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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Oct 13. 2022

어쩔 수 없었음에 대한 단상

욕망하는.힘, 스피노자 인문학



수희 님 안녕하세요.


수희 님이 편지로 전하신 전세금 소동으로 이 아름다운 가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고 느끼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0월이 벌써 2주가량 흘러가고 있지만 가을 날씨를 즐길 시간이 아직은 남아있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고 싶을 만큼 하늘이 파랗고 가을볕은 찬란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계절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지냅니다. 생각해보면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니었어요. 눈앞의 아름다움을 놓친 적이, 소중한 것들을 생각 없이 무심코 흘려보낸 적이 어디 한 두 번이어야 말이지요.


요즘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음.... 이렇게 된 데는 짐작이 가는 이유가 분명히 있지만 여기에는 쓸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그 이야기는 만나서 하기로 하고요.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있지요? 제가 딱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몸이 바쁘다기보다는 마음이 바쁩니다. 부산스럽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글 몇 줄을 쓰면서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에 책을 펼칩니다. 이 책 저 책 꺼내 읽다가 치우고 읽다가 치웁니다. 쓰고 싶은 글은 많은데 막상 쓰려면 한 꼭지 이상 쓰기가 어려워요.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작은 기쁨이나 글을 쓰면서 느꼈던 즐거움 같은 걸 만들어 내는 데 자꾸만 실패합니다. 혹시 이 책을 읽으면 뭔가를 알 게 될까? 저걸 읽으면 새로운 깨달음이 있을까 헛된 기대를 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저는 도대체 왜 이렇게 후진 사람일까요. 뭣 때문에 쓸데없이 진지하기만 할까요?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지 늘 도서관이나, 내 방 책장 앞을 떠나기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매번 그날이 그날일 뿐,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이제는 독서로, 책 쓰기로 뭘 얻어내고 싶은지 조차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그런 날들이 흘러가고 있을 뿐. 솔직히 말하면 책에만 의존하다 보니 책에 끌려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냥 엉망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뭐라도 하면서 작은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방편으로 요즘은 음악을 좀 듣습니다. 그거라도 안 하면 지금 흘려보낸 시간들을 또 후회하고 있을 게 뻔하거든요. 평소에 안 하던 걸 하려면 장비 타령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보니 오래되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아서 멀쩡한 블루투스 스피커를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브리츠 무선 스피커를 샀습니다. 갑자기 귀가 예민해진 사람처럼 쫑긋쫑긋 귀를 기울입니다만 그전에 있던 스피커와 새로 산 스피커의 음질 차이를 잘 모르겠어요. 어쩐지 저음이 좀 예전보다는 안정적으로 들리는 것 같다는 어설픈 느낌만 있을 뿐입니다. 스피커 타령을 하기에는 막귀의 소유자인 거지요. 허허. 이 편지를 쓰는 지금도 잔잔한 배경음악이 깔리고 있답니다.








수희 님 저는 제가 수시로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너무나 많아요. 그게 명백히 내 감정인데도 모르겠다는 거죠. 기쁨도 슬픔도 절망도 후회도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어요. 감정이 이렇게 정신없이 헷갈릴 때면 괴로워 몸부림치다가 끝에 가서는 나를 의심하고 책망하고 맙니다. 웃는 가면을 매일 뒤집어쓰고 사니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이 무슨 글을 쓰겠다는 거냐고.

이런 하소연은 웬만해서는 안 하지만 정말 미칠 것 같을 때는 친한 친구에게 말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친구는 늘 똑같은 대답을 해줍니다.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다 알아야 해? 그냥 모르고 살면 안 돼?"

친구의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러게 다 알아야 하나? 싶다가도 결국 알고 싶어 집니다. 지금 느끼는 이 불안이라는 감정을 명확히 알아내고 싶습니다. 무엇 때문에 생긴 불안인지, 해결하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했습니다. 감정이란 욕망이 성취되는 정도를 나타내는 눈금이라고요. 다시 말하자면 지금 느끼는 이 불안은 바라는 바가 성취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어 난리 부르스가 난 거라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나는 좋은 글을 쓰지 못할까 봐 불안에 벌벌 떨고 있다는 뜻이겠고요. 수희 님 나란 사람 정말 웃기는 사람 아닙니까?








