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랜덤 박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후 Apr 23. 2021

파주 생활자의 수기

순환선

 파주라는 도시는 어떤 이미지일까? 아마 헤이리 마을이나 프리미엄 아울렛과 같은 곳에 한 번쯤은 들려보지 않으셨을까 생각한다. 파주를 대표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공간 모두 뭔가 즐기기 위해 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파주는 사람들에게 어떤 곳에 가보기 위해서 가는 도시일 뿐, 특별히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진 않을 거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파주의 이미지는 다르다. 왜냐하면 난 파주에 산 지 이제 햇수로 7년 가까이 된 파주 생활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확히 7년이라고 할 순 없는데, 그동안 여러 이유로 파주 본가를 떠나 곳곳에서 자취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이동 시간 때문이었다. 파주에서 서울을 종로를 기준으로 좌우로 나눴을 때 우측에 있는 장소를 간다고 하면, 두 시간은 잡고 나가야 한다. 왕복한다고 치면 그야말로 여행길이다. 파주에서 산다는 건 긴 시간을 이동에 쓴다는 걸 의미한다. 내게 파주는 시간을 잡아먹는 도시였다.


 왕복 네 시간의 통학을 하던 대학교 시절, 비가 오는 날이면 벽에 물이 새는 고시원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저 몸을 어딘가에 실은 채 하염없이 창문 밖 풍경만 보던 시간 때문이었다. 그땐 이유 없이 시간을 죽이는 일을 반복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떻게든 학교 가까운 곳에 살고 싶었다. 그 고시원에서 살던 시절은 사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어찌 됐든 그 이후에도 난 어떻게든 파주에 있는 집에 살지 않아도 될 방법을 찾아 파주를 떠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지금도 난 파주로 향하는 광역버스에 몸을 싣고 멍하니 창문 밖을 보다가 이 글을 쓰고 있다. 여러 집을 전전하다 다시 파주로 돌아왔다. 여러 현실적 이유가 있지만 난 미신을 많이 믿는 편이다 보니 이런 생각을 하는 때도 있다. 파주가 날 끌어당기고 있는 거라고. 경기도에서 손꼽힐 만큼 넓은 이 땅이 날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떠난 곳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건 분명 파주와 나 사이에 작용하는 어떤 신비한 인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파주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이 미신 같은 생각은 계속됐다. 대표적인 계획 신도시인 일산과 인접해 있다 보니, 파주도 내가 성인이 될 무렵 차차 개발을 시작했다. 대략 8년 전, 일산에 살고 있던 나와 어머니가 함께 이사를 왔을 때쯤, 본격적으로 파주에 신도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때만해도 파주는 사람들 이미지 그대로 허허벌판의 도시였다. 처음 이곳에 발을 붙였을 때가 생각난다. 경의선 지하철을 타고 내려서 보이는 그 넓은 벌판. 아직 공사를 진행하느라 바닥의 흙과 모래가 그대로 노출된 인도들. 도로의 틀은 잡혔지만 한 대도 없는 차량. 파주의 첫 이미지는 나에게 마치 서부 개척시대에 황량한 벌판과 같았다.


  이런 좋지 않은 첫인상에도 불구하고 내게 파주라는 동네는 이동 시간을 제외한다면 꽤 살기 좋은 도시다. 첫인상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지만, 파주에 산다는 건 마냥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7년 동안 종종 파주에 살면서 내가 느낀 점은 교외의 평화로운 주거지역이라는 점이었다. 교통 체증이 없는 도시, 산책하기 좋은 도시였다. 도시 개발 계획에 의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찌 됐든, 파주는 서울과 일산에 터를 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거대한 주거 도시가 됐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그 도시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파주에서 실제 생활하는 사람들이 모일만한 대형 마트에 가보면 파주라는 신도시가 가진 특징을 알 수 있다. 그곳은 신혼부부들의 나라였다. 출산율이 바닥인 현재 대한민국에서 난 서울에서 그렇게 많은 신혼부부와 아이들을 본 적이 없다. 파주의 곳곳은 아이들과 신혼부부를 위한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가게에서 아이들 놀이터를 찾아보기가 쉽고, 그 외에도 아이나 아이를 키우는 신혼부부를 위한 가게들이 많다. 난 파주에서 도시는 이처럼 사는 사람들에 맞춰 변화한다는 걸 목격했다. 이런 풍경을 보다 보면 아이를 키운다면 파주에 계속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파주의 장점은 바로 문화다. 차를 타고 외부로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파주로 진입하게 되면, 내비게이션에서 이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문화 예술의 도시, 파주입니다.’


 사실 난 그럴 때마다 코웃음을 치곤했다. 내게 파주는 베드타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산도 십 년이면 변한다. 파주는 문화 예술의 도시라는 슬로건에 맞춰 나아갔다. 헤이리 마을과 파주 출판도시를 거점으로 단순한 주거 공간에서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도시가 되기 시작했다. 일이 있어서 잠깐 출판도시에 가보면 예전과 다른 모습에 놀랄 때가 있다.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 앞에서 사진을 찍는 가족과 연인의 모습을 보는 게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파주는 변했다.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사는 사람들이 뭔가를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도시가 됐다.


 7년 동안 파주는 내게 그저 떠나고 싶은 공간이었다. 답답함이 느껴지는 곳이었기에 난 늘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곳에서 살아온 시간이 길어지면서 난 이 도시와 나 사이에 생겨나는 유대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한가한 시간에 거닐던 공원 산책, 운동을 위해 자전거를 타면서 내 나름대로 만든 코스. 어쩌면 이곳에서 살아오면서 쌓은 시간이 나를 붙잡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난 늘 파주를 떠나고 싶었지만, 어쩌면 파주는 변하고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내게 말을 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버스가 어느새 파주의 신도시에 있는 종착역에 도착했고 난 버스에서 내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난 이곳, 파주에 살고 있다고.




글쓴이: 순환선

소개: 스쳐가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매거진 '추후'

이제 막 서른이 된 친구들이 모여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영화,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서른의 시선을 담은 글을 매주 [월/수/금]에 발행합니다.


['추후' 뉴스레터 구독하기]

https://maily.so/later/about



매거진의 이전글 동네의 인상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