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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Dec 26. 2022

레이먼드 카버 Raymond Carver

소설을 대하는 시크한 태도



수희님 안녕하세요

날씨가 무척 춥습니다. 저는 그동안 궂은 날씨를 핑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책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꽤 여러 권 읽은 것 같지만 사실 이것저것 집적거리기만 했어요. 지난번 편지에 소개해주신작가 앤 타일러의 오래전 소설 [우연한 여행자]를 꺼내 아무 데나 펼쳐 읽기도 했고요. 최근에 알게 된 중국인 작가 저우 다신의 소설 [우아한 인생]도 읽다 말았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을 읽었습니다. 그 소설들 중 [상자들]이라는 제목의 단편에 확 꽂혀서는 앉은자리에서 무려여섯 번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어요.


이번 편지는 어째서 근황 토크도 없이 좋아하는 소설가와 그가 쓴 어떤 이야기로 바로 진입했을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수희 님과 소설 쓰기를 해보자고의기투합했던 일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재미로 시작했지만 저의 성격상 재미로만 여기지 못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몇몇 소설가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레이먼드 카버였습니다.(감히 단편 소설의 대가를 떠올리다니. ㅎㅎ)



레이먼드 카버.... 저는 알코올중독자였던 이 소설가를 좋아합니다. 알코올중독자라면 치를 떨지만 이 작가만은 예외입니다. 그만큼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뜻일 겁니다. 레이먼드 카버와 술에 관한 일화는 수없이 많지만 여기에 언급할 마음은 없습니다. 자신이 남긴 말만 옮기겠습니다.


나는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습니다. 알코올중독이 심해지면 자신에게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굳이 구체적인 것들을 예로 들으라 한다면, 경찰과 비상 응급실과 법정 같은 것이 자신의 가까이에 있게 되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그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의 소설을 씁니다. 적어도 내가 읽기엔 그래요. 조금 이상하고 야릇한 이야기를 씁니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지요. 그의 아버지는 제재소에서 톱에 줄질 하는 일을 주업으로했고, 어머니는 조그만 가게의 점원으로 일했지만 어떤 일에도 진득하니 붙어있진 못하는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였답니다. 부엌 싱크대 아래에있던 상자에 신경안정제 한 병을 놔두고, 매일 아침 두 스푼 가량을 복용해야만 하는 사람이었고 아버지 또한 위스키로 안정을 취하던 사람이었다고 해요. 자그마한 침대방 두 개가 전부였던 가난. 어렸을 때는 정말 수 없이 여러 번 이사를 했답니다. 이사를 수없이 다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쓴 소설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상자들]이라는 소설입니다.




소설 [상자들] 속 주인공의 엄마는 카버의 현실 어머니처럼 이사를 자주 합니다. 병적으로 이사를 감행해요. 그 상황 묘사가 너무나 재밌어서 웃음이 나오지만 이내 웃음이 쏙 들어가게 슬퍼지거나 어이가 없어져요. 읽다 보면 주인공 남자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어 집니다. "괜찮을 거야. 엄마가 이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니. 이제 의연하게 대처할 때도 됐잖아..." 하면서요.


이사하기로 하고 나서 하루이틀 내에 어머니는 상자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게 지난 1월이었다. 아니 어쩌면 2월, 어쨌든 지난겨울 언젠가였다. 그리고 지금은 6월 말이다. 상자들은 몇 달째 어머니의 집 여기저기에 터를 잡고 있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려면 상자를 돌아가거나 넘어가야 한다. 이건 누구의 어머니라도 사는 꼴이라고 할 수 없다. 77P


어머니는 늘 짐을 싸는 또는 푸는 과정 중에 있었다. 가끔 같은 해에 두세 번 이사하기도 했다. 떠나는 곳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이야기하고 가는 곳에 대해서는 낙관적으로 이야기했다. 우편물이 엉키고 보조금 수표가 다른 곳으로 가는 바람에 그 모든 걸 바로 잡으려고 몇 시간씩 편지를 썼다. 가끔 어떤 아파트에서 나와 몇 블록 떨어진 다른 아파트로 갔다가 한 달 뒤에 이사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가기도 했다.같은 건물에 층이나 방향만 달라졌다. P82



