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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Dec 14. 2022

나의 우상 앤 타일러씨   

앤 타일러, <종이시계>

안녕하세요, 설님.


요즘 자주 뵙습니다. 자주 뵈어서인지, 이 편지 쓰기도 어쩐지 다른 국면을 맞이하는 느낌입니다. 그 전에는 김설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에 대한 궁금증 또는 알쏭달쏭함이 컸다면, 요즘은 자주 보게 되어 (여전히 작가님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훨씬 편한 마음으로 쓰게 되는 동시에, 이 편지는 느리더라도 편안하게, 그리고 꾸준히 쓰는 형식으로 나아가야겠구나, 슴슴한 백김치 같은 맛으로 오래 가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설님. 얼마 전 저와 설님, 봉부아님 셋이서 ‘현기증 소설 클럽’을 발기… 했잖아요. 제가 무엇을 던지든 몸 사리지 않고 “해보지 뭐!” “좋아요!” 라고 신 나게 받아주시는 두 분 덕에 요즘 정말 즐겁습니다. 사실 클럽을 만든 것이 전부지만, 그럼에도 그런 형식을 만들고 나니 이게 뭐라고 힘이 되는 동시에 마음도 무척 편안해졌어요.


전부터 저는 제 이야기를 쓰는 에세이의 형태가 아닌 소설의 형태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업 시간에) 소설을 썼었고, 대학 때부터는 영화 시나리오 쓰기로 글쓰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이렇게 별 것 없는 제 인생을 팔아 에세이 작가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했어요. 그렇잖아요. 제 인생은 사실 딱히 굴곡도 없고 비극도 없고 핸디캡도 없습니다. 평범하기 짝이 없지요. 이런 인생 이야기가 책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러나 굴곡도 없고 비극도 없고 핸디캡도 없는 밋밋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저는 굴곡과 비극과 핸디캡의 언저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감각을 느낍니다. 그런 감각 때문에 저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아, 삶이란 왜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 하고 벌벌 떨지요. 그런 느낌과 감각에 대해서, 저의 인생을 통해서는 말하기 힘든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소설이라는 틀을 통해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동시에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은 진정한 이유는, 쓰면서  자신에게 용기를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제가 모르는 것을 알고 싶고, 알고 싶은 것에 대해서 곰곰생각하고 싶고,   후에도 저라는 사람은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같은, 그런 미묘한 감각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그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역시 쉽지 않더라고요. 일단은 의지력의 문제가 있고요(마감 없으면 글 못 쓰는 한수희씨), 생계 및 가정을 돌보는 일 때문에 좀처럼 짬을 내기가 쉽지 않기도 하고요, 에세이 쓰기와 소설 쓰기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문제이기도 한데다가, 무엇보다 내가 쓴 것이 과연 읽을 만한 것인지를 스스로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건 뭘까? 에세이와는 달리 왜 소설은 쓰면서 자꾸 자기 확신이 사라질까, 하고 생각해보니 물론 에세이 쓰기와 소설 쓰기의 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쓸 때는 제가 어떤 목소리를 어떤 속도로 어떤 방향을 향해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인 것 같아요.


