 우뚝 솟은 학교의 도서관을 볼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그리 길지 않은 몇 년이,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 와중에 연애도 하고 놀기도 신 나게 놀았는데(공부는 아예 안 했는데), 왜 그렇게 괴로웠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걸까요.


어쩌면 저는 그때 어떤 종류의 더럽고 축축하고 어두운 터널을, 그러니까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가 쇼생크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밤새 기고 또 기어야 했던 똥통 같은 곳을 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의 저는 제 인생에서 가장 추한 상태였고, 그런 제 모습을 인정할 수가 없었으며, 지금도 없는 겁니다.


그 시절 제가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선배들의 거만한 표정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사람들, 고작해야 스물 하나, 많아 봐야 스물 대여섯의 어린애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은 거침없이 일본어가 뒤섞인 은어를 사용해 새내기들을 주눅들게 했고, 남이 공들여 만든 시나리오나 영화를 ‘쓰레기’ 라고 가차없이 평가했으며, 앞에 앉은 이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고(예를 들면 “너는 어떤 영화를 찍고 싶니?”) 그 사람이 애써 답을 하면 그것을 비웃거나 (개)무시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대학생의,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의 특권이라 믿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들은 어느 순간 그들을 따라하기 시작했고, 어쩌면 저 역시 후배들에게 그런 선배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날, 강연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헉헉대며 산을 올라 학교에서 가장 후진 위치(산 정상)에 있는 인문과학대학 건물로 향했습니다. 똑같더군요. 그 시절 138개의 계단을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올라 그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저도 모르게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버렸지요. 혹시나 건물 앞 벤치에 앉아 있는 학과 사람들과 마주칠까 잔뜩 긴장해 있곤 했습니다. 아무튼 그때는 밤중이라 그 건물 앞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하지만 그 시절의 그 기분은 여전했습니다. 이제 그들, 싫어하던 모든 이들은 학교를 떠났고, 이제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텐데도 그 유령들은 여전히 제 마음 속에 존재합니다.


건물 위층의 테라스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언젠가 우리 과의 전공 연기 수업에 다른 과 학생이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군대에 다녀온 철학과 학생이었던 듯 합니다. 그는 이례적인 존재였지요. 우리처럼 억지로 전공 필수 수업을 듣는 학생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남의 과 수업에 기어이 들어온 사람이라서인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특별했습니다. 언젠가 그 사람과 그 테라스에 서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가까워지고 싶어 했고, 우리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날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소설과 시의 차이에 관해서 나눈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소설과 시를 영화에 빗대어 말했던 것 같고, 그는 제가 한 말에 웃으면서 감탄했습니다.

“그렇게는 생각 못해봤는데, 와아 정말 멋지네요.”


저는 당황했습니다. 정말 멋져서 멋지다고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식의 반응은 처음이었기에 놀랐던 겁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기를 쓰고 자기의 잣대로 짓누르려 하지 않고, 그저 새로운 의견으로 받아들이며 감탄할 수도 있는 거구나. 그럴 수도 있는 거구나. 그는 내가 대학에 와서 만난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 사람, 아마 지금도 잘 살고 있을 거예요. 그 어린 나이에도 타인과 대화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대화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은 얼핏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말로 중요하고, 또 어려운 것입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대화를 하는 방법을 몰라 헤매기도 하고, 실제로 대화에 능숙한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화에 능숙하다는 것은, 대화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요? 대화를 잘하려면 어떤 능력이, 어떤 마음이 필요한 걸까요?


그 어떤 책에서도 우리는 빛나는 예지의 언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읽는 사람이 이기는 쪽’입니다. 내가 읽고 감동해 훌륭한 지혜의 책이라고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은 허접스러운 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조금 생각해보면 ‘흥, 별 것도 아닌 책이군.’ 하고 내버린 사람이 머리가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책과의 만남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면 ‘이긴 쪽’은 나입니다. 타인이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행간에서 빛나는 가치를 찾아낸 것은 나의 리터러시 능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그러고 보면 그 시절 우리는 모두 형편 없는 리터러시 능력의 소유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타인과 대화를 한다고 해도 사실은 거울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에 가까웠지요. 그리고 상대가 하는 말은 온통 소음으로 들릴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를 쓰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애쓰느라 남의 말을 들을 정신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타인의 내면에 숨은 보석을 발견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고, 자신 역시 상처를 받았지요. 그래서 그 시절은 마치 기나긴 똥통 같았던 겁니다.


