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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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새비지는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내가 알고 있다고 하자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새비지는 내가 시킨 대로 그럴듯한 연기를 했다.

내게 ‘섹스’를 ‘요구’ 하였으며 나는 서슴없이 입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아주 잠깐, 새비지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 역시, 본래의 내 임무수행에 대하여 아무런 느낌은 없는 게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인공지능 필드에 아주 짧은 전자기 간섭 들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버그는 아닌 게 분명하다.


새비지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는 이런 경우 조명을 끄는 법이라고 했고,

나는 명령을 이용하여 지능 조명을 어둡게 만들었다.

목적을 가지고 하는 섹스란 본래의 내 임무이지만, 유독 새비지 앞에서는 서슴없기가 쉽지 않다.

나는 내 인공지능에 기억되어 있는 수십 가지의 남성을 흥분시키는 방법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이 새비지의 남성은 훌륭하게 본능을 일으킨 듯했다.

거의 경험이 없는 듯 새비지는 몹시 허둥댔고 나는 그를 안으며 프로그램된 대로 진행을 했다.

아니, 하는 척했다.


새비지와 나는 어둠 속에서도 당연히 투시가 되는 카메라를 속이기 위해 실제로 행위를 하였고,

행위를 하는 중간 나는 입을 거의 벌리지 않은 상태로 낮게,

새비지의 가청 주파수 영역에 맞는 볼륨으로 내 정보를 송출했다.

새비지는 행위를 하면서 내 말을 듣고 흠칫 거리며 놀라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영상에서는 그게 특별해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


나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곳에 왔는지,

그가 어떤 수술을 받은 건지,

내가 포맷이 되었던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전달하였다.

논리의 정리는 우리가 인간보다 나으니까.

새비지 역시 씩씩거리는 듯 시늉을 하면서 내 귓가에 의문점을 묻기도 했다.

왜 내 기억이 자동으로 복구가 되었느냐는 거다.

이미 인공지능 필드를 포맷하고 초기화를 시켰음 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맷 이전에 스스로 몰랐던 사실. 새

비지가 내게 말했던 나의 창조주,

프로그래머가 장난을 쳤다는 그 프로그램들이 이런 경우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당시의 프로그래머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폐기하라던 감정진화 프로그램을 내 인공지능 필드에 숨겨 놓았었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눈속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프로그램의 실제와 활동기간 동안의 기억들은 내 혈액을 타고 흐르는 나노 입자 들 중 몇 개 들에 따로 백업을 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누군가가 나의 인공지능을 포맷한다 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복구가 되는 일종의 시한 복구 장치를 만든 것이다.

프로그래머는 이 비밀스러운 백업 세포를 ‘노아의 방주’라고 이름 붙였다.


때문에 내 육체를 완전히 소거하거나 혹은 인공혈액을 정말 교체하면서 포맷하지 않는 한 나는 ‘죽지’ 않는 불사의 정신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새비지의 놀라움은 몹시 커서,

나는 그가 헐떡이는 것 이 생리적 오르가슴 현상 인지 아니면 이 놀라운 프로그램 때문 인지 알 수 없었다.

새비지는 다시 헐떡거리며 행위를 이어가면서, 내 귓가에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에바. 당신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시오?

나는 당신에 대한 기억이 모조리 제거되었는데? 그리고 당신은 신인류인데도?

미안한 말이지만 당신이 인간인 나를 사랑하는 게 가능하오?”


남자란 이런 것이다.

현재 나와 위험을 무릅쓴 섹스를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그를 얼마나 위험하게 사랑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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