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심야식당

심야 식당 34

호랑이도 무서워한다네

by 능선오름

심야 식당 34

겨울답지도 않게 쓸쓸한 비가 내리는 날이었지.

겨울에 눈이 가득 내리면 온 세상이 모두 환하게 하얗게 변하니,

세상 더러운 것들을 모두 덮어주고 아름답게 변한다는…….

정도로 마음이 순수한 시절은 까마득할 정도로 세상에 닳고 닳은 나, 이지만,

그래도 제철이 되면 눈이 와야지 비가 내린다는 건 좀 그래.

당연히 빙판도 싫고,

당연히 가게 앞에 쌓인 눈을 치워야 하는 것도 싫은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가끔 손님이 없을 때 눈이 쌓인 골목길에 희미하게 가로등이 비치며 그리는 목가적인 풍경들은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기도 하고,

그럴 때, 마치 난로 위 양은 주전자처럼 후후 입김을 얼굴에 감싸 안고 가게 문을 들어서는 손님들이 반갑게 느껴지기도 하거든.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를 흠씬 적신 어떤 중년 남자가 들어왔어.

소주와 기본 안주로 계란말이를 시켜 홀짝이던 사내가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어.


- 올해도 어머니께서 쑤어주신 팥죽은 먹기 힘들겠구나…….

마침 다른 손님들이 없었기에 내 귓가의 사내의 읊조림이 들렸는데,

굳이 참견하게 된건 ‘올해도’라는 단어였지.

만약 어머니께서 연로하셨거나 돌아가셨다면 어차피 ‘올해도’가 아니라 ‘앞으로는’ 아니겠어?

굳이 딴지를 걸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온 손님의 투정을 외면할 수 없었던 건 어쩌면,

그날따라 추적추적 내린 겨울비 탓일 수도 있어.


- 왜요? 어머니께서 어디 편찮으세요? 나으시면 해주시지 않을까요?


내 물음에 사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푹 쉬는 거야.

- 아……. 저..치매세요.


이런. 좋아지기 어려운 병을 하필.

내 입방정이 순간적으로 후회되는 찰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지.


- 이게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어머니께서 해주시던 모든 것이 사라질 거로 생각하니 울적해서요. 어릴 적 동짓날이면 어머니는 늘 팥죽을 쑤셨고 저는 그게 먹기 싫어서 도망치곤 했어요.

어쩐 일인지 동화에 나오던 호랑이와 팥죽 이야기가 무서워 팥죽이 싫었었거든요.

그래서 어머니가 평범한 새알심 대신, 눈사람을 닮은 조랭이떡으로 새알심을 넣어주셔서 먹곤 했는데…….

이젠 불가능한 일이 되었네요.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 저런.

앞뒤 안 재고 또 내 입방정이 저도 모르게 불쑥 나와버렸어.


- 아, 그래요? 그러시면 오늘은 팥이 없으니 내일 오시면 조랭이떡이 들어간 팥죽 한 그릇 제가 대접해 드릴까요? 뭐 잘 해보진 않았지만.


나의 오지랖에 기뻐하는 사내를 보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어.


‘ 아이고, 팥죽을 쒀본 적도 없고 조랭이떡을 만들어 본적도 없구만……. 에혀 ’


일이 끝나고 나서 팥을 사서 찬물에 담갔어.

6시간 정도는 불려야 한다고 하니까.

함께 들어가는 찹쌀과 쌀은 두어 시간을 불린다고 하니 거참,

뭔가 귀차니즘이 발동하네.


오후에 출근해서 다시 담가두었던 팥을 한번 포르르 끓인 후 물을 버렸어. 첫물을 안 버리면 떫은맛이 있다고 하더군.

그러고는 압력솥에 팥을 넣고 한소끔 끓여주었지.

팥이 익는 동안 조랭이떡을 만들어 보았어.

익반죽이어야 한다고 해서 찹쌀가루와 소금 한 꼬집과 뜨거운 물을 넣고 휘리릭.

적당히 쫀득해지면 그걸 살살 뭉쳐서 길게 반죽을 뽑아낸 후 젓가락으로 툭툭 끊어 가운데를 젓가락으로 살살 누르면서 굴리면 오뚜기 모양이 되는데, 그 조랭이를 전분에 살살 굴려야 붙지 않아.

한소끔 끓여진 팥을 알갱이와 팥물을 분리하고, 믹서에 넣어 갈갈갈.

그런 다음에 면 보자기에 걸러 팥앙금만 남기고 아래로 내려간 팥물은 끓여둔 팥물과 섞섞섞.

팥물을 먼저 중간 불에 끓이며 휘젓다가 불려놓은 찹쌀과 쌀을 넣고 계속 젓는 거야. 그러다가 팥앙금과 소금과 설탕을 적당히 넣고 끓인 후에, 쌀이 다 익었다 싶을 때 오뚜기 들을 투척.

냄비 바닥에 붙지 않게 살살 저어주면 끝이야.

생애 처음 팥죽이 완성될 즈음에 어제의 그 손님이 왔어.

내가 끓여 내어놓은 팥죽을 보며 눈가가 촉촉해지더군,

손님은 말없이 팥죽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곤 한참 훌쩍였어.

생전 처음 팥죽을 끓여보며 그 어머님의 마음을 얼핏 알 것 같았어.

별것 아니지만 그 한 그릇을 끓이기 위해 전날부터 불리고 분리하고 휘젓고 하는 일들이 제법 걸리거든.

자식에게 동지라는 날의 행사를 기억 남겨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머니가 그 오랜 세월 전승 아닌 전승을 이어왔을까.


오랜만에 어머니가 보고 싶어지는 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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