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간도

12

by 능선오름

밀물이 시작되기 전에 사내는 선체 밑으로 내려갔다.

반 이상이 삭아 없어진 선체 바닥 절반쯤은 늘 바닷물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것이 밀물이 들어오면 바닥 전체가 잠길 높이로 올라오곤 했다.

사내는 입고 있던 꾀죄죄한 트렌치코트 – 코트라기에도 뭣한 넝마가 되긴 했지만 – 와 옷들을 벗고 바닷물을 옷에 적셔 몸을 닦기 시작했다.

봄이라곤 하지만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닷물의 냉기가 피부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애써 엄습해 오는 추위를 무시하고 떡이 진 머리까지 감았다.

얼어붙는 듯한 냉기가 두개골을 멍하게 만들자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내는 무릎 정도 올라온 바닷물에 아예 발을 담그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몸을 씻어갔다.

냉기에 굳어버린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와들와들 떨려왔다.


참으로 인간의 육체란 간사한 것이,

사내가 모종의 생각을 하고 밑에 내려와 바닷물로 몇 달 만의 처음으로 멱을 감기로 한 것이 이십 분도 되지 않았지만, 찬물세례 몇 번 만에 사내는 엄청난 후회를 할 지경이었다.

덜덜 떨며 맨몸으로 선실로 올라갔을 때 여인은 의아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마른 수건으로 몸을 벅벅 닦고 오랜만에 등산배낭을 열었다.

처음 폐선에 오를 때 입었던 등산복이 있었다.

사내는 말 없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등산복을 꿰다시피 입고 점퍼를 걸쳐 입었다.

마른 옷을 입자 점점 떨림이 가라앉았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거칠게 비벼 말리고 있을 때 여인이 입을 열었다.


“ 이제 돌아가려고?”


무심한 듯한 음성이었지만 말끝에 묻어있는 망설임을 사내는 느꼈다.


“ 돌아갈 데가 어디 있다고요. 잠깐 나갔다 올 거요.”


말을 마친 사내는 등산배낭을 어깨에 걸치고 갑판에 올라 잠시 주변을 살핀 후 모래톱을 조심스레 밟고 방파제로 걸어갔다.

여인은 선체 벽의 갈라진 틈 사이로 사내의 휘청거리는 발걸음이 멀어져 가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가 나가는 준비를 하면서 배낭 주머니에 들어 있는 자동차 키를 확인하는 것을 여인은 슬쩍 보았었다.

‘그래, 어쩌면 영원히 안 돌아올지도 몰라. 그래, 어쩜 잘 된 거지. 젊은 놈이 왜 이런 식으로 살아. '


여인은 방파제 위를 걸어 선창 쪽으로 사라진 사내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처음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걸 건져 올 때만 해도 행여 자신의 거처가 귀찮은 주목을 받는 게 싫어서였지만, 젊은 사내가 무슨 이유로든지 죽으려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울컥했던 건 사실이다.

자신도 자신에게 그런 세상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게 어이없었지만.

게다가 그 사내는 비리비리하고 기운 없게 생긴 것이 자신을 농락하고 도망친 오래전 시인 이란 작자와 많이 닮았었다.

다음 날 그 사내가 배에서 떠나갈 때는 조금 아쉬운 마음도 분명 있었다.

그건 몇 년 만에 사람의 피부를 가까이 접촉해 볼 수 있었던 아주 단순한 이유이기도 했다.


사람인데, 타인의 손 한번 잡아보지 않고 몇 년을 살아보니 그게 누구든 단순히 피부만 느껴도 좋을 것 같은 그런 욕구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사내가 정말 예상치 않게 다시 폐선에 나타났을 때, 여인은 기뻤다.

아무 이유도 없이.

행여 벅차게 솟구친 기쁨을 억누르려 칼까지 빼 들고 악을 썼지만,

기실 사내가 어떤 이유로든 돌아온 것이 여인은 그냥 기뻤다.

사람과 말을 섞어 본 게 언제 적 일인가.

그리고 그처럼 가까이에 사람이 있었던 적이 과연 있었던가.


악취를 풍기는 그녀가 지나가면 마치 스컹크라도 지나는 것처럼 사람들은 피했다.

그녀의 뻔뻔한 구걸에도 사람들이 무서워서가 아닌,

더러워서 뭔가를 던지듯 준다는 것쯤 안다.

그런데 느닷없이 찾아온 사내가 같이 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게 구애 이거나 청혼 같은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 냄새나고 추한 곳에서 살자고 하는 것.

한편 뭉클하지만, 심술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좀 터무니없지만, 섹스하자고 했다.

섹스에 굶주려서가 아니다.


이미 오랫동안 마음으로부터 섹스를 원한 기억도 없고, 남자가 그리운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남자가 완전히 버려진 짐승처럼 살고 있는 자신을 안을 수 있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함께 살을 맞대고 살아볼 수도 있겠다고 막연히 심술 비슷한 감정이 들었을 뿐.

의외로 남자는 선선히 응했고 실로 오랜만에 사람의 살맛을 보았다.

그건 애정이나 그런 게 아닌 배고픔과 같은 순수하고 본능적인 결핍이었다.

그렇다고 그 남자에게 자신을 의지한다거나 동반자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이 그리웠을 뿐이었다. 자신을 위협할 수 없는 그런 사람.


그렇게 지내다 며칠 전 남자가 느닷없이 자신에게 섹스를 요구했을 때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원하는 것도 아니었고, 적어도 그 남자가 자신에게 ‘여성’을 느껴서가 아닌 것도 안다.

그래서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결국, 그 비리비리한 놈조차 자신을 욕정의 배설구 로 취급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고요했던 포구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남자는 느닷없이 바닷물에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선다.

그게 어쩌면 영원히 사라짐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특별히 애정이 아니라도 사내 하나가 사라진 선실은 무섭도록 넓고 차갑다.

어쩌다 저런 잉여인간에게 마음을 준 것일까.

그건 아닌데.


그런데 하염없이 밀려드는 허전함과 불안이 너무 크다.

한번 섹스를 거절한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오전에 본 사람들의 손짓 어딘가에서 불안감을 느낀 걸까.

이대로 도망치려고 마음먹은 것일까.

그 남자가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왔듯, 그대로.

그냥 원하는 대로 응했으면 달라졌을까.

까짓 매일 오줌 싸고 똥 싸는 것도 내외 않고 지냈는데 그까짓 다리 한번 벌려주는 게 대수였을까.

그동안 헤아려지지도 않을 세월을 홀로 폐선에서 살아오면서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불안이 공포심으로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 남자.

이름도 뭣도 모르는 그 남자.

이제 끝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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