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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un 26. 2024

라면 연대기 31

부제 :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보고서

라면 연대기 31   

       

‘ 쾅! ’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폭음이 울리자 내무반 속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병사들을 기상시키며 켜져 있던 천장 형광등 하나가 깨져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주 병장의 일갈에 담요를 벗겨내던 병사들은 모두 스톱 모션에 걸린 배우들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주 병장은 입을 헤 벌린 상태로 아직도 천장에서 부스스 떨어져 내리는 형광등의 파편을 마치 내리는 눈 바라보듯 보고 있었고,

페치카 옆의 부 병장은 벌떡 일어나서 라 하사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정작 이 돌발상황을 만든 라 하사는 연기가 폴폴 날리는 M16 소총을 어깨에서 내려 오른손에 거머쥔다.

주 병장의 주도로 소대원들이 담요를 잡아당기기 시작했을 때,

라 하사는 왼쪽 어깨에 걸고 있었던 소총의 방아쇠를 눌러버린 것이다.

총구에서 공포탄이 천장을 향해 발사되고,

공포탄에서 솟은 화약이 그리 높지 않은 내무반 천장의 형광등 한 개를 깬 것이다.

전초 중대에서 근무하는 모든 병사는 근무 중 실탄이 들어 있는 탄창이 삽입된 상태.

탄창의 첫발은 사고방지와 경고의 의미로 늘 공포탄이 들어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의 총탄이 실탄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고 있다.     

모두가 뻣뻣하게 굳어있는 상황에서 라 군, 라 하사는 총구를 주 병장에게로 돌렸다.     


- 너, 전시였으면 하극상은 바로 즉결처분이다. 지금은 전시는 아니지만, 이곳은 GOP이므로 준 전시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죽고 싶나?     


나름 최전방 전초 중대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봤노라 하는 주 병장으로서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는 저 라 하사라는 또라이가 어처구니없다.

지난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봄에는 북한군의 화공작전으로 코앞에서 지뢰들이 폭발하는데도 불을 끄겠다고 야전삽을 들고 돌아다닌다거나, GP 관측소에서 북한군이 실수인지 고의인지 모르게 쏘아댄 기관총탄이 벙커 주변에 퍽퍽 박히는 꼴도 본 적이 있었고 야간에 철책으로 접근하는 북한군 침투조와 어둠 속에서 교전을 벌인 일들도 있었지만.

하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였다.

내복 바람으로, 따뜻 하다못해 지글거리는 내무반 안에서, 전 소대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깔깔이를 입고 총을 맞는다?

더구나 다음 달이면 전역인데? 이건 좀 아니었다.

말년 병장 입장에서 객기를 좀 부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거의 민간인이 된 자신이 저 족보도 모를 천방지축 스무 살 아기 하사와 더불어 자폭할 일이 무언가.    

 

- 어이, 어이. 라 하사님. 진정하슈. 워워 왜 이래. 여기 철책이야. 한밤중에 총소리 나면 큰일이 나는 곳이라고. 진정합시다. 내가 잘못했으니.

- 그래? 그러면 엎드려뻗쳐.

- 어? 아, 네.     


라 하사의 총구가 여전히 자신을 겨눈 것을 본 주 병장이 냅다 엎드렸다.  

   

- 하나에 군기, 둘에 확립. 풋샵 오십 회 반복. 알겠나?

- 아, 씨…. 알겠…. 알겠슴닷!     


미 해병대 점호


순간적으로 당황한 주 병장이 웅얼거리다 힘겹게 팔 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말년이라고 일도 훈련도 운동도 안 해 배가 슬슬 나오던 차에,

게다가 위아래 동계용 방한 피복을 입고 달아오른 페치카 옆에서 팔 굽혀 펴기 시작하자,

금세 주 병장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는 동안 병사들은 한 손에 붙든 군용 담요를 어쩌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침상에 서 있었다.

뒤돌아서 그들을 훑어본 라 하사가 고함쳤다.    

 

- 너희 새끼들. 병장 명령이라고 나를 모포 말이를 시키려고 해? 당장 침상에 다리 걸고 복도바닥에 대가리 박아!   

  

우당탕탕.

병사들의 처지에서는 아까와 같은 어정쩡한 상태에 있는 것보단 이쪽이 더 쉽다.

순식간에 병사들은 일제히 침상 끝에 발을 걸친 상태로 바닥에 일명 원산폭격을 실시했다.

개중엔 알아서 주먹을 쥐고 엎드린 병사들도 있었다.     


- 너희들은 별도 명령 내리기 전까지 그 자세 유지한다. 신음을 내거나 넘어지는 새끼는 모두 막사 밖으로 열외.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조용히 정리되고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만 들리는데,

라 하사의 눈에 페치카 옆에 웅크린 부 병장이 보였다.     


- 야, 빼당. 넌 왜 그러고 있어?   

  

라 하사가 쏘아보자 부 병장이 갑자기 분탄으로 시커메진 얼굴에 히죽 웃음을 머금는다. 

    

- 아이고, 분대장님. 빼당은 점호도 제외하는데. 저 페치카 불 보러 나가야…. 헙!     


이죽거리며 말을 건네던 부 병장의 도가니에 라 하사의 군홧발이 날아들었다.      

억!     

러시아 군인 훈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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