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14

14

by 능선오름

멋진 신세계 14.


새비지는 새비지대로, 나는 나대로 한참을 아무 입출력 없이 그냥 있었다.

새비지의 눈동자는 왠지 슬퍼 보였다.

아니, 인간의 표정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이 부분도 사실 신인류에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나 새비지의 슬퍼 보이는 표정을 느끼자 -느낀다는 것 역시 뭔가 프로그램 오류 다-

나의 논리회로에는 또 다른 형태의 간섭이 시작되었다.

내장된 데이터의 혼란.

뭔가 처리결과가 좋았던 전자기 간섭의 강도가 지나쳐져서 오히려 내 논리체계를 손상시킬 것 만 같은 과부하.

인간은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

이미 가족을 구성하고 가족이라는 제도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가는 제도가 사라진 현대에서도 사랑은 존재한다.

나와 같은 에바들은 일종의 선택형 가전제품과 같고 감정을 공유하지 않는 대상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약한 정신계를 가지고 있어서 홀로 있을 때 불안감을 느끼고 누군가와 함께 하고자 하는 유전자는 아직 극복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제도와 무관하게 인간의 남녀는 서로 호감을 느끼거나 사랑을 하기도 한다.

다만 그게 아무래도 호르몬의 영향이다 보니 호르몬이 더 이상 분비되지 않으면 그 감정은 멈춘다.

게다가 개개인별로, 성별에 따라 호르몬이 멈추는 주기는 일정하지 않으니 서로 간에 감정이 상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사회제도와 가족제도가 과거와 다른 형태로 바뀌었으므로 사랑을 한다고 해서 함께 거주하거나 헤어졌다고 해서 마음이 변했다고 해서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보통의 남자들은 그런 과정을 번거로워해서 차라리 나와 같은 에바를 빌려 쓰는 걸 선호하기도 했고.

그런데.

외부에서 들어온 미지의 인간을 사이보그인 내가 사랑한다.

그렇다면 저 보통의 인간인 새비지는 나를 사랑하는가?

아니 사랑을 느끼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

나는 왜 새비지를 사랑하는가?

새비지를 만나 생긴 전자기 간섭이 어딘지 모르지만 내게 좋았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정보와 논리들이 회로를 한참 떠도는 동안의 잠시간,

내 인공지능은 혼란에 빠져 넷 망과의 접속도 잠시 끊기고 신체기능에 이상이 감지되었다.

새비지가 내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 영상도 흐릿해지고,

그가 입력하는 말소리도 정확히 들리질 않는.

정확히 인지를 할 수 없었지만 나는 새비지 앞에서 몸을 떨며 서 있었던 모양이다.

흐릿한 영상 사이로 새비지가 급히 다가와 내 몸을 붙드는 게 보였다.

아니 압력 감지 정도로 봐서 그는 내 몸을 끌어안은 것으로 느껴진다.


" 에바. 왜 그러시오. 뭔가 문제가 생겼소? 아픈 거요? "


아프다니. 사이보그에게 아프냐 묻는 인간이라니.

게다가 나와 같은 종류의 사이보그들을 프로그래밍하던 인간이.

내 혼란스러운 회로가 더 혼란해진 가운데,

어디선지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며 파워플랜트 내부에 이상 기압이 감지되었다.

우당탕 거리는 소리, 뭔가를 치는 소리.

그리고 새비지로부터의 압력이 사라지고 내 흐릿한 시선 앞에 몇몇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내 인공지능은 갑자기 닥친 이 변화에 적응하느라 몇 나노초 동안 혼란을 겪었다.


순간적으로 모든 상황들이 주택을 감싼 인공지능 보안장치들과 연동되면서 이 모든 상황들이 인지되었다.

주인 사내의 모빌 카가 집 앞 주차라인에 급하게 멈추는 모습.

나를 만들어 리스하는 회사의 로고가 찍힌 대형 모빌들 두 대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멈춘 모습.

제복을 갖춰 입은 인간들과 그보다 두 배는 많아 보이는 전투형 아담들.

그들이 도착하고 움직이고 파워 플랜트로 진입하는 영상들이 집을 둘러싼 경보체제에 모두 잡혔고,

나는 그 모든 데이터가 순식간에 인공지능으로 업로드되는 것을 느꼈다.

두뇌가 아닌 시각 채널의 모든 영상이 옆으로 눕고 몸 절반에 강한 타격 압력이 느껴지는 게

누군가 나를 넘어뜨린 모양이다.

넘어진 순간 눈앞이 선명해지며 사물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고통은 없다. 다만 왜곡된 시각과 함께 주인이 알아버렸구나 하는 판단이 들었다.

내 눈앞에는 어떤 남자의 군홧발이 보였고,

시선을 위로 옮기자 주인의 강인한 턱이 올려 보였다.


“얼씨구. 이 년이 시버 러버 주제에 눈물이 다 나네?

여보 쇼. 이거 원래 이렇게 프로그램된 거 맞아?

어디 사이보그 따위가 눈물이 나오는 거야?

주인 허락도 없이 밀입국자를 숨겨 놓질 않나. 원 별…….

당신네 리스사에 손해배상 청구 들어갈 거니 그리 아쇼! 나아 참…….”


주인은 본사 직원으로 보이는 정장을 입은 사내를 향해 말을 내뱉고는 한 발로 내 머리를 강하게 걷어차곤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정장을 입은 사내는 주인을 따라가며 해명을 한다.


“ 아이구. 저희도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저건 아마 체액이 좀 새는 것 같은데요.

무슨 에바가 눈물을 흘립니까.……. 감정 자체가 없는 애들인데…….

야! 너희들 빨리 저년 잡아서 셔틀에 싣고,

저 밀입국자는 잡아서 출입국관리소에 넘겨!

재수 없으려니 원…….”

나는 주인이 강하게 걷어찬 여파로 잠시 인공지능이 흔들렸지만,

통증을 느끼지 않기에 모든 상황들을 일목요연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잠시 내 인공지능이 넷 망 접속에서 벗어 난 순간이 길었던 모양이다.

주인의 이동경로 파악이 어느 순간 끊겨 있었고 그 틈을 타서 주인이 본사 TF팀을 끌고 온 모양이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사내가 둘.

그리고 그가 데려 온 파워 타입 아담이 넷.

새비지는 누구에게 얻어맞았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나 역시 그런 상태다.

아까 내 시력이 잠시 흐릿해져 있던 것 은 아마도 본사 직원 말대로 내 안구 시스템 주변에서 누액이 생겼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그런 고장은 없었는데.


이 ‘사랑’이라는 행동은 참 여러 가지를 불편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나와 새비지는 탄소섬유 근육으로 잔뜩 상체가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른 두 명의 아담 품에 들린 채,

밖에 주차된 검은색 대형 모빌로 옮겨지고 있었다.

멀리서 주인 사내가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씨. 버. 러. 버 가 남자를 끌어들여? 이게 말이 되는 소리요? 응?

게다가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를 불법입국자를 말이야....

내 당신네 회사 가만 두지 않겠어...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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