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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연 Aug 29. 2024

나는 몸으로 때우는 며느리다.

서글프지만 현실이었다.

누구에게나 삶의 보릿고개가 있다.

그것이 언제, 얼마만 한 크기로, 어느 정도의 시간으로 지속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내가 견디어 낼 수 없을 만큼 큰 것이 아니길 바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3평 전셋집에서 시동생까지 데리고 시작한 결혼생활이지만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퇴근 후 젊은이 셋이 즐기는 삶은 재미 그 자체였다. 매일이 마치 친구들과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큰 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으로 힘들어하는 나  때문에 시동생은 다시 시댁으로 들어갔고, 철없던 내가 아이 핑계로 일을 그만 두자 남편의 수입이 우리 가정 수입의 전부가 되었다.


때마침 사회 전반적으로 경제 상황이 나빠졌다. 남편 회사도 어려워지고 월급이 들어오지 않게 되면서 아끼고 아끼는 삶이 시작되었다.  


나의 보릿고개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틀렸다.




결혼 초부터 한 달에 두 번은 시댁에 가던 습관이,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는 주말은 다른 약속 없이 무조건 시댁행이었다. 어쩜, 친정과 가까이 사는 것이 남편에게 미안해 더 자주 방문했을지도 모르겠다.


시댁 방문은 어린아이들에게 자연을 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식료품 절약의 한 방법이기도 했다. 한 겨울을 제외하고는 농사짓고, 텃밭이 넓은 시댁은 고개만 돌려 찾아보면 천지가 먹을거리이기 때문이다.


미약한 우리 부부가 시댁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은 몸으로 때우는 일뿐이었다. 남편은 트랙터를 끌고 논으로, 나는 넓은 차양모자를 쓰고 어머님과 밭으로.

계절마다 할 일은 넘쳐났다. 또, 내가 한 만큼의 먹을거리도 생긴다.


봄에는 녹기 시작한 땅을 뚫고 나오는 냉이 달래 쑥을 캐고, 날이 더 따뜻해지면 마늘을 뽑은 밭에 고추를 다시 심는다.


여름이면 이른 감자를 캐고 심어놓은 고추, 상추, 가지, 오이, 토마토, 옥수수를 딴다. 

땀으로 흠뻑 젖어가며 하는 밭일은 고추와 상추 오이를 반찬삼아 는 점심으로 상쇄된다.

밭에 열린 먹거리들은 건강에 좋을지 모르지만, 수확을 위한 여름노동은 참 고되다.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면 뒷마당을 넓게 차지하고 있는 밤. 대추. 떫은 감을 딴다.

고구마도 캐서 잠시 묵혀두면 맛이 배가 된다.

들깨를 베어 처마밑에 세워 말린 후 마당에 펼쳐 턴다, 콩 역시 그러하다

판매를 위해 재배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 양이 많지는 않아 가족들의 손이면 충분하다.


추석이 다가오면 아버님이 수확하여 주시는 햅쌀 40킬로그램을 차에 싣고 오면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 된다. 가을 노동 중 내가 해보지 않은 것은 그 계절이 저물어 갈 때 수확하는 도라지 캐기다.

도라지는 캐는 것도 일이지만, 손톱 끝을  물들여 가며 까는 것도 일이다. 


겨울이면 동네 전체가 품앗이로 김장을 한다. 주말이면 오전 오후 두 집을 품앗이하는 경우도 있다.

으레 이웃하여 있는 시댁 큰 집과 동시에 하는 것이 일상이다. 한 겨울 식량이 되어줄 김치를 어려운 친정에도 한 통 가져다 줄 요량으로 열심히 속을 싼다.

11월에 하는 이 행사가 끝나면, 따뜻한 거실 한쪽 콩나물시루에서 키워먹는 콩나물에 물 주는 일을 제외하고는 3월까지 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


할 일 없으면 시골 가서 농사나 지어



이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일주에 한번 가서 몇 시간 하는 일 말고도 농사란 것이 7일 내내 할 일이 많다.

휴일 없이.

내가 한 밭일은 시부모님이 하시는 농사일에 비하면 일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아주 잠깐의 노동일뿐이다.


시동생이 결혼하고 동서가 생겼다.

시동생 부부는 우리와 다르게 자기 소유의 넓은 집에서 시작했다. 아버님이 많이 도와주셨기에 시동생이 결혼할 때쯤 나는 시댁에 대한 서운함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그즈음엔 아버님의 보릿고개가 끝나갈 무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어머님 집에 김치 냉장고가 한대 더 들어와 있다.

거실에는 이미 한대의 김치 냉장고가 있었던 터였다.


"어머님, 김치 냉장고 하나 더 사셨어요?"


라는 내 물음에 대답은 시동생이 한다.


"형수, 내가 하나 넣어 드렸지, 몸으로 백날 와서 때우는 거 소용없어. 이런 거 하나면 다 만회해"


말문이 턱 막혔다.

'시댁에 자주 오는 일 잘하는 며느리'라는 훈훈한 미담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몸으로 때우는 며느리'란 프레임은 별로다.

시동생 눈에 난 능력 없어 몸으로 때우는 염치없는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어릴 때 만나 누나 동생 하던 사이라 나와 시동생은 존칭을 잘 쓰지 않는다.

농담도 잘하고 허물없이 지내던 시동생인데 오늘따라 하는 말이 내 귀에 달갑게 들리지 않는다.

난 밭에 나가 고추 따고 왔는데, 집 안에 들어앉아 있다가 하는 소리가 뭐라고?

화가 나는 건지, 아님 헐렁한 어머니 바지를 입고 땀으로 범벅된 내 모습이 부끄러워 민망한 건지 복잡한 심정이었다. 시동생 말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몸으로 때우는 건 실물로 남지 않을 테니.


지금 내 인생이 몸으로 때우는 인생이구나!

실감 나게 해 준 시동생의 말이 한동안은 귓가에 머물러 계속 곱씹게 되었다. 어리석은 자존심이 발동해 시댁 가기를 꺼려하고, 시동생과의 눈 맞춤이 한 동안은 어색했다.

시동생 '너에게도 보릿고개가 올 수 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런 철없는 형수는 담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보릿고개가 이제는 끝나가는 듯하다.

배부르고 등 따시니 서운했던 감정도 욕심으로 배 아팠던 감정도 조금씩 희석되어 간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여전히 몸으로 우는 인생도 더불어 살고 있다.  뭐 하나 들이밀어 놓고, 할 일 다 했다는 생색은 내 스타일 아니니까.


나는 오늘도 나의 노동으로 얻은 고춧잎을 삶아 잠시 물에 우린  후. 마늘, 소금, 참기름, 깨소금으로 버무려 내고. 지천에 퍼져있는 호박잎을  따 적당히 쪄내어 조촐한 저녁상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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