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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un 19. 2024

라면 연대기 30

부제 :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보고서

라면 연대기 30     


- 추웅~성! 근무 중 이상 무!     


갑자기 들리는 경례 소리에 주 병장과 부 병장은 젓가락질을 멈췄다.

젓가락이라기엔 좀 허접한, 부대 울타리인 싸리나무 가지를 벗긴 것이긴 하지만.

그들이 고개를 돌리자 마치 정육점 진열대의 불빛처럼 불그죽죽한 취침 등 아래로 막사 끝 출입문에서 누군가가 중앙의 페치카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불침번 초병이 다리를 절뚝이며 따라오고 있었고.     

보통 멀쩡하던 병사가 다리를 저는 경우는 세 가지다.

첫 째는 고참에게 쪼인트 (정강이 촛대뼈)를 군홧발로 까인 경우.

둘 째는 100km 행군을 끝내고 발바닥이 온통 물집으로 뒤덮인 경우.

세 째는 꾀병이다.


- 뭐야? 이게 '근무 중 이상 무' 인 상황이나?     


어두운 복도에서 페치카 앞으로 등장한 인물을 보고 두 병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바로 그들이 말하던 당사자, 라 미온 하사.     


- 뭔가? 두 말년 병장은 내무반에서 야간에 취식 금지 모르나? 게다가 취침 시간에 잠도 안 자는 것도 규정 위반 몰라?     


라 하사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두 병장에게 쏘아붙이자 엉거주춤 주 병장이 일어났다.     


- 아, 라 하사. 왜 이래. 우리 낼모레면 전역이야. 알지? 뭐 이런 게 어떻다고 그래. 선임하사도 근무 때 우리랑 같이 이렇게 해 먹는…. 컥!   

  

유들유들하게 깔깔이 상의에 손을 넣은 채 말을 꺼내던 주 병장의 가슴에 주먹이 꽂혔고,

주 병장은 허리를 숙였다.     


- 라 하사? 이 새끼가 개념을 상실했나. 내가 네 친구야? 나 네 분대장이야. 경례도 하지 않고, 불량 복장으로 잠을 안 자는 것도 모자라 지금 선임하사님을 팔아? 뒤질래?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부 병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페치카 옆에 앉아 있는데,

허리를 굽혔던 주 병장이 다시 허리를 펴며 욕을 한다.   

  

- 아, 이 새끼가. 끽해야 동생뻘인 새끼가 갈매기 하나 달았다고 이거 대장 노릇을 하려고 하네. 아 놔. 야, 고. 서 상병. 니들 밑으로 전원 기상이다. 선임하사에게 좇도 대가리를 라면 사발에 처박던 좆만 한 새끼가 어딜.


- 상병 고 민중! 상병 서 상주! 알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써 침상에 누워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침상 끝에 정렬한다.

자는 척만 하고 있었을 뿐 어차피 라면 냄새가 내무반을 진동하는 데 잠이 오는 병사들은 없었으니까.

사십 명 가까운 인원들이 우르르 일어나자, 

라 하사는 당황한 듯 주 병장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 주 병장.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그리고 고 상병, 서 상병, 너희들 내 말 무시하는 건가?     


라 하사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주 병장이 건들대며 마치 뒷골목 불량배처럼 목을 뚜두둑 소리가 나게 꺾는데,

부 병장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은 상태로 페치카 옆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침상 끝 선에 일어서서 나란히 굳은 표정을 짓고 아무것도 없는 시선 15도 위를 바라보는 병사들은 불안한 얼굴로 분대장과 고참 병장의 대치를 곁눈질한다.     


- 너, 지금 이 행동이 하극상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

- 하극사앙?     


라 하사의 말에 주 병장은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 나는 하사. 너는 병장. 당연한 하극상이다. 너는 야간 취침 시간에 당당하게 야식을 식사한 것도 모자라 이걸 제지하는 당직 사관의 명령에 전 소대원을 깨워 항명을 하는 거다. 맞나?     


라 군이 마치 법전을 외우기라도 하듯 침착하게 나열하자 주 병장은 잠깐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이 새파란 하사 새끼가 이 정도로 대책이 없는 인물일 줄은 몰랐다.

보통 신임 하사나 신임 소대장이 전입을 오면 고참 병장들이 주도되어 일종의 ‘길들이기’를 한다.

병사들의 처지에서는 자대 생활이라곤 알지도 못하는 새파란 신임 간부들이,

단지 계급장 하나 달고 와서 어른 행세를 하는 꼴이 영 마뜩잖은 것이다.

그래서 고참 병장들의 주도하에 단체로 경례를 하지 않는다던가,

원래의 계급에 해야 할 예의를 대강대강 하거나 명령을 안 듣는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병장들이 상병 이하 계급들에 지시해서 분대장을 부를 때 ‘ 김 하사님’이라 하지 않고 ‘김 하사, 혹은 김 하사요’ 하는 식으로 얼버무리게 하는 것이다.

이런 간부 길들이기는 사실 표면에 안 드러났을 뿐 대부분의 부대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났다.

그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공식적이 아닌 간부 개개인의 상황과 대처능력에 따라 달랐다.     


- 그래? 뭐 그랬다 치자. 근데 너 라 하사. 너 인마 내 막냇동생뻘이야.

사회 같았으면 나한테 말도 못 붙일 군번이라고.

근데 너 전방 온 지 며칠 되었다고 어르신 행세세요. 행세가.

내가 새우깡 하나 달고 죽자고 여기 철책에서 박박 길 때, 너 고등이었거든?

그런데 이제 낼모레면 사회인이 될 내가 라면 한 그릇 못 먹을 군번이냐 이거야.   

니가 군법, 군법 하는데, 나 사회에서 K대 법대 다니던 놈이야, 이 새끼야.

 

주 병장의 눙치는 말을 들은 라 군은 기가 막혔다.

여기서 조차, 군에서조차 자신이 배워온 모든 것이 또 부정을 당하다니.

라 하사가 대꾸를 못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자신을 얻은 주 병장이 침상에 서서 카키색 내복 바람으로 정렬해 있는 후임들에게 보란 듯이 큰소리를 쳤다.     


- 야, 안 되겠다. 얘들아. 오늘 라 하사 얘 멍석말이 좀 해야겠어. 너희들 모포로 이 새끼 좀 둘둘 말아.     

주 병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복 바람 병사들이 일제히 자신의 잠자리에 깔린 군용 담요를 벗기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커다란 굉음이 내무반을 울렸다.     


‘ 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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