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봐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두루 치렀을 것으로 보이는 마담은 왜? 하는듯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영애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들고 갔던 마호병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 언니! 대체 이 동네 새끼들은 왜 이 모양이야? 일단, 이모! 저기 갈매기 아자씨한테 쌍화차 진~하게 한 잔~
다짜고짜 성질을 올리는 영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 군은 속으로 여전히 변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했다.
항상 그랬었다.
뭐든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영애가 기억났다.
어쩌면 그녀는, 원해서 정해진 게 아닌 장녀라는 이유만으로 한 살 터울의 동생에게 모든 걸 양보하며 사는 삶에서 터득한 그녀만의 생존법일지도 몰랐다.
정작 영애의 고함을 들은 마담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 왜, 이 동네 애새끼들은 뭐 특별하던? 물건이 너무 작나?
천박한 말을 천박한 뉘앙스 없이 심드렁하게 읊조린 마담은 자기가 말을 해놓곤 스스로도 웃긴 듯 키들거렸다.
- 아니, 자기네들 고스톱판에 달랑 커피 서너 잔 주문해 놓고는 가슴을 막 주무르려고 하잖아! 내가 만만해 보여?
영애의 항변이 비좁은 다방을 쩌렁쩌렁 울리자 구석에 몰려 앉아있던 병사들 서너 명이 킥킥거렸다.
마담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지그시 영애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쉰다.
- 야, 영자야. 너 참 어처구니가 없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대한민국에서도 저기 남쪽 섬에 팔려 가기 전 마지막 단계라는 최전방이야. 대체 뭘 기대해? 너도 여기저기 서울서 팔려 다니다 빚에 쫓겨 여기로 들어온 거잖아. 그러니 뭐다? 돈이 최고지! 허락 없이 가슴을 만지려고 하면 그냥, 그러려면 티켓을 끊으라고 하면 되잖아. 돈이 없으면 더 못 만질 거고. 돈이 있으면 티켓 끊어서 너도 벌고 나도 벌고. 좋잖아?
거침없이 술술 대답하는 마담의 말에 영애도 잠시 말문이 막혀 보였다.
아주 짧지만, 그 몇 마디 대화로 라 군은 왜 영애가 이 최전방 병촌으로 흘러들었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래도 중학생 시절 라 군의 눈에는 꽤 여유로워 보이던 영애네 집이 어찌 되었기에 저 아이가 하필 다방 레지의 길로 들어섰는지 그걸 모를 뿐.
어찌 보면 첫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고 첫 입맞춤의 상대라는 기억에 어딘가 아련할 수 있겠지만,
라 군의 기억 속에서 영애와 함께했던 짧은 시간들에 대한 기억들은 대개,
당시의 혹독하고 남루하던 시절들이 흑백사진처럼 겹쳐져서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마담의 조용한 대꾸에 할 말이 없어진 듯 영애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라 군이 앉아있는 자리로 걸어오더니 턱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라 군의 곁에 앉았다.
어중간한 위치에 앉아있던 라 군은 헉, 하며 옆으로 밀려 나갔고.
자리에 앉은 영애가 카운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 언니~ 여기 쌍화차 하나 추가!
마담은 눈을 흘기더니 카운터 뒤 주방에 대고 쌍화차 하나 추가! 라며 맞서 소리를 지른다.
라 군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라 군의 표정을 힐긋 바라본 영애는 테이블 위에 놓인 라 군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그 곁에 놓인 라이터로 불을 붙여 '후'하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 야, 오랜만인데 쌍화차 한 잔 살 수 있잖아? 넌 군인이 되니 꽤 키도 커지고 몸도 좋아진 거 같다?
마치 엊그제 헤어진 친구처럼 영애는 라 군의 한쪽 팔에 팔짱을 자연스럽게 꼈다.
영애의 가슴이 뭉클하며 라 군의 팔뚝을 누르는 감각에 라 군은 십 대의 그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 영…. 자라고?
라 군의 입에서는 엉뚱하게 아까 마담이 영애를 부른 이름에 대한 의문이 튀어나왔다.
다시 '후'하고 허공에 도넛 같은 연기를 뿜은 영애가 코웃음을 친다.
- 야, 너 다방레지가 본명 쓰는 거 봤어? 닌 그나마 ‘영’은 그대로니까 나은 거라고. 너 다방레지애들 중에 미혜니 소영이니 하는 애들 원래 이름은 다 분자 복순 이래. 웃기지 않냐?
혼자 킥킥대는 영애를 보며 또다시 라 군의 입에서는 머릿속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 근데, 너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
라 군의 질문에 영애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미간을 진하게 찌푸리며 세게 담배를 빨아들이곤 재떨이에 담배를 거칠게 비벼 껐다.
- 어쩌다가 라니? 내가 뭐 어때서?
사나운 표정으로 라 군을 흘겨보는 영애는 이미 잔뜩 껴안고 있던 팔짱을 내던지듯 놓고 있었다.
- 아니, 뭐……. 어쩌다 이런 전방에 다방 레지로 오게 되었냐는 거지…….
- 너 아까 못 들었어? 총을 너무 쏴서 귀먹었냐? 서울서 빚져서 팔려 왔다잖아. 못 들었냐?
날카로운 영애의 대답에 라 군의 얼굴이 굳었다.
순간적으로 라 군은 그녀가 혹시 ‘팔리다 또는 팔린다’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곤 있는 건가 싶어서 정말로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말은 저 멀리 영국, 미국의 식민지 시대의 흑인 노예 또는 고대 아라비아 쪽 혹은 로마제국 시대의 적 포로를 노예로 삼던 시절.
아니면 조선시대의 노비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지 지금의 시대에 맞는 용어는 아니지 않나?
노예선 설계도
* 국립국어원 사전에 따르면 마호병은 보온병으로, 레지는 다방종업원으로 순화하는 게 맞으나 그랬을 때 어감이 느껴지지 않아 과거 용어를 그대로 씁니다.
레지(reji)「명사」 다방 따위에서 손님을 접대하며 차를 나르는 여자.
마호-병(mahô [魔法]甁)「명사」 물 따위를 넣어서 보온이나 보랭이 가능하게 만든 병.≒보온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