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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un 28. 2024

라면 연대기 32

부제 :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보고서

라면 연대기 32     

새벽에 시작된 라 하사의 난동은 마지막 경계 근무자 교대 시간이 되어서야 끝났다.

두어 시간 후면 기상을 해야 하는 병사들은 구시렁거리며 다시 침상에 올랐지만,

매섭게 노려보며 나가는 라 하사를 보곤 더 투덜거리지도 못했다.


단체 기합을 받는 내내 라 하사로부터 얻어맞고 바닥을 구르던 주, 부, 두 병장은 흠뻑 젖은 내의를 갈아입지도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페치카 옆 잠자리로 올랐다.

말년이면 낙엽도 조심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모두가 잠들지 못한 상태로 잠이 든 척하는 내무반에는 다시 불침번이 오가고,

불그죽죽한 취침 등이 다시 켜졌다.     


- 야, 저 라 하사새끼 진짜 또라이 아니냐?   

  

주 병장이 부 병장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부 병장은 주 병장이 말을 거는데도 그저 누운 상태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 야, 부 병장. 이제 어떡할까?     


붉은 어둠 속에서 부 병장이 고개를 돌려 주 병장을 쳐다보았다.     


- 야, 너는 대학 특례로 두 달 먼저 제대하잖아. 나야말로 앞으로 넉 달이야. 넉 달간 저 또라이를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면 대학에서 교련 교육을 받은 것을 인정받아 3개월,

2년제 대학을 졸업하면 1개월 군 복무기간을 단축해 주는 제도가 있었다.

주 병장은 그 덕분에 3개월 조기 전역이 되는 것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부 병장은 주 병장과 동기였지만 만기로 전역을 해야 했다.     


- 그건 또 그렇네. 그러면 내가 전역할 때 저 새끼 소원수리라도 내볼까? 좀 치사하지만, 또라이라 방법이 없네.

- 야, 관둬라. 너 진짜로 말년에 고생하고 싶냐? 난 더구나 남은 기간 그놈의 소원 수리 때문에 헌병대 불려 가고 싶진 않네. 알잖냐? 소원수리함을 보는 게 중대장이잖아. 그러면 당연히 헌병대로 전달은 고사하고 단체로 빠따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 사단에서 나와서 직접 받을 때도 있잖냐? 이제 나올 때쯤 된 거 같은데....     


부 병장은 빤히, 그리고 날카롭게 주 병장을 노려 보았다.


- 너 진짜 그리 생각하냐? 너, 일전에 우리 일병 때도 헌병대 불시 소원수리 냈는데 그 헌병 하사새끼가 좔좔 중대장에게 알려서 우리 3일간 죽도록 고생한 거. 너 순진한 거냐? 아니면 넌 소원수리 던지고 나가면 그만이고, 3개월 말년 남은 나는 개고생 하라 이거냐?     


부 병장이 단칼에 거절하자 주 병장은 좀 머쓱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곧 사회인이 될 터였다.

굳이 군대의 잔영을 질질 끌어가며 사회로 나갈 이유는 없었다.

그저 좀 참고, 그것도 한때의 씁쓸한 추억으로 간직하면 될 것이었다.

솔직히 부 병장이 말한 그 속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 뜨끔 하기도 하고.     


원래는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야 할 내무반은 고요하고,

복도를 오가는 불침번의 발소리만 뚜벅뚜벅 들렸다.

두 병장은 각자의 생각으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소대원들은 오늘 새벽, 두 말년 병장의 천하가 또라이 하사 한 명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남은 병사들은 앞으로 두고두고 그 또라이 하사에게 적응해야 할 판이었다.

병사들은 반감이 일기는 했지만, 또라이로 인정된 하사에게 생명의 위협까지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꾸로 머리를 박든, 병장에게 변소 뒤에서 30분간 쥐어 터지든,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고 있을 테니까.     


행정반에 돌아온 라 하사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중대 당직사관인 2 소대장은 이미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린 채 잠이 들어있었고,

당직 병사도 난로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공포탄 소리에 놀랄 만도 할 텐데, 둘 다 천하태평이었다.

아마도 가끔 주변에서 일어나곤 하는 GP 오발사고로 생각한 모양이다.

당직 근무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흔한 총소리 같은 게 아니라, 따르륵 하고 무슨 기어공장 소리같이 울리는 군용 TT전화기 수신음 이거나 갑자기 초소를 통과해 들어오는 상급 부대 당직사령의 기습 순찰 같은 것이니까.     

