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사내와 여자는 한동안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앞에 놓인 맥주캔을 들어서 한 모금 마시고,
여자는 오징어 조각 혹은 땅콩을, 사내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채 맥주캔만을 마시고 마셨다.
저녁도 굶은 사내의 뱃속에서 알코올의 기운이 불콰하게 올라오고,
아직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삼월의 저녁은 골목 바람에 조금 쌀쌀하였다.
사내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생겼다.
“ 저기……. 오늘은 출근 안 하셨나 봐요.”
여자는 다시 큰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밤에 출근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아저씨가? 나 감시한 거?”
그녀의 도발적인 대답에 사내는 일시 들이키던 맥주가 갑자기 사래에 걸려 콜록거리며 허리를 굽혀가며 또다시 밭은기침을 했다.
한참을 콜록 거리는 사내의 등에 여자의 손길이 닿았다.
여자는 사내의 등을 탁탁 두드리며 웃어댔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사내가 다시 허리를 일으켜 그녀를 바라봤을 때,
그녀는 사내의 등을 두드리던 손을 어느새 거두고 입가에 담배를 한 대 물고 있었다.
담배 연기를 지그시 피워 올리며 여자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기침에, 알코올에, 등을 두드리던 그녀의 손길에, 있는 대로 얼굴이 상기되어 얼빠진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고 그녀가 담뱃재를 톡톡 털면서 입을 열었다.
“ 이 아저씨. 진짜로 날 감시했나 보네…….
죽으려고 매달린 걸 느닷없이 쳐들어와 구해준 것 도 그렇고…….
아저씨 혹시 나 엿듣고 그랬어요?”
그녀의 말에 사내는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당황스러운 사내의 얼굴이 이미 어떤 변명도 핑계도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그녀는 빙글빙글 웃으며 다시 담배 한 모금을 머금었다 사내의 얼굴을 향 해 푸, 하고 내뿜었다.
“ 이 아저씨 진짜 못쓰겠네.……. 자기 맘대로 엿듣고 자기 맘대로 살려내고 말이지…….
하긴 그놈의 집구석이 너무 형편없어서 옆집 소리들이 너무 잘 들리기는 하지, 그렇지요?”
사내는 움찔하며 고개만 끄덕이는 형편이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꼭 사내에게 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마치 연극배우가 독백을 하듯,
그녀는 사내 머리 위 어둠을 바라보며 멍한 얼굴로 이따금 담배 연기를 흘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한참 넋두리 비슷한 말을 고저장단 없는 낮은 음성으로 ,
라디오 성우가 시를 읊는 듯 깊은 울림으로 한참 이야기를 하였으며 사내는 얼어붙은 것 같은 자세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그녀의 말들을 사내가 온전히 다 기억을 하진 못하여도,
그녀가 하는 말들은 마치 천둥처럼 들려와서 사내의 가슴에 박혔다.
“ 난 요, 아저씨가 어차피 잘 들리는 옆집 소릴 들었든 뭐든 상관없어요. 나도 그런 걸 뭐.
듣기 싫어도 너무너무 잘 들리잖아요? 그래서 난 때로 음악을 크게 올려 듣곤 해요.
그래야 안 들리니까. 근데 요즘은 새벽에 음악 크게 듣는다고 이 집 저 집에서 시비들을 걸어서…….
헤드폰을 끼고 잠들기도 하지만. 그건 불편해서 낮은 소리로 틀고 자곤 하지요.
근데 아저씨 방에선 정말 아무 소리가 안 나든데……. 마치 사람이 아예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근데 분명 사람이 있긴 한 거 같았거든.
그래서 누가 사는지 참 소리도 없고, 내가 출근하는 밤에만 있는가 보다……. 그랬죠.
아니 뭐 아저씨가 나 살려냈으니 책임지라는 건 아니에요. 뭐 책임지라면 책임질 거예요?”
말 끝에 쿡쿡, 웃음을 뱉으며 그녀는 두서없는 긴 말을 마쳤다.
그리곤 담배를 입술 사이에 물고 담배 연기 사이로 사내를 취한듯한 몽롱한 시선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내는 파라솔 의자에 앉은 이후로 처음 질문 아닌 질문을 한 이래로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그저 그녀가 자신에게 이렇듯 많은 ‘말’들을 걸어 준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따스하게 젖어오는 것 같았다.
한동안 사내를 바라보던 여자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 참 아저씨 재미없다. 일어나죠. 우리.”
‘우리’라는 단어 한마디에 사내의 가슴은 여지없이 충격을 받았다.
그게 어떤 의미 이던지 지금껏 살아오며 사내를 향해 ‘우리’라는 표현을 해 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골로 이사 가 버린 그의 누이조차도.
유일한 혈육인 누나조차 사내의 해고와 신용불량 이후론 '너는 너, 나는 나' 였었으니까.
더더욱 멍청해진 사내를 향해 그녀는 재촉하는 듯 눈빛을 보냈고 사내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골목길 오르막을 향해 몸을 돌린 사내의 오른팔에 갑자기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느닷없이 사내의 팔짱을 끼고 매달려 버린 것이었다.
사내는 연이어진 충격에 당황하여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의 젖가슴이 사내의 팔에 지그시 눌려왔고 그녀로부터 은은한 향기 같은 게 피어올랐다.
곁에 바짝 붙어 선 그녀의 키는 제법 커서 슬리퍼를 신었음에도 사내의 키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사내는 그야말로 굳은 듯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는데 그녀의 재촉을 받고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 뭐해요, 어서 ‘우리 보금자리’로 가야지. 춥잖아요.”
또다시 ‘우리’라는 단어를 듣고 사내의 마음은 터질 것 만 같이 두근거렸다.
아무 말 없이 빌라로 걸음을 옮기던 사내와 여자는 비좁은 빌라 계단 입구에서야 팔짱을 풀었다.
어둑한 빌라의 계단으로 바깥 가로등 불빛이 스며들어 깊게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고 지린내는 여전히 계단 입구에 가득했다.
말없이 여자는 앞서서 계단을 올랐고 그 뒤를 따라 올라가던 사내는 여자의 둔부가 상상보다 풍만한 것에 당황스러워 고개를 숙인 채 흘깃대며 올라갔다.
삼 층을 다 올라와 복도에서 집으로 걸어가다 보니 사내의 방이 먼저, 그다음이 여자의 방 순서였다.
사내의 방 앞에 이르러 갑자기 여자가 몸을 뒤로 돌리더니 사내에게 입을 맞춰왔다.
사내는 놀라서 거의 넘어질 듯 한 모양새로 복도 벽에 등을 거칠게 기대게 되었다.
그녀는 놀라운 힘으로 사내를 복도 벽에 붙인 채 사내의 입술에 그녀의 입술을 포개었다.
그녀의 입술은 뜨거웠으며 그녀의 두텁고 관능적인 혀가 찝찌름한 오징어의 맛과 비릿한 맥주의 맛,
고소한 땅콩의 맛과 더불어 립스틱의 달콤한 내음이 범벅이 되어 사내의 메마른 혀에 겹쳐 거침없이 들어왔다.
그녀의 타액 은 달고, 숨결은 놀랍도록 뜨거웠다.
숨을 참느라 헐떡거리는 사내의 귓가에 그녀가 낮고 달뜬 은밀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아저씨, 오늘 내 방에서 자고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