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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Sep 22. 2022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은 없다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이은정 소설집

     


수희 님 이게 얼마만입니까? 글로 만나는 게 실로 오랜만입니다. 아시겠지만 편지가 늦어진 데는 수많은 핑계가 있습니다. 딸 애를 독립시키고  요즘 저는 인생의 한 페이지가 또 넘어갔구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예상보다 많이 홀가분하고 애가 나간 자리가 빈 공간으로 남아 가을바람이 드나들고 있어요. 작은 이사 덕분에 대청소까지 끝낸 방 여기저기에 편백수를 뿌렸습니다. 오래된 책에 벌레가 생기는 것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요. 그 외 향기 좋은 것들을 배치하고 킁킁킁킁.


그나저나 지난 추석의 만남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남들은 우리가 꽤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더군요.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아는 사이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엄밀하게는 그렇다고 볼 수 없지요. 그저 우연히 책으로 시작된 인연. 이 귀한 만남이 소중하다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언제까지 이어질지 당사자인 우리들도 알 수 없지요. 인간관계라는 건 그런 것 같아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이쪽에 앉았나 싶으면 저쪽에 앉아 있고 아군인가 싶으면 적군이고 그것도 아니면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게 되는 것.


그래서 말인데요. 수희 님, 난데없이 오늘 저에 대한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흠.... 저란 사람... 지금은 많이 식었지만, 기본적으로 들끓는 열정이 존재하고 냉소적인 면이 있지만, 겉으로 표시가 나는 편은 아니에요. 타고난 천성이 약해서 남의 말에 잘 휘둘리고 어린 시절에 겪은 결핍으로 자존감이 낮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지요.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완수하려는 집중력과 끈기가 있고 노력파라는 평가를 받기도 해요. 성실한 편이긴 하나 먼 미래를 계획하는 치밀함 같은 건 없고 어딘가 조금 허술해서 헛똑똑이라는 말을 들어요. 집안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조금 별난 면이 있지요.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돈벌이에 크게 관심이 없을 만큼 돈에 욕심이 없어요.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어쩌다 여유 자금이 생기면 저축 상품을 찾아본다거나 투자처를 알아보는 일보다 어디 작은 원룸이나 하나 얻어서 오래된 테이블을 가져다 놓고 유유자적 홍차를 마시고 지칠 때까지 책을 읽는 상상이나 하는 내성적인 사람이에요.     


이런 나와는 한 가지도 일치하는 면이 없는 정반대의 사람이 바로 동거인입니다. 그는 열정이 거의 없고 모든 일에 부정적인 편이에요. 어떤 일(돈) 앞에서는 대책 없이 과감하고. 그 과감함은 사유나 통계 또는 믿을만한 정보를 통해 얻은 건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감을 믿어서 나온 결과예요. 동거인에게는 인과를 따지고 논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무서울 정도의 대범함과 무모함이 있어요. 하지만 자신의 감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건 정작 본인인 것 같아요. 54년을 사는 동안 자신의 감이 틀렸다는 걸 확인했지만 달라지지 않는 고집불통. 깨끗함보다는 편안함을 더 좋아하고. 몸이 아프면 병원보다는 민간요법을 찾아서 혼자 치료하다 병을 키우는 사람. 구두쇠로 보이지만 그건 경제력이 없어진 이후의 모습이고 주머니가 두둑할 때는 모르는 사람의 술값도 척척 계산하는 기분파. 그의 대책 없는 무모함과 과감함 덕분에 함께 사는 동안 안정과는 관계없이 살았어요. 그러는 동안 내가 배운 것은 누구도 타인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어요     



