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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ul 03. 2024

라면 연대기 34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보고서

라면 연대기 34

    

이십 대 중반.

아직 한창 혈기가 넘칠 나이의 청년이 낯선 병촌에서 자취를 한다는 것은 보통 직장인들이 자취하는 것과는 의미가 달랐다.

외출, 외박을 나오는 병사들을 노리고 만들어진 병촌은 일반적인 산골 동네와도 다르다.     

마을의 중심에 부대 면회 짱이라 할 수 있는 충성회관 – 말이 회관이지 가건물 같은 곳 내부에 PX가 들어가 있을 뿐인 – 이 있고,

마을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초입에는 차도 양옆으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올려져 있고 콘크리트 덩어리에는 거칠게 얼룩덜룩한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본래의 의도는 그 보기 싫은 덩어리를 주변 숲에 어우러지게 위장을 하는 목적일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난스러운 페인트칠 덕분에 오히려 시선을 잡아끄는.

그 콘크리트 덩이의 공식 명칭은 대전차 장애물이었다.

적 탱크가 차도를 이용하지 못하게 전시에는 폭약을 터뜨리면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이 무너져 도로를 막는 역할.

사실, 여러 가지 테스트를 통하여 그 대전차 장애물의 효력이란 고작 10분 도 안된다는 걸 알 군인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그 입구를 지나 병촌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당구장, 여관, 술집, 다방, 식당, 군장품(군인들에 필요한 의류와 용품과 마크 등등)을 파는 마크사 등이 있고,

차도가 끊기는 곳이 곧 마을의 끝이었는데 그곳에는 군 검문소가 있어서 대전차 장애물과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그 검문소 이후부터가 군부대들이 즐비한 곳이다.


즐비하다는 말의 의미가 공간적인 의미에서 빼곡하다는 뜻이 아니다.

검문소 이후로부터 한쪽은 가파른 산, 반대편은 나지막한 산, 두 산길의 우듬지가 맞닿은 곳이 곧 군용 도로이고 그곳으로는 버스는 물론 일반차량이 드나들 수 없다는 뜻이다.

가끔 드나드는 승용차도 대개 어떤 부대의 최고 지휘관의 개인차량, 혹은 보안대의 차량 정도였다.

군부대는 그 특성상 대놓고 드러나진 않는다.

다만 공허롭기 그지없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풀숲이 무성해 보이던 숲에 갑자기 잿빛에 얼룩덜룩 군용 위장 페인트를 칠한 벽이 나타나고, 그 벽에는 녹슨 철조망들이 둥글게 휘감겨 있었다.

그러다 대충 담장 길이의 중간 즈음에 노란색과 검은색이 스트라이프 무늬를 이루는 차단기와 삐죽삐죽 용설란 가지처럼 돋아난 차량 정지용 철물들이 보이고,

그 뒤에는 거무스름하고 너덜거려 보이는 위장천에 덮인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그게 위병초소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렇게 도로 사이사이로 숨겨진 군부대들이 나타나니 ‘즐비’ 하다고 표현하는 것뿐이다.

민간인이란 아예 보이지 않는 곳.          

마을의 특성이 그러하니 대개의 가게 뒤편에 살림집들이 붙어있었는데,

라 군이 자취하는 곳은 마을의 중심인 충성회관과 가까운 집이었다.     

자취라곤 하지만,

군 간부들은 그 마을을 벗어날 수 없었다.

마을을 벗어나려면 일종의 통행 증명서 같은 것을 인사과에서 받아와야 했고,

휴가가 아니면 마을을 벗어나서는 안 되는 규정이 있었다.

마을에 자취하거나 살림을 차린 군인들은 단지 부대 내에서 생활을 안 한다는 것 외에는,

그냥 걸어서 십여 분 거리의 부대와 그에 딸린 도보 10여분 이내의 병촌마을에 속해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라 하사는 처음에 영외거주를 한다는 것이 꽤 큰 자유를 받는 것으로 생각했었고,

그게 틀린 것은 아니었다.

퇴근 이후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눕거나 자거나 책을 읽거나 티브이를 보거나,

술을 마시거나 라면을 끓여 먹거나 자유로 왔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라 군은 그가 누리는 소소한 이 자유라는 것이 영내에 거주하는 간부들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젊디 젊은 청년들이,

걸어서 십여 분을 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위수지역’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갈 곳이 없다는 것.

그건 조금 더 커다란 병영에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늘 시선이 있었다.

마을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술집, 다방, 음식점의 주인들은 거의 원주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사연으로 전방 골짜기로 숨어 들어온 공통의 조상들을 둔,

일종의 집성촌 같은 것이었다.

그 병촌에서 벌어지는 경제활동이라는 게 활발한 것이라면 벌써 외지에서 장사를 목적으로 들어올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그곳의 경제 규모라는 것이 알량한 군인들의 땀 묻은 돈을 빼가는 정도이니 그럴 확률도 없다.

대부분 주민이 나이가 들어있고, 군인들을 그저 소비자로만 대하는 심드렁한 분위기가 마을 전체에 퍼져있었다.

