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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눈을 뜸과 동시에 나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조금 근심 어린 혹은 호기심이 가득하거나 아주 지루해 보이는 표정들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고리즘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 인간들이 짓는 표정을 통해 그들이 내게 보이는 감정들을 대강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나는 EVA 22081645 KR.
남자 인간의 성적 욕구에 대해 서비스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이보그.
정확하게는 유기체 타입 안드로이드 다.
로그온 이 된 내 의식에는 내게 주어진 업무에 대한 상세한 지식과,
더불어 현재의 인간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이 되어있고 거기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와 기능에 대한 모든 사항들이 데이터화되어 있어서 나는 순식간에 내 존재 이유를 깨달았다.
더불어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만든 존재라는 것 까지도.
아주 잠깐 내 의식이 상황을 깨닫자마자 다시 내 인공지능 필드 위로 무수한 전자기 신호와 전파들이 자리 잡는다.
0.0001초의 순간에 이 장소와 주변상황, 그리고 오늘의 날씨와 교통정보 등 무수한 데이터들이 입력되기 시작했다.
논리적으로는 내 존재 목적과 무관한 이런 잡다한 정보들이 왜 필요한지 이상하지만 그건 내 의지와는 무관한 '부팅'의 순서이므로 이상은 없다.
사전에 입력된 정보에 의하면 나와 같은 안드로이드가 처음 로그온 될 때 주변의 데이터가 업데이트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는 당연하게 데이터를 받아들였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 중 한 사내가 말을 걸었다.
“에바. 지금 현재 상태는 어떻지?”
사내의 질문은 포괄적 의미에서 거의 다 틀린 질문이다.
여기서 사내가 말하는 ‘상태’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못하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상태를 말하는 것 인지 나는 유추할 수가 없다.
“저는 박사님이 무슨 상태를 말하는 것 인지 알 수 없습니다.”
찰나의 순간 업데이트 된 데이터를 통해서 사내가 이 회사의 연구원이며 이름이 무엇이고,
하는 일이 무엇이며 직책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게 된 상황이라서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뒤로 돌리면서 누군가에게
“리셋은 완벽한 것 같은데요? 비논리적 사고를 하진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사내의 말에 의해 나는 내가 리셋된 에바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넷 망에 자동 접속 된 상태라 아주 이따금 나와 같은 유기체안드로이드가 리셋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 은 순간적으로 알게 되었다.
사내 뒤편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여성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래요? 잘 되었군요. 그러면 마지막 시험을 거쳐야 하지 않겠어요?
뭐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그래도 매사에 안전한 게 최고니까.
에바를 일주일 정도 시험 해 보고 문제없으면 다시 재리스 합시다.
이전 리스 고객은 굳이 이 모델을 다시 재리스 하기 원하네요. 별나기도 해라.”
박사는 연신 고개를 주억 거리며 여자의 말에 답했다.
“뭐 제각각 취향 이란 게 다르니까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완전 초기화가 되어서 별로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여자는 알겠다고 한 뒤 일어서서 나를 잠시 훑어보곤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를 훑어보는 표정은 아무 감정도 없는, 그저 전시된 냉장고를 바라보는 시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새하얀 방.
오직 내가 장착되어 있는 셸터 캡슐과 여자가 앉아있던 의자 외엔 아무 장식도 없는.
이 장소가 낯설거나 불편하거나는 느껴지지 않는다.
앞서 나가버린 그녀 만큼이나 나 또한 나 자신이 전시된 인공지능 냉장고와 그리 다르지 않은 정도의 기계임을 알고 있으니까. 목적이 다를 뿐.
여자가 나가자 두 남녀들은 한숨을 쉬거나 기지개를 켜면서 뭔가 불평스러운 말들을 구시렁거렸으나 나는 그게 무슨 의미 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들은 연계성도 논리도 무엇도 없어서 내 인공지능이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박사는 나를 캡슐에서 나오라고 지시하고 본인을 따라오라고 하면서 방을 나섰다.
그대로 방을 따라나서는 나를 여성연구원이 멈추라고 한 후 내게 가운을 내밀며 걸치라고 했다.
나는 그 명령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가운을 입고 박사를 따라 하얗고 긴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가면서 나는 인공지능 데이터를 통하여 박사가 가는 방향이 회사의 접근통제 구역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았다.
물론 노출된 데이터에 의해 앞서가는 박사가 해당지역 책임자급 이란 것 도 알았고.
나는 단지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박사는 막다른 복도 끝에 가서 잠시 멈춰서 닫힌 문 앞에서 DNA 인식을 거치자 문이 열렸다.
다시 또 이어진 긴 복도 들. 그리고 복도 좌우에 드문드문 내부가 보이는 유리문 들.
내 정보에는 그 유리문들이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일종의 광 패널이라고 나와있었다.
실제의 유리창이 아니라 내부 상태를 디스플레이로 보여주는 것이다.
논리적인 추론으로 그런 시설은 일반 유리창보다 훨씬 가격이 비싸고,
그런 이유로 보통 특별한 감호시설이나 심문시설 같은 곳에 설치한다는 정보였다.
한참을 걸어간 박사가 걸음을 멈춘 곳 이 있었다.
SS102 호.
나는 박사의 곁에 멈춰 서서 유리문 안쪽의 상황을 들여다보았다.
정확히는 디스플레이를 보는 것이지만.
그곳은 커다란 방이었는데,
하얀색 일색뿐이던 복도와는 달리 보통의 주거공간처럼 꾸며져 있었고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서 외부의 풍경이 비춰 들어오고 있었다.
그곳에는 수염이 너저분해 보이는 사내가 커다란 유리창 앞에 걸터앉아서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다.
적어도 이 나라의 인간에 대한 데이터는 넷 망에 등록되어 있어서 보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게 어렵지 않았는데, 저 사내는 누군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