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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May 18. 2024

라면 연대기 26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라면 연대기 – 부제: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고찰 보고서


26     


말없이 라면을 다 먹고 노을이 저무는 한강을 바라보는 라 군에게 영애는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아직 어린 자신이 뭘 어찌할 수는 없지만,

영애 스스로 소견으로도 자기 아버지가 라 군의 아버지 병원비를 월세 보증금에서 대납한 것으로 했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불합리해 보였다.

그러나 당시에 그 움막 같은 집에조차 세를 들어오겠다는 사람들은 넘쳤고,

세입자를 고르는 권리는 주인에게 있었다.

그런 데다 그린벨트 지역이 확정되면서 버티고 버텨내다 강제로 철거를 당하고, 그 과정에서 어딘가에 고용된 동네 깡패들에게 두드려 맞고 내쫓긴 산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아래 시장통으로 몰려 내려오면서, 아랫동네는 늘 방을 구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났다.

결국 그 깡패들 역시 그 동네에서 빌붙어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시장통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리 넉넉한 형편들은 아니었지만, 라 군네처럼 산동네에서 살던 사람들은 그보다도 못해 보였었으니까.

라 군이 아버지의 일로 상심하고, 그것으로 어딘가 영애의 부모에게 불만 같은 걸 가진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영애의 처지에서 라 군의 편을 들어줄 수도 없고.

설사 편을 든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음은 영악한 영애는 알고 있었다.     


- 난 어차피 K 공고를 갈 거야. 그러니 이제 이런 놀이는 그만두자. 그럴 시간이 없어.

어머니 일 나가는 동안 아버지를 돌봐야 하거든.     


라 군이 담담하게 한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애는 다시 한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말을 꺼낼 때 라 군의 얼굴은 갓 솜털이 벗겨진 소년의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작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회 한 어른이 라 군의 몸뚱이에 깃든 것 같아서 영애는 눈을 깜짝이며 라 군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지는 해는 더 깊게 드리워져 한강에는 마치 붉은빛으로 강을 가르는 것처럼, 석양의 붉은 빛줄기가 거대한 날붙이의 달궈진 칼날 같은 대담하고 장엄한 빛줄기만 보였다.

어둠이 스멀거리며 내려앉는 강물 위로 해넘이의 잔영이 비쳐 멸치 떼 같은 윤슬이 반짝였다.     


- 미온. 네가 꼭 K 공고를 가야 하는 거야? 거기, 되게 무서운데라며. 기숙해야 하고. 게다가.. 그 공고 다니는 애들 꽤 무섭다고 하던데? 넌 나와 달리 공부도 잘하고, 너 전교등수에 드는 애잖아? 대학도 좋은 데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학교 나오면 직업군인으로 오래 있어야 하는데 아닌가?     


영애가 평소 같지 않은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자, 라 군이 고개를 돌려 영애를 바라보았다.

자그만 라 군의 얼굴 한편이 붉은 노을에 물들어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소년의 눈동자는 마치 화선지에 떨어진 먹 방울처럼 아무런 빛이 없는 검은 동자가 보였다.

그 표정은 그저 목각을 깎아놓은 듯 딱딱하고, 무표정했다.

평소에 영애를 바라볼 때 같은 시선 돌리기 나,

붉어지는 얼굴색은 없이 그저 무표정과 무감정이 라 군을 휘감고 있었다.     


-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난 일반 고등학교 갈 돈이 없어. 그런데 무슨 대학? 설사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는다고 해도, 아버지 치료비는 어쩌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니 난 군인이 될 거야. 군인으로 살면 되는 거지 뭐.     

‘ 너 군인이 뭔지나 알고 하는 말이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영애는 말할 수 없었다.

라 군 말대로 자신이 무슨 상관이며 무슨 영향이 있단 말일까.

점점 짙게 드리워지는 라 군 얼굴의 음영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영애는 그것이 라 군이 기괴한 모습으로 웃는 모습이라는 걸 잠시 후에야 깨달았다.

눈은 전혀 미동도 없이, 입꼬리만 슬쩍 치켜 올라간 라 군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섬찟했다.

한참 그렇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는 라 군의 눈동자는 평소의 어딘가 순진하고 어딘가 어리바리해 보이는 시선이 아닌,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이따금 숲에서 마주치던 삵의 눈동자차람 파랗게 빛났다.     


- K공고 애들이 무섭다고? 글쎄, 똥통 중의 똥통인 우리 산동네 출신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 알잖아? 부모님들도 밖에서 누가 어디 사는지 주소를 물으면 동네 이름을 대지 못하고 어물쩍 옆의 부자 동네 근처라는 식으로 둘러대는 거. 그런 지경에서 자랐는데 무서울게 뭘까.    

 

한마디 한마디를 꼭꼭 씹어서 내뱉는 것처럼 말하고는 다시 라 군은 한강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얼굴이 마치 올무에 걸린 삵 같다는 생각이 영애의 머리에 자연스레 떠올랐다.     


영애의 삼촌은 월남전에 참전한 해병대 병사였다.

그리고 반년 만에 돌아온 건 전사 통지서 종이 한 장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죽어 돌아온 것에 영애의 엄마는 통곡했었지만,

영애는 워낙 어릴 때라 뭐가 뭔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이후에 시장통에서 세를 살던 영애네는 비록 좋진 않아도 지금의 집으로 이사했고,

아버지도 어찌어찌 괜찮다는 자리로 운전기사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전에 영애의 아버지는 보통의 월급 용달 기사였으니까.

그 덕분인지 영애의 엄마는 집안에서 목소리가 커지고,

어려운 살림인데도 딸들을 리틀 엔젤스에 넣으려고 동분서주하고 그랬으니까.

그 뒤로 아버지가 운전하는 사장 댁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것은 영애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영애의 기억에 군대란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라 군은 그런 군인이 되겠다는 것이고.     


- 미온아. 너 근데……. 나하고 떨어지는데 아무렇지 않아?     


말을 꺼내놓고도 영애 스스로 아차 싶었다.

아직 어리기 짝이 없는 자신과 라 군. 둘이 대체 무슨 사이란 말인가?

어릴 때부터 은근히 쌓여온 반항기 때문에 어찌 보면 자신이 좀 ‘노는’ 아이이긴 해도,

그래봤자 중학생일 뿐이다.

그리고 라 군 역시 그렇고 그런 보통의 소년일 뿐.

영애의 말에 라 군의 무표정 하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다시 먹물 같은 눈동자가 돌아왔다.

그사이에 이미 해는 완전히 떨어져서, 강 너머 지평선에 보이는 공사장들의 실루엣 뒤로 황혼의 잔영만 불그스름하게 남아 있었다.     


- 네가 나에겐 뭔데? 우린 그냥 주인집 딸과 셋집 아들, 그게 다야.     


라 군의 말에 영애는 울컥하여 쏘아붙이려다, 멈칫했다. 라 군의 무표정한 눈가에 반짝이는 물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영애는 성난 표정을 풀고, 라 군에게 다가가 라 군을 꼭 끌어안았다.

라 군은 이제 우듬지에 가득 채워진 어둠처럼 고요히 들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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