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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ul 12. 2024

라면 연대기 37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보고서

라면 연대기 37     


‘ 빚’ ‘팔려옴 ’     


마치 후보생 시절에 보초를 서며 졸면 몰래 다가와 허벅지에 대검 끝을 푹 찔러 넣던 교관의 말투만큼이나 (군용 대검은 평상시에 날이 없어서 베이지 않는다. 전쟁이 벌어지면 날을 세운다) 영애의 날카로운 반응에 잠시 움찔했던 라 군은 잠시 멍해졌다.

빚이라.

게다가 팔려오다니.

가끔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라는 게 고향 친구였던 영애의 일이었다니.

그리고 그게 현실이라니. 팔린다 라는 단어가 사람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라 군은 깨달았다.     


- 야, 그렇다고 뭐 그렇게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을 짓냐. 별거 아니야. 나중에 빚 다 갚으면 고향 내려가서 조그만 옷가게라도 하면 그만인데 뭐.

 이도 저도 안되면 특기를 살려서 다방 하나 차리면 안 되냐? 하하하     


라 군의 등짝을 후려갈기며 영애가 날카롭던 어조는 어딘가로 간 듯 명랑하게 말을 건다..     

하지만 철없어도 늘 심각하게 살아온 라 군은 영애를 따라 웃을 정도로 비위가 좋지 못하다.     


- 그러면, 만약 빚을 못 갚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라 군은 천연덕스러운 영애의 말에도 딱딱해진 얼굴 거죽을 펼 수는 없었다.

라 군이 지금껏 살아온 세상은 그랬다.

그가 살던 알량한 무허가 판잣집이 철거된 이후로 라 군에게 펼쳐진 세상은 늘 악의가 가득했었다.

때때로 호의처럼 보였으나 실은 그 뒤에 더 깊은 악의와 심술궂음과 비웃음이 담겨 있던 것이 라 군이 살아온 우주였었다.

한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고비가,

그 고비를 어찌어찌 넘어서면 또 다른 새로운 괴로움들이 마치 어릴 적 동네 유일한 수돗물 파는 집 앞에 늘어선 제각기 모양의 물통들처럼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하사관 교육대에서 받던 유격훈련장과 같았다.

죽을 것처럼 힘들고, 그 힘듦을 어찌어찌 넘어서서 언덕을 뛰어 올라가면 그다음에는 또 다른 형태로 고통을 선사하는 장애물들이 즐비했었다.

그걸 몇 번 겪고 나서야 라 군은 유격장의 생태계를 이해했었다.

사회와 다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군대 사회도 그와 다를 게 없고 오히려 남자들만의 세계란 이렇게나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지배되는 세상임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것을.     

어쨌거나 유격장에 들어온 이상 교육시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어떤 형태의 장애물과 얼차려라도 계속 이어져야 했다.

어딘가 무의미해 보이는 그런 행위들을 매일매일 쉰 목소리로 악다구니 싸기며 시키는 조교들도 실은 아무 영혼 없이 하루의 일과를 이어가는 것뿐이고,

그들의 말을 마치 저승사자들이라도 되는 양 쩔쩔매며 땅바닥과 시궁창을 연달아 구르는 후보생들도 그러했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시키는 자와 시킴을 당하는 자의 차이일 뿐 결국 두 인격 모두가 ‘일과’를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교육자와 피교육자라는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은 모두 ‘유격 훈련’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굴레 안에서 벗어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한 이후로 라 군은 힘겹고 고통스럽고 자신에게 그토록 고통을 선사하는 조교들에 대한 증오심이 싹 달아났다.

그때부터는 그저 일과시간이 흘러 하루가 지나기를 묵묵히 견디면 되었다.

그런 경험들이 몸에 익고 머리에도 익고 영혼도 익어갈 때 즈음에 비로소 라 군은 어릴 적 뭔지도 모르고 열심히 읽었던 일리아드 와, 그리스 역사에서 나오는 스파르타라는 폴리스에서 정책적으로 운용했다는 집단적 전사 기르기 란 어떤 것인지, 그때의 소년들의 마음이 어땠을지를 충분히 아주 충분하게 이해를 하였었다.     