이쯤 되면 저는 어디 아픈 여자가 된 겁니다. 약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귀신처럼 스르르 일어나 책장에 있는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이라는 약을 꺼내 아무 데나 펼쳐 읽습니다. 감정의 노예인 나 같은 인간에게는 감정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스피노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진통제이자 치료제거든요. 책에는 내 비루한 불안을 잠재워 줄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책의 뒷부분까지 가지 않아요. 나는 겨우 24페이지에 멈춰 버립니다. 어쩔 수 없었음에 대한 단상이 시작되는 페이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든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피노자는 이런 우리의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 줍니다.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유일한 선택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어떤 시기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은 차이가 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아도 서로의 역량에는 분명 차이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만 주목해봐도 시기에 따라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분명히 구분됩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역량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장하든 감소하든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어린 시절엔 꿈도 못 꾸던 일을 지금 와선 가볍게 척척 해 내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요.


우리는 늘 변해가는 역량을 지낸 채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자유로운 선택이었다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실은 모든 선택은 그 당시 역량이 허락하는 유일한 결정이었는지 모릅니다. p24~25



수희 님 내가 스피노자의 이 철학적 담론을 아예 모르고 있었을까요? 이 담론은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너무나 뻔한 이야기고 심지어 내가 딸아이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해 준 적도 있어요. 인간의 역량은 기본적으로 미약하다. 과거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그때의 잘못을 찾아낼 정도의 역량은 시간이 지나면 생기기 마련이다. 예전의 선택은 그 순간 자신이 가진 역량을 바탕으로 한 선택이다. 그때의 선택이 그때의 행동을 만든 것뿐이다.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간 일에 후회를 할 필요는 없다. 딸아이에게 그렇게 말해 놓고는 지금의 나는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며 뒤늦게 곱씹고 있는 걸까요.


흠..... 아무래도 지금 느끼는 불안은 예전에 써낸 두 권의 책 보다 더 나은 역량을 발휘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일어난 감정이겠지요. 그런데 이 욕망을 느끼는 것이 나는 왜 부끄러운 걸까요? 작가로서의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고 되지도 않을 일에 눈이 벌게진 사람이 된 기분은 또 무엇일까요.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고 스스로를 세뇌하거나 출간이나 판매부수 같은 것을 다 잊어버리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죠. 아무거나 막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다른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도 이젠 거추장스럽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다 자신감이 부족해서 생기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니 더 우울해집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가까이하고자 성경을 손에서 떼지 못하는 사람처럼 ,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잠시도 허락하지 못해 밤낮으로 설교를 듣는 종교인처럼 책을 펼칩니다. 그래야만 그나마 평정심이 유지되는 나란 사람에게 스피노자가 또 한 마디를 해줍니다.



욕망을 버리는 것은 하늘을 나는 비둘기가 공기만 없다면 아무런 저항 없이도 높이   있을 거라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욕망과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에게 아무 욕망도 없다면 아예 어떤 행동도   없게 됩니다. 단지 숨만 쉬고 자극에 단순히 반응만 하는 관상용 식물처럼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버릴 테니까요.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연료가  떨어져 고속도로에 멈춰  자동차가 됩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든  순간마다 우리는 뭔가를 원하고 있고 원하는 대상도 많고 다양합니다. 어떤  이것도 하고 싶고 어떤  저것도 하고 싶습니다.  욕망은 저마다 다른 크기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욕망들끼리 힘을 겨루다가 어느 순간   힘을 가진 역망이 다른 욕망을 모두 제치고 최종적으로 주도적인 역량이 되어 우리 자신을 움직이게 합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무의식적인 욕망이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욕망이라는 단어가 저급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부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욕망은 매우 긍정적이며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우리 영혼의 소중한 일부입니다. p 30



수희님.

곧 만나게 되겠죠. 그때는 책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술이나 마셔야겠어요,


2022.10. 13


김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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