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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un 03. 2024

라면 연대기 27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27     

후루루룩.

짭조름한 라면 국물이 목울대를 넘어 식도를 내려가자 따스한 라면 국물의 온기가 서서히 몸에 퍼졌다.

어두컴컴한 건물의 뒤편에서 라 군은 가급적 소리가 나지 않게 애를 쓰면서, 식판 바닥에 남은 라면 국물 한 방울을 놓칠세라 조심스럽게 식판을 기울여 입술에 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간혹 말캉이는 식감, 졸깃한 식감이 느껴지는 것이 바닥에 가라앉은 라면 부스러기와 수프의 건더기가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건물 귀퉁이를 바람이 한 차례 휘감고 돌아가자 목덜미에 솜털이 부스스 일어났다.

쫍쫍 거리며 거칠거칠한 식판- 식판이라지만 금속도 아닌, 흔히 ‘흔히 빨강 대야’라고 부르는 정체불명의 합성수지로 만들어진 - 의 모퉁이를 핥아도 더는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자 라 군은 아쉬운 마음으로 한껏 치켜들었던 식판을 내렸다.     


어둠이 가득 내려앉은 연병장에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낮에 젊은이들의 함성과 뜀걸음으로 먼지가 보얗게 일어나던 연병장은 어둠에 둘러싸여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늘에 점점이 뜬 별뿐이었다.

전방이고, 일몰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창문에는 두꺼운 차양막이 내려져 ‘등화관제’를 실시하는 곳이니까.

라면 식판을 내려놓으며 라 군은 떠올렸던 오래전 영애와의 헤어짐을, 그 진득하고도 짧은 기억들을 털어 내렸다. 이제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좀 더 지체했다간 아마도 정강이에 시퍼렇게 혹은 시뻘겋게 물든 멍자욱이 하나 더 늘어날 것이다.

식수대를 틀자 쏴 하고 물이 쏟아져 나왔다.

빛 한가락 없는 어둠 속에서 라 군은 오직 손에 닿는 시린 물줄기와,

익숙해진 사각형의 고무 식판을 더듬어가며 설거지를 마쳤다.

최전방의 물은 밤이 되면 여지없이 얼음에 가까운 온도라 곧 손의 얼얼함이 무감각으로 바뀐다.     


- 전선

- 당나귀

- 누구냐

- 당직하사

- 용무는

- 복귀 중     


늘 하던 대로 막사의 출입문을 두드리니 반복되는 암구호. 그리고 불침번의 수하

항상 반복하면서도 익숙해지기 어려운 바보 같아 보이는 수칙.

불침번이 문을 열어주자 옅은 녹색의 불빛이 어둠이 가득한 막사 밖으로 커다란 칼 같은 모습으로 비어져 나왔다.

라 군이 식판을 쥐고 막사로 들어서자 불침번을 서던 녀석이 소곤소곤 말을 걸어왔다.     


- 야, 라 하. 또 박 중사 설거지냐?

- 어

- 하, 참. 망할 새끼. 라면 한가락 주지도 않으면서     


식판을 들고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불빛 틈새로 들어서는 라 하사의 뒤통수에 대고 불침번을 서는 모병장의 웅얼거림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 하, 고문관 갈매기 새끼. 명색이 장기하사가 식판 당번이 뭐여. 내가 다 쪽 팔리네. 씨발 ”

라 군은 불침번의 웅얼거림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행정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참 사병들의 비웃음 같은 건 이미 몸에 익은 지 오래였고, 그런 것으로 다투기에는 자신보다 나이도 한참이나 많은 병사들이 많았다.

게다가 본가의 살림살이 나 학벌로만 따져도 라 군은 한참 아랫것에 불과한 핏덩이라 생각할 터였다.    

 

야전 수칙에 따라 등화관제를 하는 막사의 복도는 아주 낮은 촉의 초록색 등으로 사람 형체만 보일 정도로 희미한 안내 등이 켜져 있고, 복도를 중심으로 오른편과 왼편에는 후보생들이 잠을 자는 내무반들이 길게 열을 지어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문 앞에는 이인 일조의 불침번들이 서 있었고,

라 군에게 문을 열어준 불침번은 전체 막사의 출입문을 통제하는 초병이었다.

그 기다란 회랑의 중앙에 빛이 스며 나오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 바로 간부들의 사무실이자 야간 당직실이기도 한 행정반이었다.

문 앞에 선 라 군은 심호흡을 길게 들이쉬고 내뱉은 다음 잠시 망설이는 손짓으로 노크를 한다.     

똑. 똑.     

라 군이 들어서며 왼쪽 옆구리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식판을 끼고 오른손으로 경례를 척, 붙이자 행정반 출입문 바로 정면에 있는 책상에 발을 엇갈리게 올려놓고 있던 퉁퉁한 사내가 씩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 야, 라면. 너 이 새끼 왜 이렇게 설거지 하나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나? 가서 딸딸이라도 친 거냐?     


부동자세로 방금 씻은 식판을 옆구리에 끼고 있으니 물기가 군복을 적셔 빨리 내려놓고 싶던 라 군은 당직 사관이 던지는 말에 굳어버렸다.     


- 어, 혹시 국물 버리지 않고 몰래 먹은 거 아니지? 엉?     


여전히 책상 위에 올려놓은 군홧발을 까딱거리며 한 손으로는 콧구멍을 후비면서,

당직 사관 박 중사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어투로 심드렁하게 라 군에게 질문을 던지고,

당직 하사인 고 하사는 키득거리며 읽고 있던 만화책을 뒤적이는데,

오늘 당직병으로 임명된 병사는 문 옆에 뻣뻣하게 차려를 한 자세로 싸늘한 기류 변화에 표정이 굳었다.

중앙에 놓인 책상과 그 좌우로 대칭이 되게 늘어선 철제 책상들은 하나같이 옅은 카키색이고,

그 책상들이 세워진 ‘디귿’ 자 형태로 문을 향하고 있어서 책상 뒤 중앙에 앉는 당직 사관과 좌우에 늘어앉은 당직 하사, 당직 사병.

이런 배치의 모양은 문으로 막 들어온 당사자 처지에서는 갑자기 법정에 들어선 미결수 같은 공간적 압박이 되는 것이다.

가뜩이나 그런 분위기인데 들어서자마자 대뜸 자신이 했던 행동을 귀신같이 짚어낸 박 중사의 번들거리는 눈길에 라 군은 바짝 주눅이 들었다.

게다가 그 법정처럼 보이는 책상 배열의 중앙에는 이미 누군가 병사 두 명이 끌려와서 

야릇한 앓는 소리를 흘리며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새우처럼 처박고 있었으니까.  

   

- 아, 아닙니다. 하사 라 미온!

- 뭐가 아냐. 이 라면 새꺄. 니 주둥이에 묻은 국물 자국이나 지우고 헛소리해! 당장 대가리 심어!     

씨바. 초급간부가 먹다 남긴 라면국물을 처먹어? 엉? 넌 존심도 없는 새끼냐? 엉?

니가 간부라니 잠든 내 좆이 웃겠다. 씨발놈아


반사적으로 라 군은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정수리를 박았다.

조금 전 삼켰던, 박 중사가 먹고 버리라 했던 라면 국물이 식도를 역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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