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식사를 위해서만 할아버지는 할머니 집으로 올라오신다. 지영이는 두 분 모두 엄청 뚱뚱해서 한 방에서 잘 수 없다 생각했다. 두 개의 방을 가지고 있어서 동네에서는 부잣집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른 층과 다르게 이 건물의 2층은 넓은 공터가 있다. 이 공터가 1층의 천장 역할을 하기 때문에 상가가 몰려 있는 1층은 해가 거의 들지 않는다. 건물을 빙 둘러 여러 곳에 크고 작은 입구가 있고, 1층은 그곳에서 들어오는 빛이 전부인 것이다.
동네 아이들은 건물 밖에 나가서 잘 놀지 않는다. 마치 원형 로터리처럼 건물을 가운데 두고 모든 면이 도로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놀만한 공터는 공용 화장실 앞 공간과 할아버지의 방이 있는 2층 공터뿐이다.
할아버지가 외출이라도 하시는 날은 동네 아이들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질 수 있는 기회다.
여름이면 온 동네 문들이 다 열린다. 할아버지 집의 문도 예외는 아니다.
조용히 놀기를 약속하고 만난다 해도 담방구,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를 하다 보면 흥분한 아이들의 목소리는 조절이 불가능하다.
그 순간, 할아버지는 효자손을 든 오른손을 흔들며 불편한 다리를 끌고, 육중한 몸으로 등장하신다.
할아버지의 무서운 표정과 굵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아이들을 겁먹게 하고 그곳에서 몰아낸다.
" 시끄러워! 시끄러워! 저리 가서 놀아"
온갖 욕을 하시는 할아버지는 금세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다.
아이들이 울면서 집으로 가도 어느 부모 한 명 할아버지에게 불평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지영이는 어른들도 할아버지를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다.
뚱뚱이 할머니가 빠진 어느 날의 점심.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지영이의 집중력은 밥보다 어른들의 대화 소리에 있다. 오늘은 옆집 경아엄마까지 이 잔치에 참여해서 말한다.
"오늘 할머니 기분 안 좋으셔? 점심을 거르시네?"
"조용히 해. 오늘은 아들 생각이 더 많이 나는가 봐"
선미 엄마가 경아엄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친다.
"요즘 자주 그러시네. 잊을 때도 되지 않았나?"
눈치 없이 상추쌈을 입 가득 물고 경아엄마가 다시 말한다. 지영엄마가 고개도 들지 않고, 된장을 찍은 고추를 먹으려다 말고
"언니, 그게 쉬워?"
하며 살짝 눈을 흘긴다.
전쟁을 겪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어릴 때 병으로 큰 아들은 먼저 보냈고, 둘째 아들은 공부도 잘하고 잘 생긴 효자 아들이었다. 취직을 해서 자전거로 출근하다 큰 교통사고가 나기 전까지 두 분의 삶의 행복은 둘째 아들이었다고 한다. 사고로 아들은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고 이후로는 두문불출 술만 마시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지영이는 어른들이 속삭이는 이야기 속 그 한쪽 다리 없는 아저씨가 얼핏 기억나기도 한다.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을까 목발을 짚고 다니는 술 냄새나는 아저씨가 할아버지의 자식이었구나!
그 아들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부모보다 먼저 갔단다. 오늘이 그 아들이 죽은 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자식이 있었구나.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2층의 어두운 그 집은 아들이 살았던 집이다.
어린 지영이는 몰랐겠지. 할아버지가 동네 아이들에게 화를 내도 부모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상처도 공감하는 그들의 유대감 때문이라는 걸.
할아버지는 뛰노는 아이들이 보기 싫었던 게 아니고, 우리를 보면 당신의 아들들이 생각나 괴로우셨던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