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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un 10. 2024

라면 연대기 28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보고서

라면 연대기 28     


억지로 식도를 역류하는 라면 국물을 우겨 삼키려니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 형태라서 신물이 기도로 들어갔다.     

캑캑!

기침을 발작적으로 터뜨리며 라 군이 바닥을 뒹굴자 그때까지 빙글 대며 바닥에 나란히 머리를 심고 있는 초임 하사들을 바라보던 박 중사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 아, 뭐야 이 새끼? 그 정도에 거품을 뿜고, 지랄이니? 야, 김 하사.

- 넵. 하사 김 시누

- 오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 라면이 새끼, 이름값 하느라고 내가 갖다 버리라는 라면 국물을 처마신 모양인데, 오늘 이놈이 라면을 증오하게 만들어 주지 않으면 내가 2중대 박 중사가 아니야. 너, 지금부터 전기 라면을 끓이도록 한다. 실시.

- 넵? 넵. 실시!     


세 명의 신삥 갈매기들이(하사를 갈매기라고 비하하는 칭호) 시멘트 바닥에 구멍이 뚫어지라 머리를 심고 있는 동안,

김 하사는 분주하게 전기 라면을 끓일 준비를 했다.

훈련 기관인 하사관 학교는 교관들이 자신의 당직근무 때 야식을 먹으려고 개인적으로 휴대용 가스버너 같은 것을 행정반에 숨겨놓곤 한다.

하지만 전방 부대들은 부대 내에 화기를 놓으면 안 되는 규정이 있어서 마땅히 라면을 끓일 도구가 없는 게 보통이었다.

특히 외따로 떨어진 부대들은 자체 취사반이 유일하게 조리용 화기가 있는 곳인데,

그 화기라는 게 거대한 대형 등유 버너와 같은 것들이라 매 끼니를 위해 불을 붙이는 것이라서 잠깐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면 한겨울에 페치카와 같이 난방기구가 가동될 때가 아니면 딱히 뭘 끓일 수 있는 조리기구가 없었다.

전기로 물을 끓이는 쿠커 같은 게 없던 시대라, 외딴 부대에서 개인이 라면을 끓일만한 도구가 없었는데,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통신용으로 나오는 전선을 이용해서 야전 군인들은 라면을 끓였다.     

일단 물을 담는 그릇은 금속이어서는 곤란했다.

가장 만만한 게 단체 세면실이나 취사장에 있는 플라스틱 바가지였는데, 거기 찬물을 붓고 라면 수프를 뿌린다.

그리고 전선에 스테인리스 군용 숟가락을 연결하여 그 숟가락을 바가지 물속에 담근다.

전선은 피복을 벗겨 케이블이 노출된 부분을 하나씩 콘센트에 꽂는 것이다.

이게 맹물 같으면 잘 반응이 없지만,

라면 수프가 일종의 촉매 역할을 해서 물속에서 전기분해가 일어나게 된다.

화학적으로는 물속에 넣어진 수저들이 라면 수프를 끌어당기면서 일종의 도금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때 열이 발생하면서 순간적으로 물이 끓어오르는 것이다.

그렇게 끓는 물은 실제 물이 끓는 점보다 온도가 낮아서, 거기에 라면을 넣으면 라면이 풀어지기는 하지만 끓여진 것이라기보다는 높은 온도의 물에 불린 것과 비슷하다.     

김 하사는 당직사관인 박 중사의 진두지휘 하에 커다란 바가지에 라면 다섯 개를 삶았다.

당직실인 행정반은 라면 수프 냄새로 가득한데,

아직도 머리를 바닥에 박고 있는 세 갈매기들의 얼굴은 거의 대춧빛으로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 선임하사님.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라면 끓이는 방법을 배우신 겁니까? 정말 대단하심다.     


김 하사가 감탄하며 박 중사를 향해 엄지를 추켜올렸다.     


- 마, 그 주임 상사가 전방 근무 때 그렇게 매일 라면을 끓였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근데 저번에 해서 먹어보니 좀 그저 그렇더라고. 아무래도, 라면은 부루스타지.

뭔 전기 실험하듯 이렇게 끓이면 빨리 끓긴 하는데 맛이 좀 그래.

그러니까 오늘 이 라면으로 저 라면 새끼 좀 교육해 보자고,

야, 라면. 기상.     


- 하사 라미온! 기상!     


박 중사의 말에 라 군은 벌떡 일어났다.

빨갛다 못해 자줏빛으로 물든 라 군의 얼굴에 비 오듯 땀이 흘렀다.     


- 너는 지금부터, 이 바가지 안에 든 라면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는다. 알았나.

- 네! 알겠습니다.

- 아, 물론 시간이 필요하지. 여긴 훈련소지 분식집이 아니잖아.

앞으로 오분 주겠다. 오분 안에 바가지가 비워지지 않으면, 넌 오늘 잠은 몰수고 내일도 종일 연병장 뺑뺑이야. 알겠나?

- 네? 오, 오 분입니까?

- 이 새끼가? 뒈지려고. 말대꾸했으므로 삼 분 준다. 삼 분 안에 다 처넣는다. 실시.

- 실.. 실시!     


라 군은 바가지에 가득 불어 터지고 있는 라면을 향해 손을 뻗어나가다가 멈칫했다. 무엇으로 라면을 먹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라 군이 멈칫거리자 박 중사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 뭐 해? 아 이 새끼, 군기가 빠졌구먼. 군기가.

- 아님다! 뭐로 먹어야 하는지 몰라서….

- 뭐? 이 새끼야 바가지 옆에 있는 수저 안 보여? 그걸로 처먹어!     


라 군은 전기분해를 하느라 새카맣게 변한 숟가락을 덥석 쥐었다.

아직 뜨거운 상태인 스푼에 깜짝 놀랐지만, 박 중사에 대한 공포가 더 컸던 라 군은 바가지에 가득해진 라면을 삼키기 시작했다.

뜨거운 라면도 훌훌 잘 먹고, 라면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라 군이지만,

이 라면은 그야말로 정체불명의 맛에 오직 뜨겁기만 했다.

플라스틱 바가지에 끓여져 비닐 냄새가 나는 라면은 마치 밀가루 국수를 날것으로 뜨거운 물에 불려놓은 맛이 났다.

그렇게 불어 터진 라면을 라 군은 허겁지겁 삼켰다.

입천장이 벗겨져 나가는 것도 모르고. 오직 뜨거움만이 가득한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삼키고 또 삼켰다.


- 동작 그만. 이 새끼가 선임하사 말을 아주 우습게 씹네? 삼 분이라 했지? 너 이 새끼 삼 분 넘었는데 아직 반밖에 못 처먹어? 너 안 되겠다.

- 네? 아…. 아닙니다!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바가지를 바닥에 놓고 거기에 대가리를 박는다 실시.

- 실시!     


그날 새벽이 다되도록 라 군은 뜨겁게 불어 터진 라면이 넘치는 바가지에 머리를 박고,

다시 일어나서 발길질을 당하고,

다시 또 바가지에 머리를 박는 기이한 루틴을 반복했다.     

라 군의 거꾸로 처박힌 눈에 보이는 건 라면 국물과 바가지의 경계수면.

극적으로 불어 터진 라면과 건더기들의 잔해가 희미하게 보이는데 머리는 타는 듯 뜨겁고,

눈에서는 뜨거운 열기와 매콤한 라면 국물이 들어와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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