설님. 고백하자면 저는 소설이나 시집의 맨 마지막에 붙는 평론을 거의 좋아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평론들은 자신이 읽은 소설이나 시가 아닌, 자신의 평론을 위한 평론 같아요. 그런 평론 중에서 그 자체로도 사랑하게 되는 글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게 그런 평론은 마치 영혼 없는 사용 설명서처럼 느껴집니다.


특히나 저는 평론에서 인용으로 만들어진 문장이 정말 싫습니다. 이를테면 ‘그런 평론 중에서 그 자체로도 사랑하게 되는 글은 거의 없’다고 말하는 화자의 오만하고 편협한 사고관을 접하노라면… (…없’ 에 작은 따옴표가 붙는 것이 특징이지요…) 따위의 문장을 읽으면, 이 사람은 왜 이 귀한 시간에 이 귀한 지면 위에다 공을 들여 이런 것을 쓰고 있나, 싶어 황당해집니다. 제가 이 세상의 모든 평론을 다 읽은 것은 아니라서, 이것은 오로지 저의 편견이지만, 이것은 평론이 아니라 한 편의 이야기로구나, 하고 느꼈던 것은 신형철의 평론뿐이었던 듯 합니다.


어쩌면 평론을 쓰는 능력도, 글을 쓰는 능력도 대화를 하는 능력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고 저는 느낍니다. 저는 늘 대화하듯이 쓰는 글을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대화하듯이 읽히는 글을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온라인) 강연에서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글에는 ‘보이스’가 있어야 한다.


그 ‘보이스’라는 것, 그것은 그저 단순히 ‘목소리’라고만 옮길 수는 없는 말입니다. 그것은 목소리보다 더 깊은 의미, 그러니까 신체성이라는 것을 담고 있다고 해요. 문체나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스로, 보이스를 통해 작가는 독자와 더 깊은 차원의 교감을 한다는 겁니다. 아, 이거 좀 어렵나요? 저도 말로 설명하려니 알쏭달쏭한데요, 그럼 선생님의 책에서 인용을 해볼게요.


글을 쓰다 보면 자기만의 고유한 문체가 생깁니다. 어떤 단어는 한자로 쓰고 어떤 단어는 히라가나로 쓴다든지, 구두점을 찍는다든지, 좋아하는 부사나 형용사가 있다든지... 이런 식으로 ‘규칙’이 생깁니다. 또, 하나의 문장 길이에도 리듬이 있습니다. 짧은 글이 줄곧 이어진 다음에는 호흡이 긴 단락을 놓는다든지, 까다로운 논리로 글이 옮아갈 때는 도중에 ‘커피 브레이크’처럼 다채로운 비유 이야기를 끼워 넣는 등... 이런 언어 구사에 관한 ‘규칙’은 견고하지만 내용에는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한번 리듬을 ‘타면’ 한동안 힘차게 붓이 척척 나아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듯 붓이 달려갑니다. 그때는 누가 글을 쓰는지 잘 모르지요. 내가 글을 쓰는지, 언어가 자기 증식을 하는지 말이지요.
그리고 상정하는 독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씁니다. 그런 구체적인 이미지가 없으면 밀어붙이듯이 글을 써나갈 수 없습니다. 상정하는 독자가 없는 텍스트는 꾸물꾸물합니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공중에 시선을 두고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트릿한 어조를 띱니다. 똑바로 시선을 맞추면서 ‘알아들겠어요?’ 하고 표정을 확인해가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속도를 낼 수 없습니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설님, 설님은 어떠세요? 어떤 책은 한 문단만 읽어 봐도 그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 말이에요. 이 사람,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 고 하는 느낌 말이지요. 분명 그런 느낌이 있는 글이 있고, 없는 글이 있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쓰는 사람의 글은 오만합니다. 독자를 발 아래에 두고 있지요. 심지어 그런 글은 게으르기까지 합니다. 내가 뭐라고 하든 남들이 다 알아들을 텐데 굳이 왜 애를 써? 의 느낌입니다. 저는 그런 글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합격 최저선의 작업밖에 못하는 태도를 가리켜 작가 시이나 마코토는 ‘이 정도로 되겠지 주의’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한 번 푹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함정입니다. “모두들 이 정도로 글을 쓸 테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쓰자. 나는 오자와 탈자도 적고 약간 멋을 낸 문장도 집어넣었으니까 플러스 점수를 더해 80점쯤 받을 수 있겠지?” 이런 식으로 주판알을 튕기면서 글을 쓰면 함정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독자에게 말을 걸고, 그 사람과 대화하고, 그 사람과 함께 결론을 향해 걸어가는 글은 친절합니다. 친절한 작가는 적절한 비유를 궁리하고, 눈에 보이는 듯 묘사하고, 지루하지 않게 리듬을 살리고,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좋은 작가는 설명을 잘합니다. 정확하게 씁니다. 그게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언어가 폭주하며 겹치면서 화음을 이루는 글을 쓰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렇게 단순한 인격이 아닙니다. 강점도 있고 약점도 있지요. 세련되기도 하고 천박하기도 합니다. 담백하기도 하고 욕심쟁이기도 하지요. 타인에게 알랑거리기도 하지만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백도 있습니다. 유아적인 성격과 노회한 성격이 공존합니다. 공격성도 있고 모성적인 포용력도 있습니다. 인간 안에는 무수한 인격적인 단편이 중층적으로 흩어지고 얽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관찰해본 결과만 보더라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은 이런 온갖 측면을 잘 통합해 인격의 동일성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통합된 인격은 잘 기능하지 못하지요. 군더더기 없는 단일한 인격은 말하자면 억지로 만들어낸 허구일 뿐입니다. 비정상적으로 깔끔하게 단일화된 인격이 목소리를 낼수록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말하는 내용에는 조리가 서 있고 논리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인격의 요소가 서로 부정하지 않고 마치 교향악을 연주하듯 이야기하는 언어는 알기 쉽습니다. 내 안에는 16세 고등학생부터 60세 중년 남자까지 공존합니다.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의 기억이 내 안에 퇴적해 있지요. 하나같이 다 현재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설님. 마지막으로, 그날 저는 우치다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강연장에 도착해서야 선생님이 비자 문제로 한국에 오는 비행기에 타지 못했고, 결국 온라인 강연으로 대체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왜 그 얘기를 미리 알려주지 않은 거지? 그랬더라면 이 먼 곳까지, 이 똥통 같은 기억으로 가득 찬 곳에 다시 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이렇게 편지에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을 보니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나 봅니다. 아니면, 저 스스로 이유가 될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버렸는지도요.


