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선
파주라는 도시는 어떤 이미지일까? 아마 헤이리 마을이나 프리미엄 아울렛과 같은 곳에 한 번쯤은 들려보지 않으셨을까 생각한다. 파주를 대표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공간 모두 뭔가 즐기기 위해 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파주는 사람들에게 어떤 곳에 가보기 위해서 가는 도시일 뿐, 특별히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진 않을 거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파주의 이미지는 다르다. 왜냐하면 난 파주에 산 지 이제 햇수로 7년 가까이 된 파주 생활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확히 7년이라고 할 순 없는데, 그동안 여러 이유로 파주 본가를 떠나 곳곳에서 자취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이동 시간 때문이었다. 파주에서 서울을 종로를 기준으로 좌우로 나눴을 때 우측에 있는 장소를 간다고 하면, 두 시간은 잡고 나가야 한다. 왕복한다고 치면 그야말로 여행길이다. 파주에서 산다는 건 긴 시간을 이동에 쓴다는 걸 의미한다. 내게 파주는 시간을 잡아먹는 도시였다.
왕복 네 시간의 통학을 하던 대학교 시절, 비가 오는 날이면 벽에 물이 새는 고시원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저 몸을 어딘가에 실은 채 하염없이 창문 밖 풍경만 보던 시간 때문이었다. 그땐 이유 없이 시간을 죽이는 일을 반복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떻게든 학교 가까운 곳에 살고 싶었다. 그 고시원에서 살던 시절은 사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어찌 됐든 그 이후에도 난 어떻게든 파주에 있는 집에 살지 않아도 될 방법을 찾아 파주를 떠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지금도 난 파주로 향하는 광역버스에 몸을 싣고 멍하니 창문 밖을 보다가 이 글을 쓰고 있다. 여러 집을 전전하다 다시 파주로 돌아왔다. 여러 현실적 이유가 있지만 난 미신을 많이 믿는 편이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하는 때도 있다. 파주가 날 끌어당기고 있는 거라고. 경기도에서 손꼽힐 만큼 넓은 이 땅이 날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떠난 곳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건 분명 파주와 나 사이에 작용하는 어떤 신비한 인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파주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 미신 같은 생각은 계속됐다. 대표적인 계획 신도시인 일산과 인접해 있다 보니, 파주도 내가 성인이 될 무렵 차차 개발을 시작했다. 대략 8년 전, 일산에 살고 있던 나와 어머니가 함께 이사를 왔을 때쯤, 본격적으로 파주에 신도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때만해도 파주는 사람들 이미지 그대로 허허벌판의 도시였다. 처음 이곳에 발을 붙였을 때가 생각난다. 경의선 지하철을 타고 내려서 보이는 그 넓은 벌판. 아직 공사를 진행하느라 바닥의 흙과 모래가 그대로 노출된 인도들. 도로의 틀은 잡혔지만 한 대도 없는 차량. 파주의 첫 이미지는 나에게 마치 서부 개척시대에 황량한 벌판과 같았다.
이런 좋지 않은 첫인상에도 불구하고 내게 파주라는 동네는 이동 시간을 제외한다면 꽤 살기 좋은 도시다. 첫인상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지만, 파주에 산다는 건 마냥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7년 동안 종종 파주에 살면서 내가 느낀 점은 교외의 평화로운 주거지역이라는 점이었다. 교통 체증이 없는 도시, 산책하기 좋은 도시였다. 도시 개발 계획에 의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찌 됐든, 파주는 서울과 일산에 터를 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거대한 주거 도시가 됐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그 도시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파주에서 실제 생활하는 사람들이 모일만한 대형 마트에 가보면 파주라는 신도시가 가진 특징을 알 수 있다. 그곳은 신혼부부들의 나라였다. 출산율이 바닥인 현재 대한민국에서 난 서울에서 그렇게 많은 신혼부부와 아이들을 본 적이 없다. 파주의 곳곳은 아이들과 신혼부부를 위한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가게에서 아이들 놀이터를 찾아보기가 쉽고, 그 외에도 아이나 아이를 키우는 신혼부부를 위한 가게들이 많다. 난 파주에서 도시는 이처럼 사는 사람들에 맞춰 변화한다는 걸 목격했다. 이런 풍경을 보다 보면 아이를 키운다면 파주에 계속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파주의 장점은 바로 문화다. 차를 타고 외부로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파주로 진입하게 되면, 내비게이션에서 이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문화 예술의 도시, 파주입니다.’
사실 난 그럴 때마다 코웃음을 치곤했다. 내게 파주는 베드타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산도 십 년이면 변한다. 파주는 문화 예술의 도시라는 슬로건에 맞춰 나아갔다. 헤이리 마을과 파주 출판도시를 거점으로 단순한 주거 공간에서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도시가 되기 시작했다. 일이 있어서 잠깐 출판도시에 가보면 예전과 다른 모습에 놀랄 때가 있다.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 앞에서 사진을 찍는 가족과 연인의 모습을 보는 게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파주는 변했다.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사는 사람들이 뭔가를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도시가 됐다.
7년 동안 파주는 내게 그저 떠나고 싶은 공간이었다. 답답함이 느껴지는 곳이었기에 난 늘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곳에서 살아온 시간이 길어지면서 난 이 도시와 나 사이에 생겨나는 유대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한가한 시간에 거닐던 공원 산책, 운동을 위해 자전거를 타면서 내 나름대로 만든 코스. 어쩌면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쌓은 시간이 나를 붙잡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난 늘 파주를 떠나고 싶었지만, 어쩌면 파주는 변하고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내게 말을 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버스가 어느새 파주의 신도시에 있는 종착역에 도착했고 난 버스에서 내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난 이곳, 파주에 살고 있다고.
글쓴이: 순환선
소개: 스쳐가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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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서른이 된 친구들이 모여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영화,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서른의 시선을 담은 글을 매주 [월/수/금]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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