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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Nov 15. 2022

당분간 에세이는 읽지 않겠습니다



수희 님 안녕하세요.

조금은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계절이지만 쓸쓸함마저 아름다운 11월입니다. 편지를 쓰기에 앞서 먼저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데요. 사실 뭐가 그리 고마울까 어리둥절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이제 막 갱년기에 들어선 한 중년의 여자가 동인천을 향해 고맙다고 90도로 인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 아시면 됩니다. 굳이 힌트를 드리자면 많이 망설이다가 하셨을 조언 한 마디가 저에게 금과옥조가 되었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며칠 전 딸아이로부터 택배가 왔어요. 엄마가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보냈다는 걸 선물 상자를 열자마자 알았어요. 습관을 넘어 강박이라고 여겨질 만큼 집안 청소를 하는 저는 몸도 참으로 열심히 닦습니다. 때를 자주 밀고 물을 가득 받아놓은 욕조에 향기 좋은 것들을 풀고 앉아서 유유자적 책장을 넘기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런 걸 하느라 친구가 만나자고 해도 잘 나가지 않는 편이고 맛있는 저녁 메뉴로 꼬셔도 그 꼬임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요즘은 불러 주는 친구도 없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회식 자리에서 하도 엉덩이를 들썩이는 통에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 놓은 모양이라며 그럴 거면 빨리 꺼지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어요. 그럼 저는 히죽거리며 집으로 가는 전철에 몸을 실었지요. 저는 그런 기질의 사람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익히 아는 딸아이가 바디로션과 칫솔을 선물로 보냈더군요. 콧대 높은 연하남도 꼬실 수 있을 것 같은 향기를 품은 바디로션과 누런 이도 단번에 새하얀 치아로 만들어 줄 것 같은 칫솔이었어요.


수희 님 저는 사실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말하는 걸 좋아하는 편도 아니에요. 하하하. 못 믿으시겠다고요? 네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말보다 생각이 많아서 생각을 먼저 하다 보면 말할 때를 놓치는 경우도 허다하고 내가 지나치게 말을 안 해서 분위기를 망치는 건 아닐까 조바심을 내다가 어렵게 꺼낸 말이 오히려 상대를 난감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아요. 내가 하는 말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인지 말을 더듬을 때도 있어요, 간혹 제게 말을 잘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자리였을 거예요. 아마 내가 아니면 떠들 사람이 없는 그런 자리였을 겁니다. 말하자면 내 순서에서 터지는 폭탄을 받아 들었기 때문이었다는 거죠.



이런 성격의 제가 말 많은 잔소리쟁이가 된 건 딸을 낳고부터 였어요. 그때부터 나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미친 듯이 말하기 시작했어요. 이것도 하지 마라, 저건 위험하다. 저건 저래서 가까이하면 안 되고 이건 이래서 너에게 해를 입힌다. 책 읽어라. 공부해라. 공부에는 때가 있다. 때를 놓치면 결국 후회한다. 잔소리가 안 먹힌다 싶으면 협박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인생 망한다.


아이에게 했던 말들은 전부 과거에 내가 실현하지 못한 것들이었는데요. 그래서 아이에게 했던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은 거였어요. 실현이 어려우니까

다짐이라도 쎄게 해야했죠. 아이의 인생을  인생처럼 망쳐서는  된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다짐. 26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고 마취에서 풀리자마자 딸애의 손과 ,  미간에 인상을  남편을 닮은 빨간 얼굴과 곱슬거리던 머리카락을 찬찬히 살피며 " 엄마처럼  딸을 방관하지 않겠다"  생각했어요.

내 엄마는 생전 잔소리가 없었어요. 잔소리뿐 아니라 내게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나를 믿는다면서 방관했고 인생에 찾아온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답을 구하는 심정으로 엄마를 쳐다보면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엄마의 옆모습을 봐야 했어요. 가끔 무지막지하게 때리기는 했지만 화를 자주 내지도 않고 잔소리도 그다지 없던 엄마 덕에 또래 친구들보다 자유롭게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덩달아 외로움과 내면의 불안도 깊어졌고요. 나에게 엄마는 있지만 없는 사람. 나는 남들이 보기엔 똑 부러지는, 혼자서도 뭐든지 잘하는 사람으로 성장한 듯 보였지만 어딘가 위태로운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단언컨대 엄마가 내 인생에 조금이라도 관여를 했더라면 인생이 지금과는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40대까지만 해도 자주 생각했어요. 나 좀 믿지 말지. 엉뚱한 길로 가면 나 좀 붙잡지...

나는 엄마의 잔소리를 원했고 내가 간절하게 원하던 대로 딸을 대했지만 딸은 내 잔소리가 지겨워서 미쳐버릴 것 같았고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는 것. 도망갈 기회만 엿보고 살았다는 것을 당사자가 나중에 말해줘서 알았어요. 나는 딸에게 지나치게 많은 걸 하려고 시도했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도 답을 모르겠어요. 부모의 역할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요.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일까요? 아이들에게는 역시 무언가를 하지 말아야 할까요? 아이들이 필요할 때만 짠 하고 나타나 어깨를 토닥여주면 되는 걸까요? 책이 말하는 것을 모든 아이들에게 적용시켜도 되는 걸까요? 정말 언제까지나 엄마는 네 편이라고 헤벌쭉 웃어주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그럼 작가의 말대로 아무 부작용 없이 한 아이가 성장할까요? 물론 작가는 하회탈같이 소리 없이 웃어 주는 조부모와 산처럼 등 뒤에 든든하게 서있던 부모 밑에서 성장했기에 이런 책을 썼겠지요?  어쨌거나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정말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것 같아요. 요즘 아이들의 표현을 빌자면 케바케. 나는 이것이야 말로 정답에 가장 근접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수희 님

저는 요즘 내가 하는 말이 두렵고 내가 쓰는 글은 더 무섭습니다. 글 속에 짧은 생각과 어설픈 논리가 뻔히 들여다 보여서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길 반복합니다. 허술함을 그럴듯하게 포장할 재간이 없으니 솔직하게 쓰자는 생각만 하는 중입니다. 읽어줄 사람을 의식하지 말라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내가 쓴 글이 어떻게 읽히든 그건 읽는 사람의 몫이겠거니 합니다만 그건 자신감이 부족한 나를 다독이는 방편일 뿐이죠. 세상은 확신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버렸고 그 와중에 나는 내가 겪은 것만 써야 한다는 결심만이 깊어집니다. 어쨌거나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에세이는 읽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주장을 모르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로 어떤 책을 읽고 쓴 편지인지는 이곳에 밝히지 않겠습니다.


이 계절 아무쪼록 즐겁게 지내시고요. 곧 만나요.


2022. 11. 15


작은 보자기에 자잘한 모양의 글을 펼쳐 놓고 싶은 김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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