자신의 자리에 앉은 라 하사는 가만히 두 손을 움켜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

공포탄 소리에 행정반으로부터 막사로 전화가 왔었을 때 어디서 들렸는지 모른다고 둘러댔는데도,

저리 편하게 잠이 든 당직사관은 아마도 전역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상태라 그렇게 태평한지도 몰랐다.

병사들의 ‘ 간부 길들이기’에 당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선임하사의 말이 떠올랐다.


" 처음 애들한테 얕잡아보이면 너 제대할 때까지 병신 되는 거다. 장교들이야 몇 년 있다가 다른 부대로 순환보직 하지만, 우리는 거의 평생 이 부대에 남아있잖나.

  그런데 애들한테 얕잡아 보이면 그 이후로 계속 대를 이어서 너에 대한 평가가 내려간단 말이야. 그러면 거기서 네가 헤어 나올 방법이 없다. 네가 힘으로 안 되면 깡으로든 뭐든, 고참 병장 놈들 제압해. 안 그러면 넌 나한테 죽을 줄 알아. "


사수의 으름장에 단단히 마음을 먹고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이제 겨우 군대, 그것도 자대에 배치된 게 한 달 남짓.

뭐가 뭔지도 모르는 가운데 형들 같은 병장들과 부딪친 것은 오기가 있어서였지만,

그래도 마음은 두렵기 짝이 없었다.

공포탄이지만 총을 쐈다.

아직도 귀에 이명이 있어 윙윙거렸다.

거치대에 올린 총열에서는 희미하게 화약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군복을 벗는 그날까지 ‘호구’가 될 가능성이 컸으니.

추운 날씨인데도 군복 등판이 흥건하게 젖었다.     


문득 의자에서 잠이 들었다.

생각한 적도 없는데 오랜만에 꿈속에 영애가 나왔다.

꿈이 꿈인 것을 알고 있는 자각몽이었다.

오래전 그 산동네가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영애와 마주 앉아 있었다.

포옹이 끝나고 울음이 끝난 언덕에.     

너 그래서 K 공고 가면 연락할 거야?

연락? 무슨 수로?

편지하면 되잖아. 바보야.

편지? 써본 일이 없는데.     

갑자기 배경이 공고 기숙사로 변했다.     

- 너, 이 계집애 누구야? 네 깔치냐?

- 아, 아닙니다.

- 그럼 누구야? 내용이 꽤 달달한데? 보고 싶은 라면아…. 하하

- 그냥 옆집 동창이었습니다!

- 에고, 그랬어요? 뭐 동창이면 어때? 따먹고 그러기도 하는 거지. 새꺄.

- 아, 아닙니다. 그런 사이 아닙니다.

- 근데 이 새끼가 선배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네? 야, 너 오늘 밤잠은 다 잤다. 야, 박아. 얻다 대고 선배말에 토를 달아? 토를. 오늘 밤 내가 잠들 때까지 바닥에 대가리를 박는다. 실시.

- 실시!     


꿈속에서 라미온 하사는 어리둥절 해졌다.

이게 당최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벌어졌던 일 인지. 아니면 하사관 학교에서 후보생으로 있을 때 일어났던 일인지, 그것도 아니면 자대배치 후 선임하사관들의 벌인 전입축하 회식에서 일어났던 일인지를 잘 판단할 수 없게 기억이 뒤엉킨 탓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왜 늘 땅바닥. 혹은 라면 그릇. 혹은 야전삽자루. 때로는 군형을 잡기도 어려운 치약 뚜껑에 머리를 박고 있어야 했는지에 대해서.

인간이 이토록 머리를 땅에 박는 게 숙명이라면 하다못해 정수리에 딱딱하게 굳은 살이라도 자라도록 진화가 되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싸구려 홍콩영화에 나오는 소림사 땡중들처럼 ‘철두공 鐵頭功이라도 단련하고 공고에 들어갔었어야 했나? 그런 건 입시요강에 없었는데 말이지.

라 하사는 꿈속의 꿈에서 기이한 생각들에 빠져 마치 깊은 바닷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해파리처럼 꿈결에 자신을 맡겨 부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심연 속에서 갑자기 시커먼 공기 방울이 솟구치는 게 보였다.

거대한 공기 방울은 잠결의 해류에서 흐느적이던 라 하사를 이내 감싸더니 격렬하게 터져 버렸다.


’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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