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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후 Mar 24. 2021

안부

순환선

 사소한 계기로 친했던 사람과 멀어질 때가 있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금 생각해보면,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임에도 그렇다. 형과 내가 그랬다.


 형을 처음 만났던 건 5년 전이었다. 한 미디어센터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편영화 제작 워크숍의 팀원으로 우린 처음 만났다. 그 당시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공장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워크숍을 수강했다. 형은 이미 그 워크숍에서 단편영화를 이미 한 번 만들어 본 사람이었다. 우리는 같이 작품을 만들며 친한 사이가 됐다.


 그 후로 형과 나는 서로의 단편영화 제작을 도우며 가장 친한 친구가 됐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장편영화감독이 되어 인터뷰에서 서로에 관해 얘기하며 웃을 일을 꿈꿨다. 그 꿈은 꽤 달콤했다. 물론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형과 나는 잘 풀리지 않았다. 


 난 영화를 계속하겠다는 마음으로 독립 장편영화 연출부 일을 시작했다. 막상 들어가 본 영화 현장은 생각과 다른 일이었다. 내가 꾸던 꿈의 이면을 보는 일은 씁쓸했다. 우습게도 세 편의 연출부 생활과 4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난 작품을 찍지 않았다. 해내야만 한다는 마음은 허울뿐인 말뿐이었고, 난 계속해서 도망쳤다. 현실과 부족한 나 자신에게서.


 형은 그 후로 짧은 단편영화 두어 편을 제작하고, 영화 현장을 몇 번 경험한 뒤 영화를 그만뒀다. 그 후 영상 편집 학원에 다니며 공부해 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그 회사에도 그다음 회사에도 형은 버티지 못했다. 끊임없이 자책하는 형의 모습을 보며 난 형이 왜 버티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너무 잘 이해했기에 외면하고 싶었다. 형의 모습에서 나를 봤기 때문이었다.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때로는 가장 싫어하는 것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난 결국 형에게서 도망쳤다. 나에게 오는 형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일방적인 거부와 단절이었다. 난 형에게서 도망쳤고, 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에서 도망쳤다. 서른에 가까운 나이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신에게서 도망쳤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서 도망쳤다. 나를 좋아해 줬던 사람들에게서 도망쳤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서 도망쳤다. ‘도망치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때론 도움이 된다.’라는 드라마 제목처럼, 현실 도피는 꽤 도움이 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안전했다. 그렇게 껍질 안에 숨어 가만히 있는 나날들이 지나갔다. 그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난 서른이 됐다.


 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나에겐 끝낼 게 없었다. 포기할 게 없었다. 난 시작을 한 적 없으니, 끝도 포기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결정했을 무렵 내가 외면했던 것들을 비로소 돌아보면서 지나온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형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했다. 한 사람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는 일은, 자신이 그걸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친구의 말을 들었다. 나 역시 그랬다. 그 관계를 버틸 수 없었고, 나아가 그 관계 속 나의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난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인 동생이었던 나는 형에게 부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잘 지내?’라는 전형적인 안부의 말로 시작하는 편지를 썼다. 마음을 담은 그 편지를 메시지로 형에게 보냈다.


 장문의 카카오톡을 보낸 뒤 멍하니 밤의 풍경을 바라봤다. 메시지에서 사라지지 않는 1을 멍하니 바라봤다. 결국 기다리다 지쳐 잠들 때까지 1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형에게 온 메시지는 없었다. 커피를 내리고 아침을 먹었다. 그러는 틈틈이 핸드폰을 열어봤지만 아무 알림도 떠있지 않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책상에 앉아 이 글의 초안을 썼다. 형이 답을 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아프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저 내 마음을 전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동안 글을 쓰던 중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봤다. 친숙한 이름의 알림이 떠 있었다. 처음엔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핸드폰을 껐다가 킨 다음, 다시 알림 창을 확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밝은 화면 위에 떠 있는 메시지 알림 하나를 발견했다. 보고 싶었던 형의 이름으로 온 메시지였다. 난 그렇게 일 년 만에 형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었다.


 때론 사소한 계기로 멀어지는 것들이 있다. 그 끝에 멈춰있다면 그건 나의 기억으로만 남아 지나가버린 일이 된다. 하지만 그 끝을 다시 마주해본다면 어쩌면 새롭게 시작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삶에서 어떤 것들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니까. 아직 시작하지 않았을 뿐이니까. 그렇기에 이제는 안부를 전해보고 싶어 진다. 내가 떠나온 사람들과 기억들에게.



글쓴이: 순환선

소개: 스쳐가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매거진 '추후'

이제 막 서른이 된 친구들이 모여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영화,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서른의 시선을 담은 글을 매주 [월/수/금]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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