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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후 Jun 24. 2021

오래된 기억

순환선

 - 허수경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을 읽고


“네 눈이 바라보던/ 내 눈의 뿌연 거울” (<오래된 일>)의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이 아득한 것 같다가, 참혹할 만큼 생생한 일이었다가, ‘나’는 그 기억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 기억의 의미를 알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며, 시간의 무서운 힘 앞에서 언제나 ‘나’는 무력하다는 걸. 허수경 시인이 오래전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 ‘공터의 사랑’ <혼자 가는 먼 집>) 고 노래한 것처럼, 사랑과 세월에 대해서 내내 수동적이고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과 사랑이라는 일의 근본적인 조건이 ‘가사성’이라면, ‘나’는 사라질 수 있거나, 사라진 것들만을 사랑하며, 결국은 미약한 기억의 힘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남은 일은 그 ‘오래된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호명하는가 하는 일, 무엇이 남아 있는가를 살아있는 동안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일. 


 - p.148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 해설 ‘저 오래된 시간을 무엇이라 부를까’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란 시집을 읽으며 기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지만,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기에 현재는 곧 과거가 된다. 현재의 내가 겪는 건 모두 기억이라는 형태로 과거가 될 운명이다. 모든 게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건 순간뿐이고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건 기억뿐이다.


 하지만 이 또한 허울뿐인 가능성이란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문득 지난 연애에 대해 생각하다 순간 당황할 때가 있지 않은가. 그토록 원했던 상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순간들은 점점 흐릿해진다. 떠올리기 위해 애써보지만, 시간 앞에 기억은 무력하다. 고작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때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시간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무력하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사람은 기억하는 존재이면서, 망각하는 존재다.


 사랑하는 일은 곧 기억하는 일이다. 사랑을 실감했던 그 ‘형언할 수 없는 순간’을 끊임없이 붙잡는 일이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건 ‘사라질 수 있거나, 사라진 것들’ 뿐이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력한 기억에 의지하는 것뿐이다. 우리에게 남은 건 ‘그 오래된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호명하는가 하는 일, 무엇이 남아 있는가를 살아있는 동안 묻는 일’ 뿐이다. 


 결국 시집과 해설을 읽고 난 뒤 나는 시인이 우리에게 기억에 관해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기억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그 기억이 우리의 어떤 한 부분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허수경 시인은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사랑을 위해선 그 불안한 기억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여러 기억을 마주한 채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오래되어 시간의 흐름에 침식된 기억을 두고 끊임없이 묻은 먼지를 털어내어 그 모습을 다시 들여다봐야만 한다. 그 기억이 담고 있는 순간의 의미를 끊임없이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 


 사람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그건 언젠가 사라질 존재의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건 기억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순간 그 존재가 이미 사라졌다고 해도 그건 사라진 게 아닐 테니까.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어떤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묻고 또 묻는 시인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시인은 어쩌면 자신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를 끊임없이 호명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어떤 순간이 존재했던 생과 그것이 사라지는 세월의 죽음 사이에서 우리는 글을 쓰는 걸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돕기 위한 기록. 기록에 그 자체로 생명력이 생기는 순간 또 다른 기억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그 순간 기록은 나아가 ‘글’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결국 ‘글’이란 불완전한 기억 속에서 의미를 찾기 위한 또 다른 기억이 아닐까.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도 늘 어떤 존재를 기억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 대상이 무엇이 됐든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 존재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으며. 어쩌면 그렇게 기억한다는 건 곧 그 대상을 사랑한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게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 존재는 영원에 가까울 것이다.



글쓴이: 순환선

소개: 스쳐가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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