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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Oct 05. 2022

평범하고 비범한 미리 언니

<오늘의 인생> / 마스다 미리


설님 안녕하세요.


실로, 실로, 실로 오랜만의 편지입니다. 그간 우리에게는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지요. 설님은 아이를 집에서 내쫓으셨… 아니, 독립을 시키셨고(축하축하합니다!), 저는 45년지기 죽마고우, 불알친구(아니 난 불알은 없지만), 제가 이효리의 성격을 맡고 있다면 그쪽은 이상순의 성격을 맡고 있는, 자매와도 같은 제 친구이자 회사 동료를 인천으로 이사오라고 꼬셔서 불렀다가, 그 전셋집의 계약이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껴진 후 약 일주일을 지옥 속을 헤맸습니다.


그 집은 저와 친구가 함께 보러 다니고, 함께 계약을 하고, 함께 이사를 하고, 함께 꾸민 집입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는 친구와 아마도 평생 함께 일하며 살아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의 가족과 같은 존재이지요. 그런 친구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 죽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친구의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전세금은 친구가 평생 힘겹게 모은 전 재산입니다.)


아무튼 일주일 후에 다행히, 너무도 다행히 한 달이 넘게 질질 끈 친구의 전세보증보험 심사가 통과되어서 이제는 걱정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전세사기 대책도 발표되어서, 아마 내년부터는 전셋집이 경매에 넘어가도 세입자가 우선적으로 전세금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원래는 집주인의 체납 세금이 우선이었습니다.) 일상은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급격히 빠졌던 몸무게도 하루에 0.5kg씩 차곡차곡 다시 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충격은, 그 느낌은 잊히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크고 검은 구멍 같은 것이 존재하는데, 그 구멍은 아무리 조심해도 비껴갈 수가 없다는 것을 마흔다섯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아버린 기분입니다. 그 전에는 그걸 안다고 해도 어쩐지 방구석 지식인의 오만한 냉소와 사치스러운 허무주의 같은 느낌이었으나, 지금은 다릅니다. 실제로 그 블랙홀 같은 구멍의 근처에라도 가게 되면 저는 손가락 하나 꼼짝도 하지 못하고 웅크린 채 벌벌 떨기만 하는 꼴사나운, 그리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걸 이제는 알아버렸습니다. 그걸 알아버린 제 마음은 착잡하고 또 착잡합니다.


일이 잘 해결된 후에도,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기분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어요. 뭘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이럴 때는 아무 것도 하지 말자. 뭘 하려고 하지 말자. 그냥 멍청하게 지내자. 멍청하게 가만히 있으면서 나아지기를 기다리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TV를 틀어 뭐라도 보려고 하는데, 도무지 (전에는 열광했던) 어둡고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그런 이야기는 볼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마구 들쑤셔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어제는 오후 즈음 이유 없이 다시 마음이 어지러워서 라디오를 틀었는데요, <네시엔 윤도현입니다> 듣고 있으려니 조금씩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그렇구나, 라디오라는  이런 거구나, 이렇게 불안하고 허무하고 두려운 오후  시를 다들 이렇게 견뎌가며 살고있다는  아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  생명력의 불씨 같은 것이 희미해졌을 , 저는 밝은 이야기를,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그것만으로도 좋은 그런 이야기를 으려 합니다. 바로 마스다 미리의 만화 같은 이야기 말이에요.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보고 있을 때면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는 것처럼 힘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마스다 미리라는 사람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안심이 됩니다. 라디오를 들을 때처럼 나뿐 아니라 다들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고 어지러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괜찮아, 하는 목소리가 세계의 여기 저기에서 들려오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 책에서 제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람이 자신의 시간을 자유의지대로 쓴다는 점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저에게는 거의 충격처럼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아아, 결혼 전에는 저도 그랬었지요. 누구에게 양해나 허락을 구할 필요 없이, 누구를 설득하거나 회유하거나 협박할 필요 없이 내키는 대로 살아갈  있었습니다. 밥을 먹기 싫으면 밥을 하지 않아도 좋고, 갑자기 카페에 가고 싶으면 달려나가도 좋고, 여행을 가고 싶으면 비행기표를 사도 좋았습니다. 누구도 제게 간섭하지 않았고 누구도 제게 뭔가를 기대하지 않았지요. 지금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연휴 마지막날인 어제 아침,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조조영화를 보러 가서 혼자 집에 남았는데, 갑자기  동네의 카페에 너무 가고 싶어지는 겁니다. 결국 빗길에 차를 몰고 혼자서  카페에 다녀왔지요. 그런데 저는 집을 나서기 전까지,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차를 몰고 가는 내내 고민했습니다. 어제도 카페에 가고 그제도 카페에 갔는데 오늘도 가도 되는 걸까? 남편이  뭐라고 하겠지? 애들은 아침도  먹었을 텐데 돌아와서는 어떻게 하지? 이렇게 눈만 뜨면 카페에 가는 , 이러다 파산하는  아닐까? 나는  이렇게 충동적이고 경제관념이 없지? 흑흑,  같은 ...