그런 맥락에서 영애가 지금 빠져있는 ‘빚’이라는 굴레는 결코 쉽게 벗겨질 것은 아닐 것이다.

그 굴레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영애는 일평생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이대로 늙고 늙은 상태로 전방 어느 부대 앞 선술집 포주로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이야 이십 대지만, 라 군이 보기에 불과 몇 년 전 볼이 발그레하던 그녀의 청춘은 이미 짙은 화장과 거친 생활 탓인지 이미 이십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라 군이 다방을 나가고 나서 영애는 창가에 앉아 병촌의 좁은 도로를 걸어가는 라 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습관처럼 담배를 물고 푸 연기를 뿜는 영애의 눈가에 연기가 스몄는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 야 영자야, 옛 애인이라도 만났냐? 청승맞게 질질 짜고 그래?     


카운터 담당이자 주방을 맡은 마담이 성깔이 유다른 영자에게 신경이 쓰이는지 눈치를 보며 말을 건다..     


- 애인? 뭔 개똥 같은 소리야. 그냥 고등학교 때 동창.

- 동창? 너 고등학교씩이나 나왔었니?

- 하! 언니 이거 왜 이래. 나도 교복 입고 단발머리 날리던 시절이 있었다구. 젠장맞을 아버지의 노름빚 때문에 내가 이 모양이 되었지만 말이유.    

- 멍청한 년! 고등학교씩이나 나왔으면 하다못해 회사 경리라도 할 일이지 이게 뭔 지랄이냐?


마담의 덕담도 아닌 악담을 들으면서 영애는 멀어지는 라 군의 뒷모습을 실눈으로 바라보며 눈가를 훔쳤다.

아, 하필이면.

이 넓고도 기나긴 전방부대가 쌔고 쌨는데. 하필이면 저 녀석을 이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마주칠 줄이야.

창피하고 반가우며 속이 쓰렸다.

간밤에 티켓으로 나가 퍼마신 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저 ‘라면’의 성격에 휴가나 외출을 나가서 동네방네 떠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한때 ‘라면’의 집주인 딸이라는 조금은 우월한 위치에서 바라보던 애한테 치부를 들켜버린 것 같아서 영애는 속이 점점 더 쓰려왔다.

게다가 이곳은 좁디좁은 병촌.

라 군이 듣기 싫더라도 몇 안 되는 식당, 다방, 술집 한 바퀴만 돌아도 자신에 대한 온갖 소문이 돌 거라는 것을 영애는 잘 알고 있었다.

여자들이 수다스럽다곤 하지만, 정작 남자들만 모인, 게다가 실제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이상 남는 게 시간이고 할 일은 수다밖에 없음도 잘 알고 있다.


라 군의 부대마크와 병과와 소속 정도는 이미 라 군이 입고 있었던 군복만 보아도 척 하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다사다난했었던 전방 각지의 군 짬밥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러고 보면 군대로 친다면 잘하면 아주 젊은 상사? 급 정도는 된다 자부하는 영애였다.

라 군의 군복이 떠오르자, 자기를 지목해서 티켓을 끊었던 그 부대의 장교, 하사관, 병사 들이 줄줄이 생각났다.

별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가끔은 생각나던 라 군도 저렇게 전방 어딘가에서 헤매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름 알뜰히 대접했었던 기억.

그런데 하필.     


- 야. 영자야, 청승 그만 떨고 와서 라면이나 먹어. 점심때도 지났잖아?

- 아이씨! 그래도 명색이 추석 연휴인데 라면이 뭐야 라면이! 언니나 실컷 먹어!     


빽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나가는 영애를 향해 마담이 혀를 끌끌 찬다.     


- 아니. 저년이 배가 쳐 불렀나, 여기 사연 없는 년 있어? 뭔 지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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