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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모진 존재인가.
아니 어쩌면 생명 이란 존재의 본질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사내는 그날 밤 내내 선실의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반쯤 부서진 갑판에 앉아 별이 흐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많은 생각에 잠겼다.
노숙자로 살겠다고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선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현 상태로는 그가 머물 곳,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세상에 없었다.
굳이 따지려면 없을 것은 아니었다.
알량한 일가붙이 나 그리 깊지 않은 관계의 지인들에게 빌붙다시피 하거나, 혹은 남은 돈 조금이라도 쪽방 같은 곳을 얻어 매일 새벽 인력시장 같은 곳에 서설이다 보면 아직 젊으니 그럭저럭 먹고 그럭저럭 살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내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힘들게 돈을 벌거나 누군가에게 눈치를 받으며 혹은 비웃음을 감수하며 살기 싫었다.
사내가 어찌한다 해도 빚은 평생 사내를 따라다닐 것이었다.
평생 죽도록 일을 한다는 건 사내가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끝없이 노동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먹고, 자고, 배설하는 삶을 살아 보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살면 자신을 스스로 옭아매던 도망친 아내에 대한 원망, 스스로 무능력함에 대한 저주, 미래를 꿈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 따위를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랬다.
사내가 폐선에서 지내는 동안, 비록 몸이 춥고 혹은 더럽고 때로 익숙하지 않은 바깥 생활에 몸이 아파오기도 했었지만 이내 적응이 되었다.
인간의 육체란 신비해서,
군대 훈련소에서 그랬듯 어떤 고통이나 급격한 상황의 변화도 몇 달만 지나면 적응이 되고 만다는 것을 사내는 알고 있었다.
그리 지내며 처음 고통스러웠던 것은 굶주림이나 추위가 아니었다.
매일 목적 없이도 티브이를 보고, 사회생활 내내 어디를 가도 눈에 귀에 치이던 온갖 미디어 들.
필요하지 않거나 쓸모가 없음에도 꾸준히 주입되던 각종 세상의 정보와 뉴스 들.
휴대전화를 가지고 습관적으로 찾아보게 되던 스스로와 전혀 무관한 세상사 들.
그 모든 정보가 갑자기 끊긴 상태란 정말 갑갑하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내는 생각했다.
인간이란 늘 어떤 정보에 노출이 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하고.
때때로 여인과 구걸 내지는 사냥을 나선 길에 눈에 띄던 가게들의 티브이 화면에 넋을 잃고 서 있다거나,
굴러다니는 무가지라도 활자가 보이면 사내는 열심히 주워와서 폐선의 갑판에 앉아 읽곤 했었다.
그러나 그도 한 달을 넘기지 않고 다 그만두었다.
신기하게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상태에서는 매일 보는 세상도 다 좋아 보였다.
멀리 떠가는 구름. 혹은 수평선을 지나는 이름 모를 화물선.
하늘 위로 지나가는 비행기.
내리쬐는 햇볕과 불어오는 바람. 때때로 차갑게 내리는 비와 거친 파도.
그 모든 것이 사내에게 있어서는 현실에서 마주하는 미디어였다.
그래서 머리를 비울 수 있었다.
끓어오르던 가슴도 비울 수 있었다.
작지만 나름 가지고 살던 기대나 바람 같은 것도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름 평화롭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여인의 고백 아닌 고백을 듣고서야 사내는 깨달았다.
자신도, 이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저 여인도.
결국, 세상이라는 무간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 아닌 고백이 있었던 날로부터 며칠간 두 남녀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그리 대화할 소재가 있진 않았었지만 그다지 쓸데없는 날씨 얘기,
먹은 음식 얘기, 혹은 술에 취해 시답지 않은 대화라도 있었던 관계가 그나마도 거의 하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
사내가 폐선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여인과 사내는 붙어 잠을 자지 않았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진 것도 이유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먹해진 것도 사실 이었다.
비로소 사내는 자신이 찾아온 첫날 그녀가 섹스를 조건으로 걸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생면부지의 남녀가 가장 쉽게 가까워지는 방법은 섹스였다.
서로 가장 은밀한 치부를 기꺼이 드러내고 공유하는 것은 그 이후의 행동들에 대한 나름의 편리함 혹은 편안함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한쪽이 거절하게 된 이후로는 다시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사내는 물색없이 치솟았던 욕정을 후회했다.
그리 필요한 것도, 그리 절실했던 것도 아니었건만.
어쩌면, 여인이 화를 낸 그 이유 그대로 그동안의 시간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서 여인을 쉽게 생각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언제라도, 필요하면, 내키면 섹스가 가능하다는.
설마 자신을 거부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사내는 새벽에 간신히 들었던 선잠이 깨었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는 어슴푸레한 볕이 들어오는 선실의 갈라진 선체 벽 틈에 바짝 붙어 웅크려 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사내도 궁금증이 일어서 여인의 곁에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십여 미터 앞 방파제 위에 사람들의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대부분이 남자인 무리가 폐선 쪽을 가리키며 뭐라도 손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포구에 이렇듯 사람들이 많이 모인 적은 없었다.
거리가 떨어져 있고 바닷바람이 제법 있어서 무슨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폐선을 둥지 삼아 사는 두 사람은 불현듯 불안에 휩싸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저들 무리에게 나아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도리도 없었다.
일단 그들은 이 포구의 주민도 아니며, 그들이 폐선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좋아할 동네 주민들은 더더욱 없을 것이었으므로.
한참을 떠들던 사내들은 이내 선창 쪽을 향해 사라졌다.
사내와 여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사내는 어슴푸레하게 스며드는 햇볕으로 여인의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때가 찌들고 세월과 바람에 더께 진 얼굴은 생각보다는 험상궂지 않았다.
오히려, 봉두난발의 머리 매무새와 거칠어 보이는 넝마가 아니라면 온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미인도 아니었지만, 어시장의 억센 여인들보단 오히려 순해 보이는 얼굴.
그 얼굴이 모호한 표정으로 가득해 보였다.
불안, 당황, 놀라움, 그리고 체념 같은.
어쩌면 여인은 이 보잘것없는 자신의 둥지가,
세상이라고 하는 지옥의 언저리 어딘가에 은밀하게 숨겨졌던 자신의 피안 이 세상에 다시 드러나게 될까 봐 겁을 집어먹은 것일지도 몰랐다.
겉으로 강인하고 인생 막장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그녀 가.
사내는 문득, 이 여인을 지켜줘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어린 아내에게조차 느끼지 못했던 보호 본능 같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