그와의 결혼은 내리기 힘든 기차를 탄 것 같았어요. 어떤 역에 도착했을 때는 문이 잠겨있었고 다음 역에 도착해서는 내 손으로 문을 닫기도 했어요. 큰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을 계기로 그와 나는 서로의 동거인으로 다시 시작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부딪히고 또 부딪쳐요. 어느 날은 그가 밉고 다음 날은 불쑥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따로 놓고 보면 나도 그도 나쁜 사람이 아닌데 왜 우리는 번번이 서로에게 나쁜 상대가 되는 건지 알다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차라리 저 사람을 연구하자. 철학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저 인간을 탐구하다 보면 미워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겠지. 그렇게 해서 동거인 탐구생활이 시작되었어요. 예전과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동거인의 말과 행동을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를 알기 위해 탐구를 시작했는데 어쩐 일인지 나를 아는 시간으로 전개되어 당황스럽더라고요. 여유를 갖고 천천히 돌이켜 보니 나는 그동안 우리가 부부였던 시절,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가난 때문에 고생했던 것도 건강을 해친 것도 모두 남편 탓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잘 사는 친구들과 비교하며 이렇게 사는 것이 모두 남편의 탓인 듯 신세 한탄만 했던 것 같아요. 내 삶의 모든 선택을 내가 했음에도, 인생의 궤도가 달라진 건 전적으로 내 선택 때문인데도 그를 원망했어요. 앞으로 내가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하는 가에 따라 인생의 궤도는 달라질 수 있는데도 삶을 긍정하는 방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처럼 후회와 원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어요. 부족한 부분을 남편으로 채우려고만 했고 그의 덕을 보고 살려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났던 거였어요.

나는 매번 양보만 하는 사람으로, 그는 받기만 하는 뻔뻔한 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꼼꼼하게 따져 보니 크게 양보한 것도 없더라고요. 그가 내 흠을 말없이 보듬어준 적도 많았는데 내가 한 일에 생색을 내느라 고마움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고. 함께 살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에게 어려운 요구만 했고요. 남자와 여자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이 척척 맞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데 우린 맞는 게 하나도 없다며 툴툴거렸지요. 소통할 생각도 별로 없으면서 그에게는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타박을 했고요. 나를 무례하게 대한다며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다는 것도 부끄러웠어요.


상황을 바꾸고 싶다면 상대가 아닌 나의 관점과 태도부터 바꿨어야 했는데, 내가 바뀌지 않는데 어떤 게 달라지겠어요. 내 습관과 나쁜 행동도 고치기 힘들면서 그 사람만 여간해서 바뀌지 않을 사람으로 생각했더라고요. 그를 이상한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나를 피곤하게 하는 사람으로 정해놓으니 그는 정말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고 피곤하게 구는 사람이 되더라고요.

생각해보면 그동안 나를 괴롭히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었어요. 그 일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표상과 관념이었던 것 같아요. 지난 세월 내가 겁을 내고 힘들어했던 건 결혼 생활이 아니라 결혼 또는 부부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공포가 지나치게 컸던 게 아닐까. 결혼하면 그 순간부터 인생이 안정기에 들었다고 착각했던 건 아닐까. 내가 그에게 바라던 역할을 그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부터 그를 향한 원망이 시작된 건 아닐까. 남들은 슬기롭게 넘기는 인생의 문턱에 매번 발이 걸려 넘어지는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배우자가 아닌 동거인으로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지금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살고 있어요. 이제는 그도 나도 부부라는 관계에 얽매여 인생을 찬란하게 만들려고 안달복달하지 않아요. 결혼을 없애고 생활만 남은 지금의 삶에 만족해요. 이렇게 생활을 이어나가다 보니 이제야 어른이 된 기분이 들어요.     


어땠거나 우리는(나와 동거인) 지금도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서있어요. 헤어질 듯 헤어지지 못한 관계로 살아갑니다. 부부의 일은 부부만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 말은 비단 부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집 안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닫으면 밖에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죠. 사람들은 그 안에서 간혹 들려오는 소리만으로 집 안의 모습을 상상하는 거고요. 참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 여러 가지 상황에 떠밀려 참아야 하는 경우도 있고 마음으로는 백 번도 넘게 떠났을 집구석을 단 한 번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수희  

나는 그런 이야기가 좋아요. 사람들은 읽기에 불편하다는데 나는 이런 이야기에 끌리고 말아요. 부서지기 쉬운 위태로운 삶에서 겨우 찾아내는 사랑과 희망의 이야기요. 비극적 감성을 싸구려로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알지만 나는 그들의 그런 생각을 비웃어주고 싶달까요.



그렇게 날 원망하고 협박했던 놈들도 막상 살려두니까 또 어떻게든 살아가.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음은 슬픔과 한 몸인데 그렇다면 삶이 기쁨과 한 몸이냐 그건 또 아니란 말이지. 인생은 그냥 복볼복인 거야. 이왕지사 그렇다면, 명백한 슬픔을 선택하느니 차라리 어떤 쪽일지 모르는 삶을 선택하는 게 조금은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오늘도 또 개똥철학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그럼 곧 만나요.


2022.9.22

김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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