내가 쓰고 있는 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문학’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위해서 이 이야기를 쓰고 있지? 과연 이 이야기에 한 명이라도 반응을 할까? 누군가 한 명이라도 이 이야기에 웃거나 울 수 있을까?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가 과연 가치가 있을까?의 문제가 저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지난 토요일, 현기증 소설 클럽의 온라인 발기식 때 “남들에게 무슨 소리를 듣든 상관 없어,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내 멋대로 쓰겠다” 는 설님의 선언을 듣고 나니, 수십 년 묵은 체증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게, 에세이는 그렇게 써왔으면서 소설은 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무엇보다 제게 이제 두 사람의 신뢰할 수 있는 독자가 생겼다는 것이 든든해도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똥으로 메주를 쒀도 ‘그래, 그냥 니 맘대로 해. 니가 쓰고 싶다는데 누가 말려’ 하고 받아들여주실 두 분이 말이지요.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리고 저도 두 분에게 그런 독자가 되어드리려 마음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좀 더 확실해진 마음을 안고 저만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러 가지 일들에 치여 거북이가 기어가는 속도로 겨우 겨우 전진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면서 저는 과연 내가 쓰고 싶은 스타일의 소설은 무엇일까? 아니 내가 쓸 수 있는 스타일의 소설은 무엇일까? 를 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개의 이름들이 떠오르더라고요. 레이먼드 카버, 박완서, 마스다 미리 그리고 앤 타일러. 쓰고 나니 너무 부끄럽습니다. 마치 미장원에 가서 제니(나의 질투 대상…)의 사진을 들이밀며 “제니랑 똑같이 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그렇지요.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저 거장들의 발끝에도 닿지 못할 거라는 거, 저도 잘 압니다. 그래도 뭐 오르고 싶은 산봉우리를 위에 두고 그 둘레를 돌며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도 꽤 좋으니까요.


그 중에서도 오늘 저는 앤 타일러의 소설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 보려고 해요. 설님, 앤 타일러의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저는 앤 타일러의 광팬은 아닌데, 그래도 앤 타일러의 소설을 읽을 때면 ‘아아, 이런 것이 소설인가 봐’ 라는 마음이 들곤 합니다. 레이먼드 카버와 박완서는 아무래도 좀 날카롭지요. 그들의 소설에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대단히 강하게 드러납니다. 마스다 미리는 그 친근함과 사소함을 닮고 싶은데 아무래도 만화와 소설에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앤 타일러의 책을 읽다 보면 미국 시골 마을의 어둑어둑하고 시원한 식당에 앉아서 입담 좋은 웨이트리스 아주머니에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그러게요, 그런 것이 바로 소설 아닐까요.


“내가 시험삼아 참치 냄비찜을 만들었지요. 그리고 저녁상에 내놓고는 ‘맛있지 않니? 솔직하게 말해봐’ 했죠. 그랬더니 데이지가......”
눈물 때문에 매기는 눈가가 쓰라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지는 이렇게...... 너무나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한동안 나를 찬찬히 뜯어보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는 ‘엄마, 엄마의 생애에서 이런 일상적인 것에 만족하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심한 순간이 있었어요?’ 라고 말했어요.”
(중략)
“그 말이 내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던지.”
“물론이죠. 그랬을 거예요.”
메이블이 위로했다. 그러고는 커피잔을 매기에게 더 가까이 밀어놓았다.
“그야 당연하죠.”
“내 말은, 나 자신에게는 나도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말이죠.”
“아무렴요.”

-<종이시계> 중에서


앤 타일러의 소설 중에서도 저는 <종이시계>와 <아마추어 메리지>, 그리고 <우연한 여행자>를 가장 좋아합니다. 앤 타일러의 소설은 별 것 없는데도 어머 이거 왜 재미있는 거지? 하고 계속해서 읽게 되는 매력이 있어요. 그건 마치 제인 오스틴의 힘과 같지요.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소설이 “아주 가는 붓으로 작업을 하여 많은 노동을 한 뒤에도 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아주 작은 (5센티미터 폭의) 상아” 라고 했대요.(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 나오는 구절이에요.) 앤 타일러 역시 마치 평범한 가정집에 쓸 이불 위에 수년동안 수를 놓는 사람처럼, 촘촘하고 섬세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또 씁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앤 타일러의 소설이 국내에서 별 인기가 없다는 점과, 출판사며 표지며 일관성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심지어 소설의 가치가 절하될 정도로 심각한 표지 디자인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누군가 돈은 많은데 쓸 데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앤 타일러의 전집을 좀 멋지게 디자인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아, 모든 인간은 결국 다른 모든 이들을 잃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오늘 같은 날은 너무도 슬프다. 매기는 1년 이상 세레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고, 심지어는 세레나가 어젯밤에 울며 전화할 때까지 전화 한 통도 한 적이 없었다. 세레나가 어찌나 격렬하게 우는지 매기는 이야기의 절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풍이 따스한 물처럼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살랑대며 흘러가는 이 순간, 매기는 시간의 흐름이 빚어내는 이 모든 일들을 참아내기 힘들다고 느꼈다. 매기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세레나, 이런 것들을 한번 생각해봐.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거 말이야. 우린 맨발로 걸을 때 결코 점잔빼지 않기로 약속했지. 우리는 수영은 않고 해변에 드러누워 살이나 태우고 있진 않기로 약속했지. 수영을 하면서도 손질한 머리를 적시지 않으려고 턱을 높이 쳐들지도 않을 거라고. 또 저녁 먹은 즉시 설거지를 하지 않기로 했지. 그 설거지가 우리와 남편 사이를 떼어놓을 거라고 말이지. 기억 나니? 그랬는데 맥스와 함께 있기 위해 설거지를 다음날 아침까지 미룬 게 얼마나 되지? 네가 자기와 시간을 보내는 대신 설거지를 한다는 사실을 맥스가 눈치챈 지는 얼마나 되지?