그리고 마을 주민의 대부분인 외지인이라는 것은 그들이 각 지방에서 빚을 피해 도망쳐서, 아니어도 ‘도시’라는 곳에 각자의 환멸을 느껴 일종의 ‘섬’ 같은 곳으로 도망쳐 온 것과 다르지 않다.     

그곳에서 젊은이란,

영외거주를 하는 총각 간부들과 술집이나 다방에서 호객하는 묘령의 여자들뿐이다.     

그리고 비좁은 병촌의 특성상 그 누구도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누가 어디를 주로 가더라.

누가 누구랑 만나더라.

어느 부대 간부 누가 다방의 여종업원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군 간부를 감시하고 일거수일투족을 하릴없이, 정말 열심히 기록하는 것이 임무인 '보안대' 대원들에게는 아주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병촌이다.


그래도 라 군은 만족하려고 했다.

아니, 실제로 만족하기도 했다.

열악하기 짝이 없었던 시장 동네의 집들.

사생활이라곤 없었던 공고 기숙사의 생활.

전입 후 자대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2년 간 병사들과 함께 막사 생활.

어차피 초급 간부라는 게 부임과 동시에 병사들과 알력다툼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도 않고,

절대다수인 그들 사이에서 잠을 자고 생활을 한다는 게 얼마나 큰 부담인지를 모르지 않을 간부들이 왜 그런 식으로 굳이 신임 간부들을 내버려 둔 것인지 라 군은 지금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병사들을 지휘하고 이끌기 위해 그들의 일상을 체험한다는 의미는 안다.     

하지만, 장교들은 신임 때부터 영내 숙소에서 별개의 생활을 한다.

그러나 하사관들은 중사 정도의 계급이 되기 전에는 병사들의 공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알아서 다투고 알아서 적응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병사들과 설마 친해지기를 바라는 것인지.

군대 내에 수두룩 하던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저 ‘관례’ 일 뿐인지 알 수 없었다.

불합리한 것은 대개 군대라는 절대적 비밀공간에선 ‘관례’ 혹은 ‘라때는’ 이란 단어로 치환된다.     

초임 하사 때 내무반에서 공포탄을 쏴 말년 병장들을 일거에 제압한 이후로 라 군의 별명은 라면 하사에서 ‘돌 하사’로 바뀌었다.


또라이 하사라는 의미로.

그 덕분에 나름 병사들의 길들이기로부터는 자유로워졌지만,

상대적으로 라 군은 병사들과 친한 감정을 쌓을 수는 없었다.

그런 어중간한 상태로 2년이라는 세월을 그 병사들과 한 내무반에서 지낸 다는 건,

라 군에겐 새로운 시선의 지옥일 뿐이었다.

군대는 비밀의 집단이자 보안유지의 집단이지만 그 특성상 부대 내에 일어난 일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 집단내 모두가, 심지어 PX를 관리하는 군무원에게 까지 다 까발려진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덕분인지 이후로의 생활에서 라 군이 선임들의 이른바 ‘군기 잡기’에서 열외가 되었다는 건 뜻밖의 의도치 않은 효과였다.

‘또라이’ 때문에 직업이자 생활의 전부인 군생활을 마치고 싶은 간부도 장교도 없었으니까.     

내무반에는 24시간 늘 시선이 있다.

낮에는 병사들 대다수가,

밤에는 불침번이.

그 모든 시선은 알게 모르게 내무 침상 끝에 마련된 라 군의 자리를 말없이 지켜보았고,

라 군은 그 시선들을 의식하며 종일 지내야 했다.

적어도 영외거주를 하게 되면서 그가 벗어난 것은 그런 의미에서는 꽤 무게감이 큰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좀 흐르자 감사함은 무뎌지고 지루함이 되기도 한다.

명절 연휴 때면 병촌의 식당과 술집들은 거의 문을 닫았다.

모두 원래의 고향으로 오가는 이유도 있었고,

대체로 그런 시기에는 외박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기에 영외에 거주하는 독신 간부들은 기본적인 생존 문제에 봉착하곤 했다.


식당이 문을 닫으니 밥을 굳이 먹겠다면 부대로 다시 돌아가거나,

아니면 자취방에서 밥을 해 먹거나 해야 하는데 한 달의 절반 이상이 당직근무 이거나 야간 훈련인 군인들이 집에서 밥을 지을 정도로 성의가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라 군 역시 그토록 원하던 라면들을 물릴 정도로 먹곤 했었다.     

추석 연휴가 끝나기 전이었다.

연휴의 절반은 당직근무를 서고, 절반은 자취방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잇던 라 군은 연휴가 끝날 즈음이 되어서야 지겨운 방을 탈출하여 산책을 나섰다.

산책이라야 마을을 다 돌아도 이십여 분이 지나지 않는 곳이지만,

그래도 며칠을 방안에서만 갇혀있다시피 했던 터라 일부러 움직인 것이다.

병촌은 평소와 같은 약간의 삭막함, 약간의 우울함 속에 고요했다.

병촌이 활발하게 느껴질 때는 병사들이 외출을 나와 바글거릴 때 외에는,

늘 산골 마을 특유의 나른함과 고요함이 마을을 안개처럼 덮고 있었으므로.

지나치게 익숙하고, 지나치게 무료한 풍경 속을 거닐던 라 군의 귀에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들렸다.     

- 야!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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