급기야 주인공은 자신의 어머니가 이사하면서 돌아다니는 기운에 사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게 뭔가 할 일을 주는지도 모르고 괴상한 즐거움 같은 걸 얻는 것이 아닐까 짐작하면서... 그러나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하죠. 왜 그렇게 제정신이 아니냐고 엄마에게 말하지 못해요. 말한다고 이사를 계획하고실행하는 일을 멈출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아들은 그런 엄마를 싫어하면서도 사랑하고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걱정하면서 엄마와의 마지막을 꿈꾸고 있어요. 그저 짐이나 싸고 이사나 다니는 이 사소한 이야기를 저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카버가 여덟 살 때의 일화를 이야기 한 인터뷰가 기억났어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카버는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길기다리며 버스정류장에 나가 있곤 했대요. 아버지는대개 똑같은 버스를 타고 오셨지만, 이 주일에 한 번씩은 그 버스에 타고 있지 않을 때가 있었답니다. 어린 카버는 그때마다 끈질기게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서 있곤 했지만 아버지가 다음 버스로도 오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답니다. 아버지는 제재소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러 가셨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요. 그런 날은 어머니와 카버, 어린 동생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앉아 있던 저녁 식탁의 모습과 분위기는 절망과 음울함 그 자체였답니다. 그는 그때의 기분을 성인이 되고 난 후로도 오랫동안 아니, 평생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수희 님 저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카버의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을 듣고는 눈물이 나고 말았답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아... 이 사람은 할 이야기가 무척 많겠구나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대개의 어린아이들이 그렇듯 아버지를 그리고 엄마를 많이도 사랑했었구나 하고 느꼈고요 그 사실이 무척이나 애달프게 느껴졌어요. 그러면서 그동안내가 읽은 카버의 소설 그 기이한 이야기들,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눈물도 안 나오는 그 이야기들이 시작된 지점을 알게 되었어요. 아버지로부터 들은 도덕이 결여된 진짜 이야기들, 아버지 자신이 방황하고 다닌 이야기. 시시껄렁한 짓을 하던 일화들. 그런 생생한 이야기들이 그로 하여금 쓰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수희 님 가능하다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꾸며낸 이야기 말고, 대부분의 작가들도 그렇겠지만 내 이야기를 모티브로 쓰고 싶어요현실세계인지 소설인지 모를 이야기. 백 프로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내가 듣거나 겪었던 또는 목격했던 사건이 이야기가 되는 거죠. 최소한 현실적인 경험에 근거한 픽션이라고 봐야겠죠. 쓸 이야기가 얼마나 없으면 그런 정도의 이야기를 쓰려는 건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걸 알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이야기에 호감을 갖고 있어요.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쓰려면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거기에 상상을 더해 색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내려면실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건 말할 것도 없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솔직함일 거예요. 아... 수희 님... 정말이지... 자서전적 요소 조금과 풍부한 상상력을 많이 결합시켜 재미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내게 그럴 능력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수희 님 내가 카버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지닌 어떤 가벼움 때문입니다. 그의 그런 천성은 문학과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데요. 저는 레이먼드 카버의 이러한 여유와 시크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예술은 일종의 오락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제작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 둘다에게 있어서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예술이 당구를 치는 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것 또는 볼링을 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일종의 사치라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나를 그리고 내 인생을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결국 나는 예술이란 아무것도 실제로 일어나게 만들지 못한다는 확고한 깨달음에 이르렀던 거지요. 소설이나 희곡 또는 시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또는 심지어 그들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들을 바꾸어놓을 수 있었던 시대는, 설령 그런 시대가 과거에 실제로 있었다 할지라도, 이젠 지나갔습니다. 픽션은 단지 우리가 그것을 취할 수 있는 즐거움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말-



2022.12.26


소설 쓰기는 시작도 안 한 김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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