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함께 모여 매거진을 만들어보기로 했는데, 첫 순서로 영화 리뷰 글을 맡게 됐다. 처음엔 꽤 진지한 리뷰 글을 써봤지만 길이도 길고, 이런 글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쓰고 있는 것인데 내가 굳이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은 뭘까? 그것보다는 내가 쓰면서 재미있는 영화에 대한 글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됐다.
머리를 스쳐 지나간 건 스핀오프였다. 한 영화에서 파생된 또 다른 이야기. 매거진이 시작하는 지금 나 혼자 계획한 이 스핀오프라는 시리즈가 계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흥미롭다고 느낀 곁가지의 이야기를 내 방식대로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서두가 길었다. 이번에 선택한 영화는 한국의 최초 우주 SF, 승리호다.
*
코드명 U2057-P801
U2057-P801. 나를 정의하는 코드였다. 공대공 타격, 오염 지역 침투, 중요 요원 암살. 군용 로봇인 나는 부여받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생산 후 10년이 넘은 나 같은 구형 모델은 퇴역 후 보다 간단하고 소모적인 일을 하게 됐다. 내가 담당하게 됐던 건 폐기장 청소 일이었다.
폐기장 청소는 간단한 일이었다. 57대의 청소 로봇과 67대의 퇴역 로봇이 정해진 구역을 정해진 시간에 청소를 했다. 입력된 코드대로 움직이면 됐다. 그런 간단한 일임에도 간혹 그 날처럼 틀어지기도 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우리 같은 로봇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로봇 역시 인간처럼 불완전했다. 그 불완전함은 인간의 실수 같은 것과는 달랐다. 우리에게 그건 오류였다.
정해진 구역을 청소하던 중, 나보다 3년 먼저 퇴역한 옆 구역의 로봇 U2054-Z107이 오류 코드를 관리실 및 인근 구역의 로봇에게 발송했다.
‘오류 발생. 오류코드, ZU10374-19001.’
오류가 발생하면 폐기장에 대기 중인 운송용 로봇에 코드가 전달되고, 오류가 발생한 로봇은 운송용 로봇에 실려 간다. 나는 운송용 로봇에 실려가는 U2054-Z107를 봤다. 그의 한쪽 팔에서 미세한 전기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의 안구에 해당되는 센서에서 주황색 불빛이 점멸했다.
한 로봇이 고장 판정이 난 다음엔 구역을 재설정하는 작업을 거치게 된다. 대개 인근 구역으로 재편되기 마련인데 그 날은 조금 달랐다. 하필이면 그 날이 새 퇴역 로봇들이 청소 구역으로 배치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난 평소 담당하던 섹터 7의 10번 구역이 아니라, 섹터 11의 13번 구역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섹터 11의 13번 구역은 폐기장의 마지막 구역이었다. 나는 한 번도 배치된 적 없는 곳이었다. 폐기장에 설치되어 있는 이동 레일을 따라 섹터를 이동하며 주변을 봤다. 수많은 고철들이 센서에 포착됐다. 고철들은 레일을 따라 이동해 용광로 안 일렁이는 불꽃 속으로 들어갔다. 군용 로봇이었던 시절, 오염 지역을 침투할 때 포착했던 생명을 잃은 인간들의 시체와 고철은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보고 싶었지만, 로봇에겐 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섹터 11의 13번 구역에 도착한 뒤, 나는 명령대로 미처 파쇄기로 향하는 레일에서 벗어난 고철들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짙은 회색의 타원형 고철을 집어 들었는데, 센서에 한 줄의 코드가 박혔다.
‘U2054-Z107’
로봇의 끝은 여기일까. 로봇에게도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우리의 운명은 결국 이 폐기장에 도착하는 것일까. 생각해보고 싶었지만, 로봇에겐 사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난 그저 그 타원형의 고철일 뿐인 것을 레일 위에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곧 오류가 발생했다. 난 섹터 11의 13번 구역으로 이송됐고, 가만히 파쇄기로 향하는 레일에 오를 순서를 기다렸다. 곧 전력은 차단됐고, 세상은 사라졌다.
*
그렇게 끝이 나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빛이 흘러나왔다.
전력이 공급됐고, 센서가 다시 작동하여 나는 앞을 보았다. 한 인간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뚱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로봇에겐 감정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구성하는 무언가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뭐라고 불러야 될까?”
인간 여자가 나에게 물었다.
“U2057-P801. 제 코드입니다.”
“너무 길어. 앞으론 업동이 하자. 장 선장이라고 불러.”
로봇에게 코드 아닌 이름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나에게 이름이 생겼다. 아마 언젠간 감정도, 사유도 허락될 수도 있지 않을까. 로봇 역시 그런 희망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 끝-
로봇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승리호에서 본 업동이라는 로봇은 그 외향만 떼고 보면 인간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군용 로봇인 업동이를 그렇게 인간적이게 디자인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장 선장이 업동이를 폐기장에서 구했을 때 뭔가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실제로 조성희 감독이 씨네 21과 가진 인터뷰에 업동이와 장 선장의 만남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을 보니 장 선장이 재활용 센터에서 버려진 업동이를 주워 최신형 OS를 설치했고, 그 이후에 업동이에게 꿈이 생기게 된 설정이라고 한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 수많은 AI 관련 영화에서 인간이라는 창조주는 인공지능이라는 피조물을 두려워하게 된다. 어쩌면 언젠가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같은 이야기처럼 로봇의 권리, 인공지능의 권리를 주장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 날은 마냥 디스토피아는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승리호>)
글쓴이: 순환선
소개: 스쳐가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매거진 '추후'
이제 막 서른이 된 친구가 모여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영화,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서른의 시선을 담은 글을 매주 [월/수/금]에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