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능선오름 Jul 06. 2024

라면 연대기 35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보고서

라면 연대기 35        

  

- 야! 라면!     


귀에 익은 듯 하지만 낯 선 목소리.

라 군은 대체 이 병촌에서 감히, 자신에게 ‘라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군 간부이거나 드물게 보는 하사관 학교 동기들 일 텐데.

이곳에서 자신을 ‘라면’이라는 멸칭으로 부를 사람은, 게다가 여자 목소리로 부를 사람은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은 조명탄처럼 순식간에 퍼지고, 행동은 그 보다 더 빠르다.‘

라 군은 무심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순간 갸우뚱했다.     


거기에는 화사한, 어찌 보면 화사한 게 아니라 촌스럽기 짝이 없는 현란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얼굴을 새하얗게 분칠하고 입술은 고참 중사들이 말하곤 하는 ’ 쥐 잡아먹은 것 같이‘ 새빨갛게 립스틱을 바른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 똥머리‘라는 방식으로 갈색 염색기가 반은 빠져나간 풍성해 보이는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고,

이 울퉁불퉁한 병촌의 길바닥에서는 극히 보기 드문 빨간색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고 있었으며,

한 손에는 뭔가 반짝이 핸드백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전혀 매칭이 안 되는 적갈색 보자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라 군은 순간적으로 ’ 아, 새로 온 다방 레지인가? 날 어찌 알지? ‘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 레지‘는 사실은 멸칭이 아니다.

lady를 콩글리시로 발음하다 보니 ’ 레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방문화의 특성상 그 ’ 레지‘를 그 ’ 레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물론 없다.


자신을 보면서 갸우뚱 거리는 라 군을 보던 그 여인은 빨간색 입술의 입꼬리가 활처럼 휘도록 올렸다가, 라 군의 어리둥절 한 모습을 보자 미간을 찌푸리며 또각또각 소리를 내면서 라 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라 군은 그 현란하다 못해 촌스러운 모양새의 여자 모습에서 어렴풋한 누군가가 떠올랐다.

’맙소사‘


순간적으로 철


모를 개머리판으로 찍히던 시절과 똑같은 울림이 라 군의 머리를 쳤다.

머리가 크게 울렸다.

그건.

바로 영애의 얼굴이 낯 선 다방 레지의 가부키 분장 같은 얼굴 위로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울퉁불퉁하기 짝이 없어서 궤도차량ㅡ탱크. 장갑차. 불도저 ㅡ이나 무리 없이 달릴 군용 도로 위를 멀쩡하게,

깊게 파인 골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걸어오더니 라 군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더니 라 군이 뭐라 하기도 전에 암팡지게 움켜쥔 주먹으로 라 군의 배를 후려갈겼다.

순간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매운 일격.

그러나 그 정도 주먹질은 공고 입학날부터 이미 수년간 단련이 된 라 군이었다.     


- 너! 너? 너!? 너.

라 군은 바보처럼 동일한 한 마디 단어를 각기 다른 음정으로 연이어 발음했다.

마치 중국어의 4 성조처럼.     


-이 벼응신! 날 못 알아봐?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자 비로소 라 군은 그녀가 자신의 아련한 기억 속 그녀.

주인집 딸 영애. 첫 키스를 담배냄새와 더불어 빼앗았던 그녀.

학교 근처 언덕에서 라면을 먹고 서로를 더듬었던 철없던 시절의 그녀.

영애임을 깨달았다.

그리곤 이내 정말로 멍청해져 버렸다.


그 서슬에 영애의 손에 쥐어진 보따리에서 빨간색 마호병이 튀어나와 떼구루루 구르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고, 라 군은 그게 마치 잘못 던져진 훈련장의 수류탄인 것처럼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칠 거렸다.

잠시 구르는 수류탄을 보며 얼어붙은 조교처럼 그 자리에서 멍 하게 서있는 라 군을 바라보던 영애가 갑자기 덥석 라 군을 껴안았다.

그 순간에 라 군은 드디어 수류탄이 터져버린 것처럼 사고회로가 정지하였고,

그다음 행동은 저도 모르게 푹 가슴에 들어와 버린 영애의 등덜미를 토닥거렸다.


그 이후에 느껴진 것은 엄청난 꽃 냄새, 아니 꽃 냄새보다는 훨씬 독하디 독한 내음이 라 군의 코를 지나 모든 후각세포를 얼얼하게 일깨운다.

문득 라 군은 예전에 고교시절 기숙사에서 선배들이 키들대면서 읽던 외국 포르노 잡지에 실려있던 향수 광고가 생각났다.

향수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포르노 잡지에 실릴 정도의 향수라면 뭔가 굉장히 임팩트가 있는 단어 아닐까? 하고 슬그머니 영한사전을 뒤진 것인데, 라 군의 기억에는 이랬다.     

“ poison1.중독되다2.독3.독약4.포이즌 미국 [pɔ́izn] 듣기 영국 [pɔ́izn]’

그런데 사진에 나온 향수그림과 배경에 있는 반라의 금발미녀가 너무나 강력해서,

라 군은 아마 그 향수가 독처럼 치명적인 그런 냄새가 아닐까 쓸데없는 상상을 했던 것이다.

그동안 라 군이 그나마 ‘향’에 가까운 물질을 접해본 기억이라야 제삿집에서 피어오르던 향의 연기와 세숫비누에서 나오는 향 정도였으니.


그러나 영애의 향은 그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아찔하고, 현란하며 일거에 후각을 마비시키는, 그러면서도 어딘가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역겨움을 유발하는 그런 냄새였다.     

크게 왕래가 적은 병촌이었지만 휴가에서 복귀 중이거나 휴가를 나가는 중이거나 부대 간 편지를 전달하는 문서수발병 이거나 할 군인 몇이 휙휙 휘파람을 불고 좋네 좋아, 혹은 어휴.. 새카만 갈매기가 봉 잡았네, 거나 그도 아니면 ‘따먹어라~ 하는 소리까지.

온갖 소음이 들려왔다.


군복을 입고 있던 라 군이 저도 모르게 살며시 영애의 어깨를 잡아서 자신의 몸에서 떼어냈다.

창피하기보다는, 저도 모르게 척추를 타고 흐르는 저릿한 느낌이 불편해서였다.

영애는 순순히 물러나서 바닥을 구르고 있는 마호병을 쳐다보았다.

라 군은 이때다 싶게 허리를 굽혀서 마호병을 들어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마호병은 비워진 듯 아주 약간의 찰랑임이 느껴졌고, 그 새빨간 껍질에 찍힌 영문이 낯설었다.

MAXIM.

라 군의 기억에 나오는 맥심은 포르노 수준은 아니어도 내무반에 반입이 금지된, 그러나 거의 모든 부대원들의 철모 속에 꼬깃꼬깃 접혀 낱장으로 보관된 헐벗은 여인들의 사진이 태반인 잡지 이름인데.

엉뚱한 생각들이 마치 이미 훈련이 끝난 사격장 바닥을 굴러다니는 잡초뭉치들처럼 라 군의 머릿속을 헝클어트리고 있는데, 영애의 뾰족한 음성이 들렸다.     

- 뭐 해? 나랑 다방으로 가서 얘기해!     


뭐라 답할 새도 없이 라 군의 손을  부여잡고 앞서 걷는 영애였다.     

아. 그래. 얘는 원래 이런 애였지. 아. 이제 애는 아니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라면 연대기 3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