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장마는 길고 지루하다.
몸에 달라붙은 끈적한 느낌을 제외하면 난 비, 바람, 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좋았다.
3년 전에는
"전망이 확 트여서 너무 좋다. 여기로 하자"
전망 하나만 보고 이사 온 30년이 다 된 노후된 아파트 꼭대기 층. 처음엔 막힌 것 없는 시원한 시야와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해가 좋았다.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랄까?
아침마다 커튼을 열면서 큰 심호흡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행복했다.
하지만. 낡고 낡은 아파트는 그런 소소한 행복을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난 비가 퍼붓듯 내리면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여기저기서 비가 세기 때문이다.
이사 온 지 6년째 되는 해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천장의 얼룩이 급기야는 줄줄 흐르는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 한 번은 엘리베이터에서 물이 떨어져 그 안에서 우산을 쓰고 내려가야 했다.
안전 불감증 대한민국이라더니 이 라인 사람들은 비 오는 엘리베이터를 아무렇지 않게 타고 다닌다.
'위험해! 타지마'
이런 걱정스러운 외침은 15층을 걸어 다닐 수 없다는
'절대 운동. 따위는 하지 않겠다'
라는 마인드에 잠식당하고 만다.
태풍이 몰아치는 밤. 두꺼비집으로 비가 새어 들어와 우리 집만 전기가 차단된 적이 있었다.
더위와 어둠 공포로 가득 찬 그 밤을 보내고 결단을 내린다.
'좋게는 안 되겠다'
관리사무실에 옥상 누수문제로 3년째 보수를 건의하고 있는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나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보수를 해 줄 수 없는 이유는 참 다양했다.
" 아파트 규약상 옥상 방수 공사는 2025년에 하는 걸로 되어 있어요"
"수선충당금이 부족해서 지금은 어려워요 "
"아파트 관리 기사분들 나이가 많아서 하기가 힘들어요"
"아파트 관리단에 가서 얘기해 봐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폭염이 와서", "비가 더 온다고 하니" 등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없었다.
'지금 우리 집에 비가 내린다고요. 내 마음에도'
3년 동안 관리 소장은 남자에서 여자로 다시 나이 지긋한 남자로 바뀌었다.
모두 1년 안에 그만두었으니 이 오래된 아파트가 얼마나 많은 민원과 보수 요청이 있었을지 짐작된다. 불행하게도 나이 지긋한 관리 소장이 나의 폭격의 상대가 된 건 유감일 뿐이다.
임시방편으로 비가 새는 부분만 풀칠하듯 하얀 테이프와 실리콘으로 땜빵 처리된 모습에 기가 막힌다.
이번엔 전화가 아니라 관리 사무소로 직접 찾아간다.
잘못 산 물건도 제대로 교환 못하는 성격의 나는 면대면으로 따져 볼 생각을 하니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서 곧 쓰러질 것 같다. 사무실 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 한번 하고 노크하고 들어간다.
"소장님. 이건 아니잖아요? 너무 하시네요. 지금 이렇게 하신 게 보수공사라고요?"
"우리 아파트 기사님들이 연세가 다 있어서 위험한 일은 힘들어요.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한 거예요"
"뭐라고요?, 내부 인력으로 안 되면 외부 인력을 써서라도 해 주셔야 하는 게 아니에요. 소장님이 한번 비 내리는 집 살아보세요."
"사모님. 보수 안 해주겠다는 게 아니고. 좀 기다려 달라는 거잖아요."
"차단기도 자주 내려가고 급기야 물이 줄줄 흐르는데 언제까지요?"
사람상대에 능숙한 관리소장은 자기는 해 주고 싶은데 아파트 관리단 측에서 반대한다며 회의에 한번 참석해 달라고 한다.
겁쟁이인 난 관리단과 만남이 떨려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아서 자기가 나가지 못하고 남편에게 부탁한다.
회의가 끝난 밤,
"올여름 보수하긴 틀렸다. 우리 집 만 그런 게 아니라 당장은 힘들데"
설득을 하고 오랬더니 설득을 당하고 왔네.
다음날. 소장에게 다시 전화해서는
"소장님, 제가 구청에 전화하겠어요. 한두 해도 아니고 3년을 여름마다 속상해서 안 되겠어요"
"그건 하지 마요! 구청에 신고해 봤자 나는 서류 만들기 바쁘고, 관리단은 머리 아파요, 그럼 수선이라고 빨리 되겠어요. 서로 좋을 거 없어요"
내가 소장을 협박하고 있는 건가? 소장이 나를 협박하고 있는 건가? 헷갈린다.
"그래요? 그럼 뭔가 대안을 제시해 주세요, 빠른 시일 내에'
1주일 뒤 꼭대기층 창문밖으로 두꺼운 밧줄이 내려지고 보수공사가 시작되었지만 그것도 임시방편이다.
그 여름 진짜 진상아줌마가 되어 봤지만 꼭대기집은 여전히 비가 내렸다.
다음 해 1월 관리소장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엔 마른 몸, 야무진 얼굴에 안경을 쓴. 꼼꼼해 보이는 소장이 새로 왔고, 관리단도 새로 선출되었다. 봄비가 많이 내린 어느 날. 난 다시 관리실로 전화할 수밖에 없었다.
소장은 지금 누수가구 조사 중에 있다며 조사가 끝나면 바로 보수해 주겠다고 말한다.
'이런 거야? 이렇게 쉬운 일인 거였어?
난 3년째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전 소장들은 왜 이렇게 처리해 주지 않았던 거지?'
젖은 천장과 벽지 차단기까지 모두 손해배상청구 할 수 있다지만, 14년이나 살았으니 도배는 차치하고 차단기만 교체해 달라고 했다.
올 장마에는 꼭대기 집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
다시 비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