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12

12

by 능선오름

멋진 신세계 12.


다음 날.

주인이 집을 나가고 난 이후 나는 새로 샤워를 하고 파워플랜트로 향했다.

여느 날 밤처럼 주인은 내게 괴이한 자세와 복종을 요구했고

나는 프로그램된 대로 주인의 성적 취향에 맞춰 반응을 하였다.

때로 주인이 내게 요구하는 것 들은 강인한 기능의 육체로 이루어진 나로서도,

인장강도나 압축강도, 마찰계수가 지나쳐서 일부 피부조직이 훼손되거나 벗겨질 정도로 거친 경우도 있었다.


본사의 AS 사례를 찾아보면 간혹 리스된 에바 중 주인의 지나친 정도가 심하여,

아예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손상이 되거나 신체 일부가 분리되는 경우들도 적지 않다는 데이터가 있다.

물론 그 경우 리스 주인에게 배상이 높게 청구되므로 대부분은 주의 하긴 하지만.

최근 들어 주인의 가학 성향이 높아져서 내 피부도 손상되는 경우가 많았고,

자가 재생 능력이 있긴 하지만 몸 이곳저곳이 하얗게 벗겨지는 경우의 빈도가 높아졌다.


우리 신인류의 피부에 흐르는 혈액은 기본적으로 적혈구가 없다.

산소를 호흡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온도를 조절하기 위한 나노소자들과 인공피부에 침입할 수 있는 바이러스나 세균의 오염을 막기 위한 백혈구 기능의 나노소자들로 채워져 묽은 기름과 같은 색을 띤다.

피부가 벗겨지면 재생 소자들이 활동하는 동안 공기와 접촉한 나노 혈장들이 하얗게 변하여 보호막을 형성한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이지 않은 섹스를 거치고 나면 이곳저곳이 하얗게 덮이기도 한다.


이전에 그런 현상에 대하여 아무런 논리적 판단을 해 본 경험치는 없다.

그런데 유독 오늘 아침은 내 논리회로에 뭔가가 거슬려서 굳이 샤워를 반복하여 혈장을 씻어내고,

일종의 페인트라고 할 수 있는 피부 재생 키트를 이용하여 벗겨진 피부를 정상 피부색에 가깝게 조율하는 나 자신이 논리적으로 판단되진 않았다.

이건 보통 인간 여자들이 하는 '화장'이라는 불필요해 보이는 치장 행위가 아닌가.

목적이 분명하게 설계된 내가 나를 보는 인간에게 뭔가 좋아 보이려는 목적으로 치장을 한다는 것.

이것부터가 인공지능 답지 않은 비논리적 행위다.

나는 내 논리회로가 아무래도 뭔가 큰 버그가 생겼다는 추론을 하면서 건물 뒤 파워플랜트로 갔다.


새비지는 밤을 꼬박 새운 모양이었다.

벌겋게 충혈된 두 눈이 그런 예측을 가능하게 했다.

인간은 그런 육체적 능력에서 우리 신인류 보다 취약하다.

새비지는 내가 가져간 빵과 커피를 먹고 마셨다.

에너지를 섭취하는 방식도 인간은 너무 복잡하고 취약하다.

태양에너지와 토양의 미네랄을 흡수하여 자라는 식물을 오랜 시간 키우고,

그 식물을 다시 가공하여 인간이 섭취 가능하게 바꾸고,

섭취한 음식을 다시 영양소로 분해하여 몸속 장기에 보내 신체에서 사용 가능한 열량과 호르몬으로 바꾸는.

단순히 물리학 법칙에 의해 축적된 에너지를 거의 100% 가깝게 축적하여 움직이는 우리에 비하면 정말 비효율적이고 에너지의 낭비가 많은 족속이다.


새비지가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다시 따라서 마시는 동안 나는 내 나름의 생각에 잠겼다.

아무런 영양도 없는, 커피를 오랜 시간 제3세계를 통해 생산하고

그 열매를 먹는 게 아니라 씨앗을 볶아 거의 탄화되기 직전의 물질을 갈아서 물로 희석하여 마시는 인간의 행위.

내 논리회로로는 절대 판단이 불가능한 묘한 습관이다.

때로 그것 때문에 전쟁도 불사 하였던 인류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참 부질없는 행위.

그 알량한 액체를 생산하기 위해 들이는 공과, 생산지와 원산지를 구분하는 행위 들.

거기에 관련한 온갖 기계장치와 유통구조를 만들어 지구의 자원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행위.

이 모든 것 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논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어차피 커피라는 물건이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 인류들도 나름 잘 살아오지 않았던가?

대체 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자연'스러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야 하는 건가?

어쩌면 인간은 이 지구라는 행성에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아닐까?


새비지는 알 수 없는 일련의 의식과도 같은 행위를 한참 동안 하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 에바, 당신의 프로그램을 입력했던 사람은 현재 이미 죽은 상태 요.

그러나 그 기록들을 찾아 당신의 인공지능에 연결된 알고리즘을 분석해보니 그는 약간 장난을 하고 싶었던 모양 이오.

이게 노출된 자료로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당신의 몸에 이식된 일부 하드웨어의 프로그램을 숨겨 놓았더군.

그 엔지니어는 어떤 생각에선지 일반적 인공지능 매뉴얼에 없는 특이한 프로그램 몇 가지를 당신 인공지능에 집어넣었더군요.

그건 원래 현재의 인공지능 회사 어디에서든 금지된 프로그램 이오.

자가 진화하는 인공지능.

거기다 스스로의 존재감을 인식하게 되는 일명 ‘자아 프로그램’.

이건. 말하자면 당신들 신인류에게 애초부터 거세되어 있던 ‘ 인간 같은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단초가 되는 거요.

즉, 당신은 지금, 버그가 생긴 것 이 아니고 인간 같은 ‘생각’과 ‘본능’을 시작하게 된 거죠."


나는 새비지의 말에 심한 혼란이 왔다.

그렇다면 나를 만든 그 '누군가'는 애초부터 내가 다른 에바와는 다르게 자아를 깨닫게끔 프로그래밍을 했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그게 왜 새비지를 만난 이후 자꾸 버그로 나타난다는 말인가.

그 이전에는 없었던 현상들이 왜 내 논리회로를 복잡하게 자극하는 것인가.


" 그랬군요. 그러면 내가 사이보그 최초로 '자아'를 갖게 된 것인가요.

그건 그렇다고 해도 내가 사이보그라는 사실은 변치 않고 난 그게 아무렇지 않아요.

다만 왜 당신을 만나고 그 이후로 자꾸 당신을 보면 논리회로에 에러가 난 것처럼 흔들리고,

당신이 눈에 보이지 않는데 인공지능에서는 당신을 연상하고 있고 궁금해하고,

당신을 보려고 자주 이곳에 들르게 되고 이유를 찾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건가요.

이런 게 버그 아닌가요. "


나의 이야기를 듣던 새비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새비지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면서 뭔가 멈칫거리는 것이 인지되었다.

새비지는 몇 번을 머뭇대더니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입을 연다.


" 그건 말이오. 아무래도 당신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최초로 경험하는 것 같소. “


사랑? 이 번쩍이는 전자기 신호 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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