하지만 결과적으로 카페에서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고 갓 구운 크로아상을 야금야금 베어먹었던 시간은 무척 좋았습니다. 저는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알차게 그 시간을 보냈고요. 남편은 저에게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았으며(제가 들어오자마자 "이제 내가 나갈게" 라고 하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카페로 가버렸습니다), 카페에서 쓴 만원 때문에 파산까지 할 일도 없을 것이고(물론 티끌도 모이면 태산이 되겠지만...), 아이들은 저를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제가 없어야 더 좋아합니다.) 결국 쓸데없는 고민이었던 겁니다.


만약 제가 마스다 미리처럼 독신으로 아이도, 가족도 없이 혼자 나이 들어갔다면 저는 어땠을까요? 카페에 가고 싶으면 가고, 크로아상을 먹고 싶으면 시키고,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겠지요. 그러면서도 저는 아마 외로워 죽겠다며 징징대고 있었을 것이 빤합니다. 스무 살에 집을 나와 혼자 사는 7, 8년의 기간 동안 저는 내내 외롭고 불행했던 느낌입니다. 저에게 혼자 산다는 것은 조금도 행복하거나 홀가분한 것이 아니었어요. 늘 부모님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아니면 가족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가족과 함께 사는 지금은 집에 있는 가족들을 피해서 자꾸만 밖으로 나돕니다. 만족을 모르는 인간입니다.


<오늘의 인생>에서 마스다 미리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왠지 많은 일에 지친 것 같은 저녁, 차라도 마실까 하고 주변의 많은 카페들을 둘러봅니다. 그런데 어느 가게에도 들어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아, 그 기분이라면 저도 압니다. 지치고 외로울 때, 어느 곳에도 제 몸과 마음을 맡기고 싶지 않을 때를 말이에요. 그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마흔다섯이나 먹었는데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기분입니다. 길을 잃고 차가운 거리를 홀로 헤매는, 이 우주에 나 혼자뿐인 그런 기분입니다. 그때 마스다 미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어디라도 날아갈 수 있다면 겨울 숲속에 있는 자그마한 호수 옆이 좋겠다. 그곳에 잠시 서 있고 싶다. 카페라테도 소이라테도 마시기 싫어. 차갑고 맑은 공기를 가슴 한가득 들이마시고 싶어.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겠지요. 저도 마스다 미리와 함께 그 호수의 상상을 합니다. 겨울 숲속에 있는 자그마한 호수 옆에 서서, 차갑고 맑은 공기를 가슴 한가득 들이마시는 상상을요. 그리고 마스다 미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도시에 있어서 그런 곳을 항상 가까이 둘 수는 없으니까. 상상력을, 상상하는 힘을 이런 밤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이 여자의 평범함과 비범함을 오가는 재능 말입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12시가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처럼, 저는 출근을 해야 합니다. 회사에서 죽도록 일을 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들이 먹을 만한 반찬을 만들어주고, 시험기간인 아이들의 공부를 좀 봐줘야 합니다. 시험기간에도 공부를 하기 싫어 난동을 부리는(그러나 공부는 하지 않는) 사춘기 막내가 내뿜는 온갖 기운을 견뎌내야 합니다.(엊그제는 제 옆에서 두 시간 동안 한숨을 내쉬더군요. 견디다 못해 등짝을 한 대 후려치려다가 이를 악물고 참은 뒤 산책이나 가자고 데리고 나갔더니 한 시간 동안 또 한숨을 쉬더라고요. 그러다 결국 실토했습니다. “엄마. 사실 나 엄마 괴롭히려고 계속 한숨 쉰 거야.” 저걸 그냥….)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아무도 없는 숲속의 호수 옆에 가만히 서 있고 싶습니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와 불행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저는 행복할 때는 불행할 거리를 찾고, 불행할 때는 행복할 거리를 찾는 한심한 여자입니다. 하나의 큰 걱정이 지나고 난 후에 또다른 작은 걱정이 찾아옵니다. 마음이 어지러워요. 가만 생각해 보면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닌, 그저 미래에 대한 제 불안의 투영일 뿐이지요. 제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 아닙니다. 밤에는 별 수 없이 뒷산으로 올라가 트랙 위를 걷고 또 걸었습니다. 마음 속에 내려진 무거운 추가 조금 가벼워질 때까지 걸었습니다.


이제 그 만화의 다른 장면이 떠오르네요.


나의, 내 인생에 닥치는 귀찮은 일 전부를 작품으로 승화해 보이겠다, 라고 새삼스럽게 생각한 오늘의 인생.


아아, 미리 언니는, 실로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까?


2022년 10월 4일,

한심한 수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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