설님. 뉴스를 보다 보면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요즘입니다. 최소한의 상식이 있다면, 인간이 저런 짓들을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최소한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채 돈과 학벌로 금수만도 못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보면서 나의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말할 당위를 찾지 못합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상식도 없는 금수들에게 표를 던지고, 그들의 거짓을 맹목적으로 믿는 내 아버지를 미워합니다. 그와 동시에, 딸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한 사람 역시 내 아버지라는 사실에 나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태어나고 걷고 말하고 배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교육시켰지만, 그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합니다. 그것이 저를 끝없이 혼란스럽게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아버지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이 아버지들과 화해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역시, 사랑인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창밖의 숲을 봅니다. 나무들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나뭇가지들이 미세하게 바람에 흔들립니다. 마치 저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요. 제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것처럼요. 역시, 자연인 걸까요?


끝으로 요즘 즐겁게 읽고 있는(이진민 작가님 덕에) 안희연의 시 한 편을 옮깁니다. 저는 시를 잘 모르는데다, 아니 아예 모르는데다,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겠고, 사실 별 관심도 없는데요, 아무튼 안희연의 시집을 읽다가 그 ‘보이스’라는 것을 느꼈어요. 참으로, 인생은 살아봐야 아는 겁니다.


검침원


그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왔다

그것은 너무 검고 너무 무거워 보여서


가방 속에 무엇이 담겨 있을지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미래가 담겨 있다고 해도 믿어질 것 같다


늘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때 나는 홀로 믿어지다, 라는 말에 붙들려 있었는데


믿을 수도 있었는데 왜 믿어진다고 생각했을까

어쨌든 그는 믿어질 것 같은 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며

가스가 새는 곳은 없는지 점검하였다

창문의 역할과 환기의 중요성에 대해, 창가에 놓인

창백한 식물의 이름이 마오리 코로키아라는 것도

유난히 약한 녀석이에요 살아 있는데도 죽은 것처럼 보이죠


늘 거기 있던 창문을 처음으로 들여다보았다

앞으로의 외출은 마음에 꼭 맞는 창문을 고를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차가운 물을 건네며

그의 가방 속에 들어가 잠드는 상상을 했다

그는 무엇을 검침하러 온 것일까

여름이 어떤 형태로든 나의 안부를 물을 때


조금 느슨하게 만들어보세요 손에 자꾸 힘을 주면

목을 감싸는 게 아니라 조르는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그는 거실 구석에 놓인 털실 뭉치와 뜨다 만 목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완성을 바라는 마음이 거기 있다

너를 잃고 너를 잃고

죽지 않으려고 사다둔 것이었다


2022년 11월 10일

화가 많은 수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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