-<종이시계> 중에서


앤 타일러가 주로 쓰는 것은 결혼생활에 대한 것이에요. 앤 타일러는 결혼생활이라는 인간관계가 가장 흥미롭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그래요. 저는 남편에게 제 책을 보여주지도 않고, 남편이 저의 개인적인 활동에 대해 아는 것도 싫어하고(그는 제가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모릅니다. 남편 친구가 남편에게 알려줘서 책이 나온다는 사실도 알 정도예요), 일에 관련된 고민을 나누거나 의논을 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저에게 불필요한 존재라는 뜻은 아니에요. 그는 저의 베개나 소파, 늘 쓰는 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밖에서 제가 어떤 인간이건, 저는 집에 돌아오면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그릇에 밥을 담아 먹고 베개를 베고 잠이 드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소파와 그릇과 베개는 저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것이지만, 그것들이 제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러나 이야기를 쓰다 보면 저는 대개, 어떤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저조차도 의아할 정도로 수많은 부부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어쩌면 저는,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 기묘한 관계에 대해서 탐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종종 뚫을 수 없는 유리막과 같은 아이러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보면서, 이 지상에서 진정한 변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남편을 바꿀 수는 있어도 상황은 바꿀 수 없다. 사람은 바꿀 수 있어도 상황의 본질은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세상은 마치 저 유원지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작고 푸른 찻잔 같고, 사람들은 모두 원심력에 의해 제자리에 고정되어 앉아 있을 뿐이다.

-<종이시계> 중에서  


앤 타일러의 소설 속 사람들은 아주 느리게 변화합니다. 그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달라지는 과정들이 쉽고 간결하고 때때로 유머러스한 문체 속에서 펼쳐지지요. 저는 앤 타일러의 이렇게 야심 없는 태도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심지어 인터뷰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은둔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네요. 그야말로 이 사람은 소설 쓰기를 사랑해서 소설을 쓰는 사람일 거예요. 숨 쉬듯이 이야기를 쓰는 사람. 그런 것을 생각하면 그저 아득해집니다.


설님. 제가 소설을 쓴다면, 저는 앤 타일러와 마스다 미리를 뒤섞은 것 같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앤 타일러처럼 장인 정신이 느껴질 정도의 작가가 되기에 저는 진득하지를 못합니다. 마스다 미리처럼 누구에게나 사랑받기에는 좀 괴팍하지요. 저는 이 두 사람의 평범함을, 평범한 속의 비범함을 닮고 싶어요. 닮고 싶어한다 한들 저는 결국 저로, 한수희라는 사람으로 남겠지요.


제가 글쓰기 수업에서 늘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말이에요, 그건 바로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따라해 보라는 거예요. 그 이유는요, 아무리 따라해도 따라할 수 없는 부분들, 그 작가와 교집합을 이루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을 텐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개성이기 때문이에요. 바로 그것을 발굴하기 위해 우리는 거기까지 가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말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기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네요.


12월 13일

소설을 쓰는 수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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