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식당 35
겨울비가 여전히 청승맞은 저녁이었어.
근처에 인테리어인지 뭔지를 하는 중늙은이가 운영하는 사무실이 있었는데,
평소에 잘 오지도 않고 술도 거의 안 하는 편이라 사실 관심 밖 인물이었지.
그래도 거의 매일 근처에서 마주치게 되고,
그놈의 인테리어 회사는 맨날 야근하는 건지 그 아재도 직원들도 밤늦게 와서 간단한 야식을 먹기도 해서 영 모른 체하기는 좀 어려운 처지거든.
그날도 저녁치곤 늦고 야식치곤 이른 일본식 라멘을 후루룩 거리며 평소의 아재답지 않게 맥주 한 잔을 시키더니 그 한 잔에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더군.
늘 조용해 보였는데 맥주 한 잔에 수다쟁이로 변한 걸 보고야 왜 평소에 술을 못하는지 이유를 알겠더군. 아뿔싸.
- 내가 말이죠. 예전 어릴 적부터 잡다 구려 한 소설류를 참 좋아했단 말이죠.
철 모를 때는 나중에 소설가가 되고 싶어 했어요.
그중에서도 헤르만 헤세 가 최고였죠.
당시 우리 때는 책 좀 읽었다는 놈들치고 헤세를 모르면 완전 개 무시당했거든.
왜냐, 그 당시에도 한국 작가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시대는 그랬어요.
가요보다는 팝송이, 한국문학보다는 유럽 고전을 알아야 뭔가 좀 인텔리 냄새가 났거든요.
맙소사. 인텔리라니. 인테리어도 아니고.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고색이 창연한 단어였어. 아무튼, 흔하디 흔한 사춘기 문학도라 이거지.
- 그때부터 헤세의 책을 참 열심히도 읽었더랬죠. 그 당시에는 삼성당인가?
아무튼, 좀 저렴한 문고판 책들이 꽤 있었거든요.
지질은 형편없어서 무게도 가볍지만 왜 그 청계천 중고책방.
거기 가서 싸게 사서 읽기가 좋았죠.
대여섯 번 읽은 거 같고, 그때 내 어린 뇌리에 콱 박힌 문구가 있었어요.
‘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 몸부림친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새로 태어나려면 둘러싸고 있는 알을 부숴야 한다.’ 뭐 이런 구절이었죠.
그래서 내가 사무실을 처음 차릴 때도 그 문구에서 모티브를 따와서 디자인했었거든요.
회의실 조명도 ‘알’의 형태로. 내 방의 출입구 문에도 ‘알’의 형상을 넣고 말이죠.
그런데 요즘 헤세가 데미안이라는 작품을 썼을 정도의 나이가 되고 보니,
그토록 감명이 깊었었는데 왜 가슴에는 와닿지 않았는지 탁! 알아버렸다는 말이죠.
햇새는 대체 무슨 종류의 새길래 햇반도 아니고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뭔가 저 작자가 나름 인텔리 놀이를 하는 거 같이는 보였기에 배알이 뒤틀렸지만,
그래도 손님이니 맞장구를 쳐줬지.
- 그래요? 저는 잘 모르지만 거의 반평생 가까이 정신적으로 따르던 작가의 글이 마음에는 와닿지 않았다고요? 왜죠?
재료를 손질하며 툭 던진 내 말에 한참 수다스럽던 사내의 입이 꽉 홍합처럼 앙다물어졌어.
뭐지 싶어서 흘깃 곁눈질하니 사내는 갑자기 먼지 가득한 천장의 흔들리는 조명을 바라보는 거야.
이런, 청소한 지 좀 되었는데 트집이라도 잡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살짝 불안해지던 찰나,
사내가 무겁게 입을 열었어.
아까의 들떴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게 막 병원 침대에서 일어난 것 같은 음성으로 말이야.
- 그게…. 생각해 보니 헤세는 평생 중산층 이하의 삶을 산적이 없는 거 같아요.
게다가 그 시대에는 참 드물던 전업 작가로 생활이 가능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니 평생 중산층으로 오르려고 버둥대던 나 같은 사람은 그가 왜 현실적 문제는 다 집어치우고,
늘 자아발견이나 ‘초인’에 가까운 비현실적 세계에 그가 왜 천착했었는지 전혀 공감이 안 갔던 거죠.
우리나라의 최인호 작가님이 대작가이고 저도 엄청 팬이었지만,
내심 70년대의 그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상황들에 진심으로 공감은 못 했던 그런 이유인 거죠.
말하자면, 알도 봉황의 알이 있고 독수리의 알도 있는데 나는 신에게로 날수도 없는 닭알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뭐 그런 거지.
음….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손님이 뜸한 시간에 구운 달걀을 만들기로 했어.
집에서 해 먹기는 번거롭고 달걀이 잘 터지기도 하고,
편의점 구운 달걀은 좀 차갑게 보관하니 야밤에 구워놓은 달걀을 사가는 손님이 꽤 되거든.
일단 냉장고에 있던 달걀을 바로 뜨겁게 가열하면 터져버려.
그래서 미지근한 물에 식초를 풀고 그 안에 달걀들을 담그는 거야.
그러면 달걀의 표면에서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하지.
식초는 아세트산이고, 달걀 껍데기는 탄산칼슘이니까 반응을 하는 거야. 이래 봬도 내가 이과 출신이거든.
그러면 달걀 알이 터지는 것을 막아주기도 하고, 끓는 물에 들어갈 준비체조가 된 거야.
압력솥 바닥에 물 한 컵 정도에 소금을 풀어 넣지.
소금으로 간을 하려고 하냐고? 아니야.
소금이 물에 들어가면 끓는점이 올라가니까, 물 온도가 천천히 상승해서 달걀이 터지는 걸 방지해 주거든.
그 위에 채반을 얹고, 미적지근 온수욕이 끝난 달걀을 올려.
그렇게 해서 압력솥 압력기가 탈탈거리기 시작하면 중간 불에서 한 40분 정도 익혀주고, 불을 끄고 내부 압력과 잔열로 20분 정도 놔뒀다가 꺼내어 찬물에 담가주면 끝.
아주 위생적이고 맛도 좋은 구운 달걀이 되는 거야.
새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고.?
알에 식초를 부어서 담가 봐.
뜨끈한 세상에 순응해서 맛 좋은 구운 달걀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