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21

21

by 능선오름

21


한 차례의 정사.

그것도 완전히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새비지 역시 그러한 정서적인 과정을 극복하지 못하였는지 내 설명들을 듣고는 곧 시들해졌고,

나름 ‘연기’에만 몰입을 한 상태로 우리의 정사는 차분하게 끝났다.

물론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하였으나 인간에게 정서와 육체의 연결 메커니즘이 생각보다 정교하다는 걸 알기에 새비지의 심정을 이해했다.


아니, 이해한다고 유추하였다.

새비지와 나는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은 침대 위에서 마치 정사를 마친 연인처럼 누워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새비지는 한동안 내가 전해 준 정보로 인하여 혼란을 겪는 듯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새비지를 불법으로 감금하고 있다고 해도 그가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나는 로봇의 1원칙을 적용하여 새비지를 이 상황에서 구하려고 한다.

그가 이대로 지내다 보면 결국 회사에 의해 완전히 ‘지워질’ 것을 알 수 있다.

불법체류자를 강제감금 하고, 불법적인 뇌수술을 하고도 지금까지 살려 둔 이유는 뻔하다.

고가의 상품 인 나를 재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니까.


회사에 있어서 제3세계의 인간 이란 에바의 몸값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흔한 싸구려 소재 다.

굳이 위험부담을 안고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행히 넷 망이 접속되고 있으므로 나는 본래의 내 존재목적과 무관한 정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애초 제작단계부터 목적이 그러했으므로 나의 물리적인 힘과 한계는 뻔했다.

이곳을 강제로 탈출할 수 있는 물리력 이란 내겐 없다.

나의 존재 목적이 다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연구소 건물의 구조와 설계도를 다운로드하고,

탈출방법과 생존기술에 대한 정보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의 장점은 필요하다면 해당 지식들을 충분할 만큼 접속해서 받을 수 있고,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대개의 실행력이란 짐작하기 어려운 불특정 한 미래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으로 주저하기 마련이다.

애초에 두려움이 없었다면 아직 벌어지지 않은 상황들과 예측도 불가능한 상황들에 대해 일일이 고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들은 그런 미지수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그 때문에 스스로의 행동을 억지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인공지능인 나의 판단력에 그런 불투명한 예측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물론 없다.

우리가 감금된 연구실은 보안 문제 때문에 연구소 건물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고,

높이도 2층에 불과했다.

내가 전투용 사이보그는 아니지만 새비지 정도의 무게를 엎고 2층에서 뛰어내린다 해도 기본적인 내 골격 시스템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게다가 이곳은 군사시설이 아니므로 건물에서 탈출하면 불과 몇 분 안에 연구소 단지 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더구나 연구단지는 도시의 외곽 깊은 숲이 가까웠으며 크진 않지만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강을 통해서 흔적을 지우며 좀 더 떨어진 산악지역으로 숨어들 수 도 있다.

산악지대를 극복한다면 도시로 숨어드는 것이 가능하며 도시에 들어간다면 또 다른 방향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높게 나오기에 선택의 여지가 있다.


데이터를 분석해 본 결과 연구소가 생긴 이래로 나와 같은 행동을 했던 기록은 없었기에,

경비상태가 대단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본사에는 물리력이 필요할 때 사용하는 파워타입 아담들이 있지만,

이곳은 연구소이기 때문에 일반 보안 관리용 타입들만 존재하며 건물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나와 새비지의 탈출이 성공할 가능성은 90% 이상으로 분석되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바를 은밀하게 낮은 주파수로 새비지에게 전달했다.

새비지는 흠칫 놀라는 듯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낮은 음성으로 새비지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음성이 감청되지 않도록 그의 음성을 상쇄시킬 수 있는 가청 주파수를 흘렸다.


“ 결국, 여기 남아있으면 죽는다는 거 아니오.

난 아직 죽고 싶진 않소. 게다가 이런 식 으로는.

내가 가진 힘은 알다시피 미약하오. 그런데 당신을 지켜 줄 수 있을까?”


새비지가 말한 내용은 길지 않았고 별다른 복잡한 말은 아니었으나,

내 논리회로로 그의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의 문장이 비논리적일 뿐 아니라,

지극히 감정적인 부분들이 포함된 내용이라 순간적으로 내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남자 인간 이란.

자신이 나를 지켜줘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기사도라도 생긴 것이란 말인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에바보다 더 취약한 인간이 단지 남자라는 성별 때문에 가지는 객기.

내게 웃음을 터뜨리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웃어 줄 텐데.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멋진 신세계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