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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un 13. 2024

라면 연대기 29

부제 :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보고서

라면 연대기 29     


페치카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한번 달아오른 페치카가 뿜어내는 열기는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강렬하다.

1 제곱미터 넓이에 이 센티미터 정도 두께가 되는 철판이 벌겋게 달아오르면,

그 주변은 용광로 근처인 듯 바짝 말라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 정도라도 기다란 막사의 끝부분에는 냉기가 맴도는 게 현실이니,

페치카 주변부터 높은 계급이 시작되어 문 옆 침상은 이등병의 것이 되는 것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방열판 위에 물에 푹 담근 국방일보가 깔리자 치이익 하며 거세게 물방울이 튀었다.

그 곁에 선 서 상병은 주전자로 신문지가 마르지 않도록 계속 물을 붓는다.

그러자 젖은 신문지는 계속 치익치익 거리며 수증기를 뿜어낸다.

이어서 고 상병이 입구를 통신용 전선으로 칭칭 둘러막은 라면 봉지 네 개를 신문지 위에 얹었다.

뜨거운 방열판 위에서도 녹지 않고 멀쩡한 라면 봉지들을 보며 서 상병은 감탄했다.     


- 주 병장님. 이거 정말 대단하지 말입니다. 대체 누가 이렇게 라면 끓일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이건 노벨상감 아임까?     


서 상병의 설레발을 들은 주 병장이 씨익 웃었다.

고슴도치처럼 뻗은 까까머리를 굳이 팔 대 이 가르마처럼 억지로 눕히고 누런색 동계용 야전상의 내피 –속칭 깔깔이-를 입고 있는 주 병장은 분명 이십 대 초반의 나이인데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복덕방 노인처럼 보인다.     

- 얌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다 고참의 고참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방식이지. 너 근데 이 페치카라는 게 어떻게 생긴 건지 아나?

- 네? 아, 모릅니다.

- 뭐? 너 인마, 러시아 전공이라며. 근데 페치카가 어떻게 시작된 지 몰라?

- 네 넵.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난 러시아 문학 전공인 데다 1학년 교양과목 듣다 군바리로 왔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

- 마 됐다. 모르는 게 뭔 잘못이나. 나도 잘은 모르지만, 러시아 페치카는 이것처럼은 안 생겼을 거야. 

- 네? 그건 왜 그렇슴까?

- 이 새끼 봐라? 고참 말에 토를 다네?

- 아, 아님다.

- 봐봐. 우리 방식이라면 저 바깥 페치카 화덕에 말이지, 계속 분탄(가루 석탄) 개어서 넣어야 하는 빼당(페치카 당번병을 말함)이 필요할 거 아니야. 근데 러시아 시베리아 같은데 드럽게 춥다며, 그러니 그걸 누가 하겠느냔 말이야. 얼어 뒈지게.     

- 야, 이 새끼들아. 라면 불겠다. 빨리 내려.     


찬 바람이 들어오나 싶더니 시커멓게 온 얼굴과 목덜미, 손에 새카맣게 분탄 재가 절은 사내가 페치카로 걸어 들어온다.

페치카 주변에서 떠들던 서 상병, 고 상병은 대강 차려자세를 갖추며 걸어오고 있는 상대에게 경례를 올렸다.     

-추웅성! 추운데 고생하셨슴다. 부 병장님.

- 됐다. 그 라면 봉지나 빨리 식판에 까봐, 배고프다.     


동계기간에 한 해 이른바 ‘빼당’ 이라 불리는 페치카 당번병으로 선임된 부 병장이 페치카 옆자리를 비집고 앉자 주 병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 야, 아…. 새끼. 내무반 들어올 땐 그 누더기 좀 벗고 들어오지. 이 분탄 먼지 어쩔 거냐?

- 지랄하네. 내 덕에 뜨신 페치카 끼고 매일 뒹구는 게 누구야? 호강하는 줄 알아. 새끼야.     

러시아어: Русская печь,[1] Печка        영어: Pechka, Russian oven (or stove)        일본어: ペーチカ, ペ  한국어 : 페치카. 사진은 '빼당'

훈련소 동기이자, 이 전초 중대에서 가장 최고참이 된 두 병장의 대화는 싸우는 것 같기도 하고 만담 같기도 해서 페치카로 일명 ‘뽀글이’를 끓이던 두 상병은 마주 보며 씩 웃는다.

그들 또한 훈련소 동기이기도 하고,

전초 중대에서는 곧 최고참으로 등극할 예정이니 어쩐지 저 늙어 보이는 두 병장의 농지거리가 남의 일이 아닌 것으로 느껴진 까닭이다.

두 병장이 토닥거리는 동안 상병들은 취사장에서 꺼내온 식판 두 개에 라면 봉지를 풀었다.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주 병장이 서 상병에게 손사래를 친다.     


- 얌마. 그거 다 붓지 마. 우리 곧 전역 아니냐. 몸매 관리 좀 해야 해. 세 봉지를 두 군데 나눠 붓고 나머지 한 봉지는 니들 둘이 나눠 먹어.

- 감사함다!     


서 상병과 고 상병은 동시에 기쁨에 찬 대답을 했다.

두 상병이 시시덕거리며 봉지 한 개에 들은 불어 터진 라면을 쩝쩝거리기 시작하자,

주 병장이 라면 국물을 수저로 뜨며 맞은편에서 정신없이 라면을 먹고 있는 부 병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 야, 빼당. 우리 그래도 참 마이 컸다? 예전에 우리가 쟤들처럼 뽀글이 끓일 때는 늘 일만 시켜놓고 지들끼리 라면 다 처먹고……. 봉지 버리러 나가면서 얼마나 봉지를 빨아먹었는지. 그런 거 보면 우린 참 좋은 고참이야. 그치?     


주 병장의 이죽거림을 듣던 ‘빼당’ 부 병장이 씹던 라면을 삼킨 후 주 병장을 바라봤다.

지금이야 군대이고 동기이니 서로 이렇게 바라보며 별 쓸데없는 이야기를 감상 삼기도 하지만,

아마 세상에 나가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판이한 인생을 살아갈 두 사람이었다.

부 병장은 아마도 다시 정육점에 들어가 칼질을 시작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건너편에 복덕방 아저씨 같은 모양새로 웅크리고 앉은 저 지저분해 보이는 녀석은 아마도, 서울에서 봄날의 캠퍼스를 누비며 대학 예비역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터였다.

어찌 보면 군대이기에 이토록 이전에 '사회'에서 하던 일이 뭐든 간에 계급적 평등함이 존재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 뭐, 예전보다는 그렇지. 우리도 어지간히 당했으니까. 그나저나.     


부 병장이 식판을 내려놓으며 페치카 건너편에 있는 주 병장을 바라보았다.     


- 주 병장 너. 그나저나 저 신임 분대장 어떻게 할 거야?     


천천히 식판의 국물을 음미하던 주 병장은 부 병장의 말에 인상을 확 구겼다.     


- 아, 놔. 라면 맛 떨어지게. 어떡하긴 뭘 어떡해? 우리 제대하기 전에 손 한 번 봐줘야지.

그 라면인지 쫄면인지 하는 하사 새끼가 병장 말년을 피곤하게 하네.     


겉늙어버린 이십 대 초반의 두 고참병장 눈에 살기가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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