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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ul 02. 2024

라면 연대기 33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보고서

라면 연대기 33     


라 군이 퍼뜩 꿈에서 깨어난 건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려서였다.

과거의 악몽에서 깨어난 라 군이 고개를 들자 그의 앞에 당직사관이 서 있었다.     


- 어이, 라 하사. 왜 그래? 앓는 소리를 내던데.

- 아, 아닙니다. 꿈을 꾼 모양입니다.

- 이런, 임마. 초임 하사가 근무 중에 졸아? 이 새끼 이거 군기가 빠졌네. 뭐, 그래봤자 나는 다음 달에 집에 갈 거니 봐준다. 하!     


어느새 날이 밝은 모양이었다.

당직병이 행정반 유리창에 드리워져 있던 등화관제용 암막지를 말아 올리고 있었다.

창문 밖은 희부옇게 아침 해가 비치고 있었고.

라 군의 초급 간부 생활은 그렇게 거친 공포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야전군.

원래는 전장에서 야전에 주둔하는 군대를 말하지만, 간부들이 말하는 야전군이란 대체로 DMZ 지역을 중심으로 수도권에 이르기 이전까지 지역을 통칭한다.

보통 민간인들 사이에서 ‘전방’이라 불리는 그런 곳이 바로 야전부대인 셈이다.

야전부대에서 지내는 기간 동안 라 군은 군대 내에서 그토록 다양한 라면을 끓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원래도 라면을 좋아하던 라 군은 군대에서 늘 아쉬웠던 것이 바로 라면인데,

그게 어디서 어떻게 끓이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교육기관에서는 일요일 아침에 라면이 나오곤 했었는데 그것은 전 군이 비슷했다.

군부대의 일요일 아침 식사는 대개 라면이었다.

대규모 인원이 식사하는 하사관 교육대 같은 곳에서는 보통 대형 솥에 라면을 끓였는데,

그럴 때 라면이 불어 터져 거의 죽 같은 상태로 나오게 되었었다.

그렇게 불어 터진 라면을 끄트머리에 포크가 달린 커다란 군용 숟가락으로 떠먹는다는 것은,

어느 모로 생각해도 라면을 면발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다 주특기 교육을 받으러 간 주특기 학교에서는 또 단체급식을 하는 방법이 달랐다.

그곳에서는 다단화되어있는 찜통에 밥을 찌듯이 생라면을 넣고 물을 약간 부어서 쪄버리는 것이다.

수프는 따로 들통에 끓이는데, 

나중에 쪄진 라면을 식판에 올려, 라면 수프를 따로 끓인 국물을 넣어준다.

그렇게 만들어진 라면은 거의 냉면에 가까운 질김을 보였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냄비에 끓여진 라면은 드물기도 하고,

제대로 끓인 라면이란 야전부대에서는 굉장히 귀한 음식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군부대 특성상 야전부대에서는 수시로 내무반 검열이 있어서 내무반이나 행정반에 화기를 놓아두는 건 규칙 위반이다.

사회에서 일상으로 사용하던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제각기 부대 특성별로 다양한 라면 끓이기 신공이 발휘되곤 했는데,

주 병장이 페치카 위에서 라면을 끓이던 기상천외한 봉지라면이 그중 한 가지 방법이었고,

하사관 교육대에서 라 군을 괴롭히던 교관이 전기를 이용해 라면을 끓인 방법도 그중 하나였다.     

라 군이 자대 생활에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목격한 가장 화끈한 라면 끓이는 방법은 주로 ‘빼당’이라 불리는 페치카 당번병들이 끓이는 방법이었는데, 

그들은 주 병장 식의 봉지라면이 아닌 군용 반합을 이용한 라면 끓이기를 했다.


반합에 끓는 물을 붓고, 원래 뜨겁게 달아오른 기관총열을 교체할 때 사용하라고 보급되는 내열 장갑을 낀 상태로 막사 외부의 페치카 아궁이에 반합을 통째 집어넣는다.

분탄이라는 것이 탄가루와 진흙 같은 것을 섞어 물에 갠 것이라서 처음 불이 붙을 때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불이 붙으면 거의 소형 용광로 수준으로 열이 오르고 페치카 구조상 사방이 다 불구덩이라 반합은 순식간에 끓어오르므로 타이밍 조절을 잘해야 했다.

그렇게 끓여낸 라면은 약간 설어서 쫄깃함은 강했지만, 호불호가 있었다.

그 방법의 단점은 군용품인 반합의 겉면이 다 시커멓게 타버려서 나중에 장비검열 때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그런 상황에 쓰이는 반합은 보급대에서 기간이 오래되어 폐기처리 보고를 해야 하는 반합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야전에서 가장 위험한 라면 끓이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화약’을 이용한 것이었다.

포병들은 부대 특성상 ‘장약’이라는 것을 보유하고 있는데,

마로 짠 주머니 형태에 들어 있는 화약의 일종으로 포탄을 쏘아 올리는 추진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포신 속에 먼저 포탄을 집어넣고 쏘아야 할 거리에 맞춰 1, 2, 3, 4, 5호로 나뉜 장약 주머니를 포신 속에 넣고 격발을 시키면,

밀폐된 포신 속에서 폭발이 일어나 그 반동으로 포탄이 포구를 빠져나가는 것이 대포의 원리.

부대에 보관하는 장약들도 유효기간이 있어서 기간이 만료되면 폐기를 한다.

그렇게 폐기하는 장약 중 일부를 몰래 라면 끓이기에 사용하는 위험천만한 경우도 드물지만, 간혹 있었다.

깡통 같은 곳에 냄비를 걸쳐놓고 깡통 속에 휴지 같은 것으로 작은 불씨를 만든 후,

딱 쌀알만 한 크기의 장약들을 한두 개씩 던져 넣으면 순간적으로 거센 불길이 솟는다.

그 불길이 사그라지면 또 두어 개 집어넣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정말 위험한 것이라,

객기를 과시하는 일부 외에는 절대로 쓰지 않는 법이기도 하다.     

야전부대에서 할 수 있는 온갖 방법의 라면 끓이기를 맛보고 익혀가는 동안 라 군도 어느덧 중사라는 계급을 달았다.

이제 병사들과 아귀다툼할 군번은 일찌감치 지났다는 뜻이다.

물론 고교 졸업 후 바로 임관을 한 거라 현역 병사들과 나이 차이는 크지 않지만,

이제 라 군은 부대 내 중간 간부로서 위치를 굳히게 되었으니 그게 의미하는 바가 컸다.

라 군은 이제는 병사들과 내무반을 함께 쓰는 하사가 아니었다.


영내 간부 숙소에서 생활할 수도 있었고,

원한다면 부대 근처에 숙소를 구해 자취를 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이제 라 군에게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은 더는 야전부대의 이벤트가 아니며,

본격적인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 군이 부대 근처 중국집에 자취방을 구해 나가서 그날 저녁에 제일 먼저 한 일은, PX에 가서 면세로 나오는 라면을 여러 박스 사들여서 자취방 방 가득 쟁여놓고, 읍내 5일 장에서 바로 새로 사들인 노란 양은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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