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간도

14

by 능선오름


사내는 기울어진 선실 바닥에 팔을 베고 누워 뚫린 상갑판 사이로 그믐달이 지나는 걸 바라보았다.

이미 봄이 무르익은 계절이라 밤바다도 그리 춥진 않았다.

여인은 볼일을 보려는지 기관실 쪽으로 사라진 지 한참 되었다.

스스로 의지와 무관하게 내몰렸던 세상에서 하필 선택한 벼랑이 이 포구였다.

거기서 생을 끝내려다 우연히 구함을 받은 게 또 이 폐선이었다.

지옥을 벗어나려 선택을 했었지만, 또 다른 지옥이 있었다.


어찌 보면 산다는 건, 어느 곳에 머물러도 지옥 같았다.

그나마 이곳에서는 잠시 마음의 평화, 정확하게는 유예된 평온을 누릴 수 있었다.

자신도, 여인도 점점 나이가 들 것이고 육신이 버거워지겠지.

그러면 지금 만큼의 운신도 못 할 것이었다.

도저히, 스스로 살아날 기운이 떨어지면 어디 시설이라도 강제수용되겠지.

거기서는 또 다른 지옥이 될 것이고.

여인의 이가 힘없이 빠졌다는 건 그들의 영양 상태가 그렇다는 걸 말해준다.

아주 오래 갈 여유 같은 건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불에 타서 죽임을 당하겠다고,

앉아서 죽겠단 건 본인이 해 보았음에도 선 듯 동의할 순 없는 일이었다.


하긴,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삶을 강요할 그 무엇도 아니긴 하지만.

엄연히 따지자면 그녀 덕분에 얼굴에 철판을 깔고 시작한 노숙이 아니던가.

며칠 눈치를 보아가며 사내가 여인에게 띄엄띄엄 물었다.

어디로라도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뭐하러 이 폐선에서 불에 타 죽을 거냐고.

그래도 어디든 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여인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여인의 마음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 폐선으로 올 때 자신의 마음이 그러했듯이,

이곳은 여인에게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고된 육신을 누일 수 있는 최후의 보루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이곳은 단순히 버려진 폐선이 아니라 세상 유일한 보금자리이자,

그녀가 세상 언저리에서라도 삶을 이어갈 유일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어딘가 다른 퇴락한 부두를 찾아 헤매다 보면 이 정도 수준의 잠자리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녀가 단지 ‘장소’를 찾을 수 없어 보여서 이 자리에서 불에 타 죽어도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닌 줄은 사내도 알았다.

사내가 최초에 이 폐선에 도달했을 때의 심정과 비슷한 게 아닐까.

더는 달리기가 싫어진 것.

이렇게 뒤집고 저렇게 뒤집어도 어차피 달라질 게 없는 인생이라면,

이쯤 해서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라도 사라지고 싶은 그런 게 아니었을까.

주체적이고 어쩌고 그런 문제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뒤집고 애쓰며 극복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이라는 게,

무슨 도달점이 없이 끝없이 반복되는 장애물 경주 같은 것이라면.

결국, 무한한 반복의 쳇바퀴를 멈추는 것은 쳇바퀴 위에 올라탄 스스로가 아닐까.

어쩌면 그녀의 결심이 옳은 거 아닐까.


부스럭거리며 여인이 기관실에서 선실로 올라오는 기척이 났다.

비린 바닷물 냄새가 왈칵 나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사내는 무슨 일 인가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여인이 늘 누워 지내는 매트리스 위에 허연 알몸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숨이 훅하니 막히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함께 지내는 몇 달 동안, 그녀가 용변을 보는 모습을 비롯해서 정말 남녀 간 부부지간에도 못 볼 모습도 많이 보았지만, 그녀의 알몸을 본 일은 없다.

아마 사내가 그러했듯 여인은 배 밑창에서 바닷물에 멱을 감은 모양새다.

비록 그믐밤 어둠 속이지만 그 미미한 달빛에도 여인의 흰 몸이 하얗게 빛난다.

어쩌면 물기 탓일지 몰랐다.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덜덜 떨며 사내를 불렀다.


“ 나 안고 싶다고 했잖아. 염병, 드럽게 춥네. 빨리 이리 오라구 젠장. ”


사내는 첫날 그랬듯 엉겁결에 서둘러 옷을 벗고 여인 쪽으로 뛰어갔다.

기울어진 선실 바닥에 얼결에 사내가 나뒹굴 뻔하다 덮치듯 여인의 알몸을 끌어안았다.

여인은 소름이 끼치도록 차갑고 축축했다.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이 사내의 얼굴과 목덜미에 휘감겼다.

마치, 해초 더미를 끌어안은 것 같았다.

그녀에게서 비릿한 바닷냄새가 풍겼다.

사내는 처음에 너무 차갑다고 생각했던 여인의 나신이 더는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내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인어를 대하듯 부드럽고 매끄러운 손길로 여인을 어루만졌다.

의외로 여인의 감춰졌던 몸은 찰떡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다.

때때로 비부에 사내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뜨거운 정념이 물거품처럼 흘렀다.

여인은 사내의 전신을 삼키기라도 할 듯, 세이렌이 그러하였듯 거칠게 사내를 빨아들였다.

마치, 그들의 정사가 끝나면 지옥 같은 세상에 종말이라도 올 것처럼.


그믐달이 기울어 가는 포구의 밤이 이슥하도록 폐선에서는 끊임없는 신음과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날 밤 술에 취해 방파제를 거닐 던 동네 주민 몇은 폐선에 귀신이 있는 것 같다고 몸을 떨었다.

이튿날, 풍어제를 지낸다고 하니 폐선에 사는 귀신이 발작 났다고 소문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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